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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내 INAE Aug 15. 2019

국어국문학과를 전공한다는 것

[사적인 일기] 내게 충고하는 사람들에게 오늘만큼은 하고 싶은 이야기

무슨 대학교를 다니느냐 물어보는 것은 실례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적당히 알아가야 하는 관계에서 이렇게 질문한다. "무슨 학과예요?"


그럼 나는 답한다. "국어국문학과예요."


내 답을 들은 사람들은 '아, 그렇구나~' 대꾸하며 아주 잠깐 내 눈을 피한다. 내 전공이 의아한 속마음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 열심히 다음 이야깃거리를 생각해낸다. 예의상 "국어 선생님 하면 되겠네"라며 내 전공을 응원하는 사람도 있고, 아니면 무례하게 보이고 싶지 않아 아예 다른 화제를 꺼내는 사람도 있다.


그중엔 간혹 자신의 속마음을 숨기지 않는 사람도 있는데, 그들의 질문은 간단하다. "왜요?" 이 질문 하나에 숨겨진 그들의 속마음과 차마 묻지 못하는 질문들, 아마 더 친해진다면 언제고 하고 싶을 조언과 충고들을 나는 안다.


왜 국어국문학과를 다녀요?
세상에 대학교가 얼마나 많고, 학과는 또 더 얼마나 많고, 그중 취업 잘 되고 전망도 좋고 실용적인 학과가 얼마나 많은데 왜 하필이면 국어국문학과예요?
선생님이 하고 싶으면 국어교육과를 가지. 아니면 기자? 그건 신문방송학과 가면 되고.
출판사에 들어가고 싶다고요? 요즘 출판사 전망 안 좋지 않나?
작가? 작가는 뭐 아무나 하나. 아니면 문예창작학과 갈 성적이 못 돼서 국문과 간 건가?
그냥 공무원 시험이나 준비해. 그게 제일 나아. 국문과 들어가는 애들 다 그렇지 않나? 적당히 성적 맞춰서 제일 만만한 학과 들어가 공부해서 공무원 하려고 들어가는 데가 국문과잖아. 맞지?


"아닙니다." 대답하고 싶어도 사람들은 그렇게 겉으로 티 나는 자신의 무례가 부끄러운 줄 알도 묻지 않는다. 그러니 물을 수 있는 한계는 "왜요?"가 전부다. 나는 거기에 답한다. 답해야만 한다.


"좋아서요."


거짓말하지 말라고, 국어교육과나 신문방송학과는 갈 성적이 안 돼서 못 가고, 평생 뜻이 없던 공부를 이제 시작한다고 경쟁 치열한 공무원 시험에 붙을 리도 없고, 그나마 적당히 게으르고 적당히만 노력하는 나니까 적당히 머리 굴린 끝에 내린 결론이 출판편집자인 것이고, 작가는 덤으로 꾸는 꿈 아니냐고. 그렇게 날 쏘아붙이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국어교육과나 신문방송학과를 갈 성적이 안 되는 건 맞지만 그 학과들에 갈 뜻은 애초부터 없었다. 이제 와서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기에 공부할 마음도, 공부가 가능한 체력도 안 되는 것이 맞지만 내가 정말 바라는 나의 미래는 내가 만들고 싶은 책과 내가 만나고 싶은 작가들과 내가 쓰고 싶은 글에 있다. 나는 적당히 게으르기에 적당히만 노력하는 사람으로 보일지 몰라도 적어도 내가 욕심내는 것에 대해선 평생을 바쳐 이뤄내기 위해 노력할 자신이 있는 사람이다. 난 그런 나를 믿는다. 


그렇다고 나와 다른 이유로 국문과를 전공하는 사람들을 비판하거나 섣불리 판단하는 건 절대 아니다. 순전히 취업을 위해 학과를 선택하는 사람들도, 다른 학과, 다른 학교로 가기 위한 교각으로 삼는 사람들도, 보험 삼아 들어와서 다른 스펙을 쌓는 사람들까지. 모두 자신의 인생을 설계하기 위해 선택했을 뿐이다. 다른 실용적인 학과들에 비해 인문대학의 학과들은, 그중에서도 국어국문학과는 그런 수많은 이유를 가진 사람들이 많이 모일 뿐이다.


하지만 각자의 많은 이유들과 서로 다른 미래를 꿈꾸는 그 많은 사람들은 국어국문학과 안에서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게 된다. 다른 건 없다. 국어와 국문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 그리고 책임감을 갖고 있단 것이다. 어째 당연한 말을 새삼스리 비장하게 말한 것만 같은 이상한 느낌이다. 사실 모든 학과의 전공자들도 똑같이 자기 학과에 갖는 자부심과 애정이 있기에 새삼스러울 말도 아닐 것이다.


단지 내가 말하고 싶은 국문과의 자부심과 책임감은 조금 유난스러운 점들이 있다. 유독 국문과가 그렇다.


국문과로서 챙겨야 하는 국경일과 기념일이 많아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8월 15일 광복절, 10월 9일 한글날은 말해 입 아프고, 5월 15일은 스승의 날이지만 국문과에겐 영혼 그 자체인 세종대왕의 탄신일이라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문학사 속 굵직한 작가의 생일이나 대표작 출판 몇 주년(예를 들면 윤동주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으로도 좋은 국문과 행사가 기획된다. 이 날들은 국문과에서 대표적이고 절대적으로 챙기는 날들이지만 이 날들이 아니더라도 한국사회에 무언가 메시지를 전달해야 하는 날이라면 앞장서서 그 날을 기념하는 학과가 바로 국문과이다.


언어란 인간이 또 다른 인간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 발달시킨 기술이다. 그 언어를 좀 더 효율적으로 표현해낸 것이 문자이고, 그 문자로 특정한 시대와 국가, 당시의 사회와 사상을 때로는 상상력을 가미한 이야기로, 때로는 일기를 쓰듯 기록한 결과물이 문학이다. 시대가 변해도 언어와 문자, 그리고 문학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아는 것, 아는 것을 알리는 것, 그리고 지켜내는 것. 이러한 행위는 시간이 지날수록 켜켜이 쌓이고 연속된다. 수많은 점이 모여 선이 되고, 수많은 선이 모여 면이 되고, 그 면들이 모여 비로소 입체가 되듯 우리의 모든 것의 문학들이 모여 그렇게 역사가 된다.


그렇기에 국어국문학과는 단순히 한국어와 한글과 한국문학만 공부하고 연구하는 곳이 아니다. 전공수업으로 배우는 모든 것들은 문학과 동시에 역사이고, 이 나라 그 자체이다. 어떤 작가의 개인적인 환상은 그 시대의 청춘들의 대표적인 소원이기도 하고, 어떤 작품 속 인물이 겪는 지극히 개인적인 서사는 곧 한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 그 자체를 재구성하기도 한다. 국문과 학생들은 수많은 작품으로 시대를 읽고, 수많은 작가들을 통해 한국을 배운다.


여기서 또 누군가 묻는다. 그러니까 왜? 한국을 모르는 한국인이 어딨다고 비싼 등록금 내고 대학까지 가서 국어든 국문학이든을 왜 배워야 하느냔 건데?


물론 한국을 모르는 한국인은 없다. 하지만 그중에서 한국을 제대로 아는 한국인은 얼마나 될까?


국문과 신입생 때 탔던 한 택시에서였다. 기사님은 내게 학과를 물어보셨다. 국어국문학과라니까 평소 궁금하셨던 것을 질문하셨다.


"자동차 기어에 보면 중립은 N, 주차는 P, 주행은 D라고 쓰여있잖아요? 주변 아무 데나 둘러봐도 영어로 많이들 쓰여있죠? 한글이 과학적이고 위대하다면서 왜 사람들은 그 위대한 한글은 안 쓰고 영어를 쓰죠? 영어가 더 실용적이기 때문이지 않을까요? 그럼 왜 실생활에 필요도 없는 한글을 써야 할까요? 일제강점기 때 민족말살정책이 성공했다면 지금쯤 다른 실용적인 언어를 사용하며 한국이 더 발전할 수 있지 않을까요?"


잠자코 기사님의 말도 안 되는 말씀에 반박하려 말씀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겨우 말씀이 끝나 이제 대답을 하려는데 목적지에 도착하는 바람에 서둘러 내릴 수밖에 없었다. 한글과 한국어를 구분하지 못하시는 거야 그럴 수 있다 쳐도 일제강점기 이야기는 도무지 화가 안 날 수가 없었다.


잘못된 지식이 이렇게 무섭다. 잘못된 역사인식이 이렇게 위험하다. 자신이 잘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만큼 무서운 게 없음을 그때의 경험으로 절실하게 느꼈다. 나는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되어선 안 됐다.


한글로 하여금 얼마나 많은 우리가 평등하게 성숙해질 수 있었는지 몰라선 안 됐다. 일제강점기 때 우리말과 우리글과 우리 문학을 지키기 위해, 이름을 버리고 목숨을 버려도 그것만큼은 지키기 위해 당시에 얼마나 많은 피가 흘렀는지 나는 알아야 했다. 우리의 모든 상처와 영광을 두고두고 잊지 않기 위해 지금의 우리는 또 얼마나 많은 공부를 해야 하는지 국어국문학과를 전공하는 나만큼은 두고두고 잊지 않아야 한다.


제대로 알기 위해선 제대로 읽을 줄 알아야 하고, 제대로 알리기 위해선 제대로 쓸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무엇이든 제대로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모르진 않아도 제대로 알지는 못하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것을 속임 없이, 쉽게, 인상 깊게 알리고 싶기에.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의 지식은 바로잡고, 나 또한 어설퍼서 잘못된 지식에 휩쓸리지 않기에.

내 나라의 언어와 문자, 그것으로 문학을 잇는 작가들과 그들의 작품들, 그들이 갖는 가치를 가장 먼저 찾아내 이해하고 영감을 얻고 싶기에.


그러니까 언제고 내게 왜 국어국문학과를 전공하느냐는 질문이 들어온다면 그때마다 성실하게 답할 것이다.


"좋아서요. 좋아하는 만큼 지키고 싶고, 지키고 싶은 만큼 잘하고 싶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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