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인내심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인내 INAE Sep 06. 2019

날 '사용하게' 하는 사람

[사적인 일기] 날 '쓰게' 하는 사람 - #1

진부한 이야기일지는 몰라도,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이자,

내가 쓰고 싶은 글에 대한 미련이며,

글을 써 이루고자 하는 목표.


나의 사랑, 나의 뮤즈.

첫사랑이자, 첫사람, 그리고 첫 상실에 대하여.


그때 기억해, 나의 십 대의 마지막을 함께 불태웠던 너. 그래 한 치 앞도 뵈지 않던 그때 울고, 웃고, 너와 함께여서 그 순간조차 이젠 내 추억으로.    

방탄소년단(SUGA) 'First Love' 中


아직은 가장 옅은 햇살 안에서도 긴팔을 입으면 속이 후끈해지는 애매한 날씨지만, 가을이 온 것만은 분명하다. 이렇게 더운데 어떻게 가을이냐며 반팔을 고집하는 사람들은 말할 테지만 그럼 나는 당신들도 저녁이 되면 닭살이 돋아나지 않느냐며 웃어 보일 테다. 작년에도 그랬고, 내년에도 그럴 것이다.


작년에도, 올해도, 그리고 내년에도 가을은 그랬고, 그렇고, 그럴 것이다. 여름이 미적거리며 떠나길 주저하고 있을 때, 소심하게 찾아와 저녁이 되어서야 자리를 잡은 가을은 성급한 겨울의 침략에 저항하지 않고 제 자리를 내어줄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우린 가을을 그렇게 놓치겠지요.


그리고 그렇게 놓친 사랑이 내겐 첫사랑이었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가을과도 같던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선선한 가을바람처럼 시원했던 손의 오묘한 온기와 가을노을처럼 짙고 밝았던 황갈색 눈동자가 마음에 들었다. 그 손으로 뜨겁기만 한 내 손을 잡아줬을 때의 안정감과 그 눈으로 갈 곳을 잃은 내 시선을 붙잡아 그를 보게 한 매력이 좋았다. 그렇게 손을 맞잡고 눈을 마주쳤을 때 여지없이 고백한 그 자신의 사랑을 나는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여름의 찌는 듯한 더위를 좋아했던 그는 내 뜨거운 손을 좋아했고, 그가 먼저 손을 잡으면 되려 손을 꽉 쥐고 그를 향해 방긋 웃는 내 미소를 좋아했다. 그 웃음이 왠지 그 자신에게 '아무 말하지 않아도 다 알아. 그러니 괜찮아'라고 말하는 듯해 편안해지는 호흡을 좋아했다. 그도 마찬가지로 당신을 사랑했던 나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서로를 많이 사랑했고, 서로에게 많이 사랑받았다. 우리는 서로를 '운명'이라고 믿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만남조차 실로 범상치 않았다. 이제 막 열다섯이 됐던 해의 2월, 학원을 가기 위해 버스를 타고 30분을 가야 했는데, 그만 버스에서 잠이 들어 종점까지 가서 기사님의 성화를 들으며 내리게 됐다. 처음 당도한 낯선 지역, 여행조차 함께 아닌 홀로, 그것도 자기도 모르게 떠나와 나는 무서웠다. 그땐 스마트폰도 없던 때라 지도 어플을 켜서 버스정류장을 찾을 수도 없었다. 그러니 아무나 붙잡고 물었다. 그래야만 한다고 믿었다. "여기가 어디예요?" 그러자 내게 잡힌 낯선 이는 말했다.


"저도 여기 처음 와보는데, 같이 있을래요?"


그때 처음 열여섯의 당신을 만났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무슨 배짱으로 처음 만난 사람을 덜컥 믿고 곧장 근처 카페에 들어갔는지 모르겠다. 그와 나는 가장 저렴한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열다섯의 나는 돈이 없어 시켰지만 쓰기만 한 아메리카노를 다 마시지 못했다. 열여섯의 그는 나처럼 돈이 없어 시켰지만 고소한 아메리카노를 상당히 마음에 들어했다. 각기 다른 아메리카노를 앞에 둔 그와 나는 말을 나눴다.


그 또한 그곳이 종점인 버스를 타고 나와는 정반대의 동네에서 왔단다. 그곳에 사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 왔다가 길을 잃었는데, 설상가상으로 친구가 전화기가 꺼져있어 곤혹을 치르고 있던 차였다. 행여나 친구와 길이 엇갈릴까 봐 버스 정류장 근처를 서성이고 있을 때 내가 당신을 잡았다며 낯선 곳에 혼자라 무서울 뻔했는데 다행이라고 말했다.


내 사연을 들은 그는 점잖게 웃으면서 "학원 가기가 그렇게 싫었어요?"랬다. "가기 싫었으면 애초에 버스를 안 탔겠죠"라고 대꾸했더니 "아니라곤 안 하네요"라는 그의 말에 아니라고 대꾸하지 않았다. 그런 날 두고 그는 또 점잖게 웃었다. 그런 그를 두고 나도 웃음이 나왔다.


30분이 지났을 때 그의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약속시간을 착각한 탓에 늦게 나온 친구는 맞은편의 내 귀에도 들릴 정도로 큰 목소리로 연신 사과를 해댔다. 친구는 5분 만에 땀을 잔뜩 흘리며 왔다. 그는 친구에게 내가 탈 버스에 대해 물었고, 내가 맞는 버스를 타게끔 그와 친구가 배웅해주었다. 그는 내게 전화번호를 물었다. 휴대폰은 있었지만 전화요금이 많이 나와 엄마에게 혼이 날까 걱정됐던 열다섯의 나는 집전화번호를 알려줬다. 버스가 출발해 그가 내 시선 밖으로 밀려났지만 밀려나는 순간까지도 그와 나는 서로에게 손을 흔들었다.


내 이야기지만 열다섯의 나도, 학교를 여러 번 졸업한 지금의 나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운명 같은 만남이었다. 이 만남을 '운명'이란 단어가 아니고서야 설명할 수도 없고, 다른 단어로 설명되지 않았으면도 한다. 그렇게 사람을 만나 관계를 맺는 건 그 당신이 처음이었다. 그 또한 그렇게 사람을 만나 관계를 맺는 건 내가 처음이었다. 그렇게 그와 나는 서로에게 처음이자 유일한 관계가 됐다.


그 관계를 '사랑'이라 정의한 건 그로부터 2년 뒤의 일이었지만 서로를 사랑이라 부르지 않았어도 틈틈이 만나고 짬짬이 연락하며 지낸 시간 동안 충분히 서로에게 특별한 존재가 됐다. 그는 내게 그 자체였고, 나는 그에게 나 자체였다. 그래도 어색하여 놓지 못했던 존댓말이 서서히 느슨해질 즈음이 되어서야 그와 나는 우리의 관계를 '연인'으로 규정했다. 사실 그래 봤자 열일곱의 나와 열여덟의 그이기에 매우 거창한 단어이긴 하다. 그러나 서로의 존재는 서로의 삶에 있어 매우 거창했으므로.


그는 수많은 내 모습 중에서도 내 글씨체로 쓴 내 글을 좋아했다. 가끔 쓰는 일기도, 학교 수행평가로 낸 보고서도, 심심풀이로 썼던 유치한 로맨스소설도. 내가 쓰는 글이라면 모두 읽고 싶어 했다. 다른 건 몰라도 수준 낮은 소설만큼은 보여주는 날에 부끄러워 죽어버릴 것만 같아서 항상 '나중에'를 입에 달았다.


"나중에 보여줄게요."

"왜?"

"오늘보다 내일 더 잘 쓸 것 같아서."

"오늘은 어제의 내일이라고 말하면?"

"... 아, 진짜. 말장난하지 말고. 나중에 잘 쓰면, 응?"


알겠다며 웃던 그는 말했다.


"그럼 대신에 편지 써줘."


그때가 사귀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그는 내게 편지라는 미션을 줬고, 소설을 보여주는 것보다 편지를 주는 것이 내겐 더 솔깃했다. 집으로 돌아와 곧장 안 쓰는 공책을 꺼내 적었다. '당신에게'. 너무 올드한가? 'To. 당신'. 너무 가벼울까? 다시 '당신에게'. 무슨 말부터 적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30분 동안은 '안녕'을 쓰고 지우길 반복했던 것 같다. 내일 쓸까? 침대에 누워 자려고 해 봤지만 온통 신경은 책상으로 쏠려있었다. 편지를 쓰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편지를 기대하는 그의 얼굴이 눈을 감을수록 선명했다.


다시 일어나 연필을 들었다. 어차피 편지지에 다시 옮겨 적을 건데, 그냥 생각나는 대로 적고 나중에 고쳐쓰자. '안녕'으로 다시 시작된 편지 속에서 그와의 추억이 주마등처럼 펼쳐졌다. 처음 만난 날의 설렘과 남들은 보지 못한 나와 그의 모습, 서로를 독점했다는 만족감과 여전히 모르는 것 투성이인 우리이기에 아직 할 얘기가 많다는 기대감. 친구들과는 다르게 날 대하는 그 앞에서 내가 얼마나 특별한 사람이 되는지와 내게도 그렇게 특별해지는 그를 내가 얼마나 좋아하는지, 당신이 날 부를 때 들리는 내 이름이 가장 예쁘다는 사실과 이름으로 당신을 불렀을 때 당신이 짓는 표정이 뿌듯하다는 사실도. 


처음으로 그날 얇디얇았지만 공책 한 권을 순식간에 다 써봤다. 순수한 상상이 아닌 나 자신의 기억을 더듬어, 내 감정을 똑바로 들여다보고 내 머릿속을 깊숙이 침투했을 때 쓰이는 글의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를 경험했다. 가장 쉽고 빠르고 친근한 글쓰기를 경험한 것이다.


나의 소설의 결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순전히 드라마와 영화에서 느낀 상상으로만 쓰던 것이 원래의 소설이었다. 주인공도 드라마 속 주인공을 보듯 완전히 모르는 사람이었고, 내가 겪어보지도 않았던 세계의 일을 소설로 쓰려고 했으니 완성은커녕 감정이입도 안 되고 재미도 없는 그저 그런 소설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평면적이고 개성도 없었던 소설에 '나'를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를 만나 이루는 사랑을 쓰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누가 누굴 만나 사랑하게 되는 소설을 썼다면 이제는 '나'와 '그'가 '어떻게' 만나게 되어 서로의 '어떤' 존재가 되어 '어떻게' 사랑하게 되는 소설을 쓰게 된 것이다. 그런 소설이 쓰고 싶어 졌다. 그냥 쓰고 싶은 소설?이었는데, 그에게 떳떳하게 보여주고픈 소설!을 꿈꾸게 됐다.


그에게 떳떳하게,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여주고 싶은 소설이 쓰고 싶었다.

내가 당신에게 받은 사랑이 나를 얼마나 행복하게 만들었는지.

"사랑해"라고 말하지 않는 순간에도 내가 당신을 얼마나 꾸준히 사랑하는지.

이런 내 마음을 당신에게 자랑스럽게 펼쳐 보일 날이 앞당겨지길 바라며 소설을 썼다.


나는 알았어야 했다. 내가 얼마나 이기적이었는지.

내가 얼마나 당신에게 무관심했는지.

내가 마냥 당신을 철없이 사랑하기만 하는 동안, 내가 단순히 당신에게 듬뿍 사랑을 받는구나 생각하는 동안, 당신이 어떤 아픔을 홀로 감내해왔는지. 무관심한 내 일방적인 사랑에 당신이 얼마나 가슴 아파했고, 날 사랑하는 만큼 당신 자신의 아픔을 내게 드러내지 못해 속이 얼마나 썩어 문드러졌는지.


그 아픔이 결국 당신을 어떻게 앗아가게 됐는지 나는 알았어야 했다. 당신을, 그를 잃기 전에 나는 알았어야 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국어국문학과를 전공한다는 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