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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내 INAE May 08. 2019

책으로 먹고살고 지지고 볶고 다 하고 말 겁니다

[사적인 일기] 출판편집자와 소설 작가를 꿈꾸는 스물네 살의 이야기

학교에서 장래희망란을 적는 날은 떠들썩하던 친구들이 유난히도 조용해졌다. 예체능 특기생들이 아니고서야 금방 장래희망란을 적어낸 친구들은 드물었다. 우리의 열일곱은 특히나 그랬다. 짝꿍의 종이를 힐끔 쳐다보며 비웃기도, 감탄하기도 했고, 짝꿍이 쳐다보는 눈짓에 얼굴을 붉히면서 온몸으로 종이를 가렸다.


열일곱의 우리는 스스로에게 눈치를 보며 자문했다.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 걸까?

나는 바라는 무엇에 잘 어울리는 사람일까?

내가 원하는 건 무엇일까?

내가 무엇을 바랄 자격이 있는 사람일까?


그때는 그놈의 '장래희망'이 뭐라고. 우리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다들 조용한 교실 가운데 펜이 사각거리는 소리 속에 숨어 홀로 묻고는 답하지 못했다. 장래희망이 뭐라고 없는 사람 섭섭하게, 있는 사람 부끄럽게 말이다.


그 와중에 나는 오래된 장래희망이 있었다. 그것도 두 가지. 출판편집자, 그리고 작가. 거의 매년 반에서 첫 번째로 장래희망을 제출했던 나를 친구들은 내게 "부럽다"고 말했다. 그중에서도 절친했던 친구들은 "(나의 장래희망이)당연하다"고 말했고, 그중에서도 오래된 친구들은 "(나의 장래희망이)익숙하다"고 말했다.


내게 출판편집자이자 작가인 장래희망은 '나'란 사람 그 자체였다. 나는 가방에 읽든 안 읽든 책 한 권씩은 꼭 끼고 다니고, 새로운 곳에 놀러 가면 근처 서점은 꼭 들러 구경하는 사람이었다. 볼만 한 책을 추천받고 싶은 친구들은 가장 먼저 나를 찾았고, 나를 찾으려면 학교 도서관으로 오면 됐다. 상상하는 것을 글로 표현하는 걸 즐기던 터라 교과서 여백에 소설을 끄적이곤 했는데, 그 글이 나름 인기가 있어서 고정 구독자가 생기기도 했다.


나는 그랬다. 내 손에는 책과 노트와 펜이 담긴 손가방이 늘 들려있었고, 어디서든 책을 읽고, 글을 썼다. 꽤 오래전부터 내 이미지는 문학도, 또는 국어는 잘할 것 같은 애였다. 친구들도, 가족들도, 선생님들도 그렇게 생각했고,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나는 내 미래를 당연하게 생각했다. 글 쓰는 걸 좋아하니까 '작가'가 돼야지. 남의 글 읽는 것도 좋은데, 그럼 출판편집자도 해야지! 다른 재능을 찾을 새도, 다른 진로를 생각해볼 겨를도 없었다. 나와 내 주변인들의 머릿속에 나는 이미 완성된 출판편집자였고, 작가였다. 장난식으로 툭툭 내뱉는 '언젠가 곧 책 내는 사람이 될 텐데 싸인 미리 받아놔야 하는 거 아냐?'라는 말들은 순도 100%의 장난만은 아니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제가 책 내면 1인당 세 권씩 나눠드릴게요!'라는 대답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했다. 원하는 대학교는 아니었지만 후회할 만큼은 아니었다. 일단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한 것만으로도 내가 꿈꾼 미래에 가까워진 것만 같았다.


그곳에서 내가 '문학도, 또는 국어는 잘할 것 같은 애'에 불과하다는 현실을 깨달았다. 어쩌면 그보다도 못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국어국문학과라니. 동네에 이름난 문학도란 문학도는 죄다 모아놓은 학과가 아니겠는가. 그 속에서 국어는 잘한다며, 글은 잘 쓴다며 으스대거나 책 많이 읽는다고 잘난 척할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그제야 나는 자문을 시작했다. 남들은 열일곱에 시작할 때 나는 스물에 들고 스물셋이 되도록 질문만 해댔다. 나는 바라는 무엇에 어울리는 사람일까? 내가 원하는 무엇을 바랄 자격이 있는 사람일까? 옛날에는 답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바라는 책을 내고 글을 쓰는 삶에 나만큼 어울리는 사람은 없다고 확신했다. 자격은 말할 것도 없고. 글을 쓰지 않는 나와 책과 멀어지는 나를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러나 너무 성급히 내린 답에 다시 묻기 시작했다. 나보다 어울리는 사람이 너무 많은데? 나보다 책을 많이 읽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친구들 중에 책을 제일 많이 읽었을 뿐이었다. 내 세상에 책을 나만큼 읽는 사람이 없었을 뿐, 이 세상에 책을 나보다 훨씬 많이 읽는 사람이 너무 많다. 나보다 글을 많이 쓰는 사람도 너무 많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보다 재능이 넘치고 확실한데, 노력까지 하는 완벽한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늦은 건지도, 이른 건지도 모를 방황이 시작됐다. 전투력을 발휘하기도 전에 소진된 느낌. 내게 유일했던 재능, 내 하루의 모든 것, 내 정체성 그 자체였던 책과 글이 희미해졌다. 대학교 3학년이 끝나고 휴학을 감행했다. 그리고 책장을 버리고, 책들을 안 쓰는 옷장 속에 쌓아두고 문을 닫았다. 좋아하던 상상도 멈추고, 상상을 글로 표현하며 느끼던 희열도 잊었다. 어제 쓴 글을 오늘 읽으며 감탄하던 나를 외면했다.


그렇게 나를 지웠다. 아니, 정확히는 내게서 '책과 글'을 지웠다. 그렇게 하면, 책과 글이라는 거품을 내게서 지우면 진짜 내게 필요한 것, 어울리는 것, 내가 바랄 자격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줄만 알았다. 그렇게 1년을 보냈다.


휴학을 걱정해주시던 부모님과 뭇 어른들의 우려에 걸맞은 삶을 살았다. 이부자리에 누워 지냈고, 넷플릭스와 왓챠플레이와 유튜브를 전전했다. 해가 중천에 뜨고 다시 기울 때 일어나 새벽이 드리울 때 잠이 들었다. 간간히 전시회도 보러 다니고, 국내든 해외든 여행도 다녔다. 물론 손에 꼽을 정도뿐이었지만 이마저도 하고 나니 돈이 떨어졌다. 뭐라도 하려면 돈이 필요해서 평일과 주말을 가리지 않고 아르바이트에 전념하자 가장 되고 싶지 않았던 하루 벌어 하루 사는 하루살이가 되고 말았다.


휴학을 절대 쓸모없이 보내지 않겠다며 다짐했던 과거의 내게 부끄러웠다. 내 시간조차 제대로 써먹지 못하는 내게 그 무엇이든 바랄 자격이 있겠냐며 스스로에게 묻자 그 대낮에 친구를 보러 가는 길목에서 펑펑 울었다. 그리고 그 순간 가장 가고 싶었던 곳으로 향했다. 한동안 발길을 끊었던 서점 문을 열었다.


책 냄새가 났다. 온 세상 책이 산처럼 쌓여서 건드리면 쏟아질 듯했다. 사람들이 책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서서, 또는 앉아서 책을 읽는 사람들, 책을 고르기 위해 구경하는 사람들, 책을 한 움큼 집어 계산하러 가는 사람들, 손님을 맞으며 계산하는 사람들, 새 책을 뜯어 진열하는 사람들.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내가 바라는 내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오히려 눈 앞의 사람들을 너머에서 찾을 수 있었다.


나는 책이 아니었던 순간부터 책이 되기까지의 모든 순간에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원고가 원고가 아닐 때부터, 글이 글이 아닐 때부터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수많은 작가들 속에서 글을 배우고, 수많은 독자들 속에서 책을 배우는 출판편집자가 되고 싶었다. 고작 남들보다 책을 덜 읽는다며, 글을 못 쓴다며, 나보다 책에 더 어울리는 사람이 많다며 포기할 꿈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다시 내게 물었다. 나는 바라는 무엇에 어울리는 사람인가? 내가 원하는 무엇을 바랄 자격이 있는가?


이제는 답할 수 있다. 책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겠다. 내가 이렇게 원하는데, 내가 이렇게 바라는데. 그 열망과 열정과 애정을 다 해 책에 가까워질 것이다. 출판시장 속에 살아 숨 쉬는 편집자가 되고 말 것이다. 징징댈 시간에 책 한 권을 더 보고 서점을 한 번 더 가자.


책 잘 만드는 사람이 되자,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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