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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내 INAE Jan 19. 2020

매일매일 가계부를 쓰기가 얼마나 어렵냐면요

가난하게 살려고 쓰기 시작한 가계부

새해엔 욕심을 부리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목표를 하나만 세웠다. ‘매일매일 가계부 쓰기’.


지난해 가을쯤 가난하게 사는 연습을 하길 결심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가난하게 사는 연습을 하기 위해 무엇을 정확히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구체적으로 생각하고 계획을 세웠느냐고 묻는다면 부끄럽지만 대답은 ‘아니오’다.


막연하게 생각했다. 막연하게만 생각해왔다. 돈을 아껴야지. 밖에서 사 마시는 커피값을 줄여야지. 옷을 좀 덜 사지, 뭐. 휴대폰 클릭 한 번이면 손쉽게 결제할 수 있는 쇼핑앱을 삭제해야지. 택시 탈 돈만 아껴도 보고 싶은 친구에게 밥을 살 수 있겠다. 조금 불편하고 힘들어도 일찍 나와서 버스를 타자. 요즘 공공 와이파이가 얼마나 잘 되어있는데 굳이 데이터 무제한을 고집할 필요는 없잖아.


그래. 그렇잖아. 돈 아끼는 거 별로 어렵지 않잖아.


그런데 말이다. 이 모든 것은 모두 나의 추측일 뿐이다. 나는 내가 커피를 많이 마시는 줄 안다. 휴대폰 요금을 줄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입을 옷이 많다고, 한두 달 옷을 사지 않는다고 죽지 않는다고 믿는다. 최저가 쇼핑앱이 있지만 거의 필요하지 않아서 사용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고, 버스 탈 시간에 조금 더 자고 일어나 택시를 타는 못된 습관을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나를 그렇게 확신한다.


그러나 나는 내가 어디에 얼마나 돈을 쓰고 다니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하물며 한 달에 얼마를 벌어서 얼마나 쓰는지도 어렴풋이 알지 못한다. 통장에 돈은 늘 조금씩은 남아있으니 적자는 아니려니 생각할 뿐이다. 직장인 친구가 신용카드 청구서에 가슴이 두근거린다고 말할 때마다 ‘나는 체크카드만 써서 다행이다. 매달 빚을 지며 살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내가 정말로 커피에, 택시에, 휴대폰 요금에 돈을 많이 쓰는가?

그것들에 쓰는 돈을 줄여서 정말 필요하고 가치 있는 곳에 돈을 쓸 수 있는가?

아니면 그것들에 쓰는 돈을 줄여서 조금이라도 통장 잔고를 불릴 수 있을까?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다. 아무것도 단언할 수 없다. 나는 나의 소비습관을 전혀 모르기에 가난하게 사는 연습을 시작조차 할 수 없다. 에라이.


가계부를 쓰기 시작했다. 다년간의 경험으로 역시나 새해 계획은 작심일일이면 끝날 줄 알았는데, 어찌 정신을 차린 것인지 19일 동안 잘 쓰고 있다. 그러나 매일매일 꾸준히 썼는가? 그 질문에는 부끄럽게도 ‘아니오’라고 답해야 한다. 계획을 이행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았지만 깨달았다. ‘매일매일 가계부 쓰기’가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미션인지.



1. 시작이 어렵다.


1월 1일. 새로운 다이어리를 꺼냈다. 새 종이의 매끄러운 질감과 풋풋한 냄새는 언제나 새롭고 신선하여 짜릿하다. 적당히 하루를 다이어리 안에 정리하고 이제 가계부를 적어보려고 했다. 그런데 이게 웬 걸, 가계부가 없다. 그럼 어떻게 해야겠는가. 가계부를 사야지.


곧바로 자주 문구류를 구입하는 사이트에 들어가 쇼핑을 시작했다. 표지는 색감이 예쁘면서 무늬가 없이 깔끔한 디자인이어야 하고, 내지는 직접 카테고리를 적어서 관리할 수 있는 자유로운 형식이었으면 좋겠고, 크기는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아 매일 들고 다니기 수월하길 바라며 한 시간 가량을 모니터만 뚫어져라, 마우스가 부서져라 웹서핑을 해댔다. 성과는 없었다. 그런 가계부가 있을 리가 없다. 이럴 거면 내가 작정하고 만들어서 쓰지.


곧바로 휴대폰 앱스토어에서 가계부 어플을 둘러봤다. 내게 맞도록 카테고리를 조정할 수 있고, 매일매일 가지고 다니니까 돈을 쓸 때마다 바로바로 기록하면 되니까. 휴대폰만큼 늘 가지고 다니는 물건은 또 없고, 금액도 알아서 다 계산해주고 통계까지 내주니까. 하지만 디자인이 하나 같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나 같이 색깔이 너무 많거나 캐릭터가 그려져 있어서 어지럽고, 그나마 깔끔하고 보기 쉬운 어플은 무료 버전과 유료 버전으로 나뉘어 있다. 물론 유료 버전을 구입해야만 카테고리를 내 마음대로 바꿀 수 있고, 조그만 화면에 꼭 자리를 잡은 광고도 없앨 수 있다.


물론 실제 가계부를 사나, 가계부 어플을 사나 똑같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돈이 많아도 어플을 사거나 어플 속에서 캐시를 충전하는 등 휴대폰 거래는 웬만하면 하지 말자고 생각하는 주의다. 지문 한 번에 자그마한 돈이 뚝딱 사라지는 것이 익숙해지는 순간 내 통장에 생긴 구멍이 점점 더 커지는 건 시간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플도 패스. 결국 가계부를 직접 만들기로 했다.


마땅한 노트가 없는지라, 또 가지고 있는 아이패드를 안 쓴 지도 너무 오래되어 마침 잘 됐다 싶어 깔려 있던 노트 어플을 열었다. 완전무결하게 내 마음대로 쓰고 지울 수 있는 무지의 노트가 열렸다. 신이 난다.


신이 나서 가장 먼저 표지를 만들었다. 오랜만에 사용하는 아이패드라 글씨체 구경도 좀 하고, 이것저것 서로 다른 펜 종류도 눌러보며 써보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른 채 표지를 완성했다. 별로 특별하지도 않고, 휘황찬란하게 만들지도 않았건만 흰 배경에 연도와 가계부, 쓰는 사람 이름만 써서 배치했을 뿐인데 어느새 1-2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참나. 본격적으로 가계부를 쓰기도 전에 잘 시간이 됐다.


하지만 이왕 표지까지 만들었는데 가계부는 쓰고 자야겠다는 욕심이 생겼다. 바로 다음 페이지를 열었다. 1월 1일을 적고, 드디어 가계부를 시작해 보려는데. 잠깐. 카테고리를 만들어야 조금 더 수월하게 가계부를 쓸 수 있지 않을까? 표지에 시간을 너무 많이 썼으니까 얼른 카테고리를 설정하기로 했다. 어플에서 제공하는 색깔은 흰색 포함해서 10가지니까 색깔별로 하나씩 설정하면 되겠군.


오랜 고민 끝에 아홉 가지 카테고리가 나왔다. 식비, 카페, (일회성의)문화 및 여가비, 교통비, 택시비(대중교통과 택시는 상대적 필요성과 의도성이 다르기에 카테고리를 분류하기로 했다), 종합쇼핑비(화장품이나 옷, 문구류 등의 소비는 그냥 하나로 묶기로 했다. 나중에  통계 낼 때 필요하다면 그때 분류해도 되니까), (강의나 운동 등)자기계발비, 월정액(휴대폰, 넷플릭스, 왓챠 플레이 등),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타.


페이지에 자리가 남길래 이참에 현재 가지고 있는 자산을 싹 정리해서 써봤다. 통장별로 얼마가 있는지와 현금은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를 확인했다. 생각보다 가진 자산이 많지 않았다는 것에 조금 충격을 받았다. 지금 하고 있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월 140만 원을 받는데, 이 중 100만 원은 무조건 저금하고, 나머지 40만 원으로 한 달을 생활하자고 결심을 했었다. 가난하게 사는 연습을 하다고 다짐한 순간부터. 그럼 지금까지 근무한 지 6개월이고, 100만 원 저금을 시작한 지는 4개월 째니 다음 주에 1월 월급이 들어오면 400만 원이 모여 있어야 한다. 그런데 저금통장에는 250만 원뿐이다. 이번 달 월급이 들어오면 350만 원밖에 모을 수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나의 50만 원은 어디로 간 걸까?


그렇다고 용돈통장에 돈이 적당히 있는가? 그것도 아니다. 계획대로라면 한 달에 40만 원을 써야 하니 한 주에 10만 원을 써야 한다. 그렇다면 지금쯤이면 10만 원이 남아 있어야 한다. 그래야 21일 즈음에 청구되는 휴대폰 요금을 낼 수 있다. 그러니 내가 묻고 싶다. 왜 내 용돈통장에는 고작 1만 원이 전부인가. 현금도 없는데.


카테고리와 자산현황을 적은 2페이지가 드디어 마무리됐다. 가계부를 꼭 적어야겠다는 마음가짐이 불끈 다져지는 시간이었다. 여기까지 걸린 시간은 표지 제작 시간을  포함해 4시간 정도가 됐다. 앞으로 3시간 뒤면 출근 준비를 해야 하는 시간이었다. 아직 가계부 쓰기는 시작도 하지 못했는데.


일단 월요일 출근을 제대로 하기 위해선 자야만 했다. 돈은 벌어야 하니까. 이게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이니까. 가계부는 내일 퇴근하고 쓰자고 하고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잠이 들며 생각했다. 시작이 반인 이유는 시작하는 게 제일 힘들기 때문이지, 아무렴.



2. 뭐든 꾸준히 한다는 건 어렵다.


내가 게으른 이유도 맞지만 뭐든 없던 습관을 들인다는 건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운동도 안 하던 사람이 갑자기 하려니 근육통이 생겨 다음날 고생하듯이 안 하던 짓을 갑자기 하려면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는 것을 피할 수가 없다.


다음날인 월요일에 가계부를 써야지 생각하고는 결국 수요일에 아이패드를 꺼내고야 말았다. 틈틈이 돈을 쓸 때마다 메모해 두고는 있었지만 그걸 정리하려니 머리가 참 아파오더랬다. 다행히 뭐든 메모해두는 습관이 들여져 있기도 하고, 현금이 없어서 거의 체크카드로 결제를 해서 따로 메모를 하지 않아도 기록이 다 남겨져 있다. 문제는 ‘오늘 메모해뒀으니까 정리는 내일 하자’라는 미루기 또한 습관에 남아있다는 것이다.


모든 습관은 일기를 쓰는 습관과 비슷한 맥락을 가지고 있다. 안 쓰던 사람이 일기를 쓰자고 다짐하면 아마 작심삼일 안에 끝날 가능성이 높다. 모처럼 산 일기장을 하루 이틀 꺼낸 뒤엔 ‘미루기’라는 습관이 스멀스멀 기어올라온다. 가장 오래되고 가장 내 인생에 밀접한 미루기 습관은 모든 습관보다 접근하기 쉽기에 모든 습관보다 우선에 있다. 가장 먼저 내게 도착해 있다.


미루기 습관에 굴복하는 순간, 새해 목표를 잃는다. 그리고 그 새해 목표는 다시 찾기가 힘들다. 새해부터 시작해야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목표보다도 새해 목표는 꾸준히 하기가 힘들다.



3. 나를 외면하고 싶은 순간을 이기기가 힘들다.


모든 습관은 일기를 쓰는 습관과 비슷하다. 그중에서도 가계부를 쓴다는 건 일기를 쓴다는 것과 비슷하다. 내가 행동하는 모든 순간에는 거의 무조건 돈이 오간다. 그렇기에 그 돈이 움직이는 순간순간을 기록한다는 건 다시 말해 내가 움직이는 모든 순간을 기록한다는 것과 같다. 너무 행복해서 무슨 방법을 쓰더라도 기록해 남기고 싶은 순간에서부터 나의 밑바닥까지 드러내 눈을 뜨면 사라질 꿈속에 묻어두고 싶은 끔찍한 순간까지.


지나치게 돈을 많이 쓴 날이 있다. 일주일에 10만 원만 쓰자면서 하루에 10만 원, 20만 원씩 써버린 날이 있다. 자제력이 부족했던 날 용서할 수가 없다.


너무 싫어하는 사람에게 시간과 돈을 써야만 하는 날이 있다. 아니면, 너무 사랑하는 사람에게 시간과 돈을 썼더니 좋지 않게 만남이 마무리되어 먹은 것을  토해내고 싶은 날이 있다. 그날의 기억을, 추억을, 기록을 삭제시켜 버리고 싶다.


매일매일이 행복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매일매일이 불행할 리도 없다. 사람의 인생이 늘 상한선을 치지도, 하한선을 치지도 않는다는 것. 사는 게 재밌는 건 해가 쨍쨍한 날과 비가 억수로 많이 내리는 날이, 너무 따뜻해 사랑스러운 날과 너무 춥고 더워 짜증만 나는 날이 공존하여 엎치락뒤치락하기 때문이라는 걸 잘 안다.


그러나 또한 인간의 삶이 재밌는 이유는, 자신이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기 때문에 지나온 날이 모두 아름다워지기 때문이다. 잊고 싶은 기억은 잊어도 되지 않을까? 기억하고 싶은 날만 기억해도 되지 않을까? 일기를 쓰기 싫은 날엔 일기를 쓰지 않아도, 일기를 쓰다 못해 영상으로 기록하고 싶어 지는 날엔 못하는 편집이라도 어찌어찌해서 그날을 보관하면 되지 않을까?




수많은 변명들이 나를   ,  침대 위에, 이불속에 가둔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안에, 침대 위에, 이불속에 있는가?


적어도 아직까지 방 안에, 책상 앞에 앉아서 가계부를 쓰고 있다. 메모만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정말 가계부를, 내가 설정한 카테고리별로 금액을 나눠 매주 통계를 내고 나의 소비패턴을 알아가는 중이다. 참 다행스러운 점은 적어도 지금 내게 가계부 매일 쓰기라는 습관이 미루기 습관보다 우선에 있다는 점이다.


시작은 어렵고 오래 걸렸지만 결국 반은 해냈다.

꾸준히 하는 것은 힘들어도, 매일매일 쓰는 것은 힘들어도, 늦어도 3일에 한 번씩은, 일요일 밤에는 쌓인 메모를 정리하는 시간을 갖고 있다.

나를 외면하고 싶은 순간에도 가계부를 써야만 하는 이유는, 내가 올해 가장 가치롭게 생각하는 목표인 ‘가난하게 사는 연습’을 하기 위해 꼭 필요하고 우선적으로 해내야 하는 습관이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다행히 나는 이 사실을 잊지 않고 미루기 습관을 미루고 있다. 얼마나 뿌듯한 일인가.


부디 이 습관이 작심한달을 넘어 작심일년이 되는 그날까지, 이 마음이 꾸준히 미루기 습관을 미뤄주기를.



ps. 그나저나 가계부를 적으면서 매번 충격의 충격을 금치 못하고 있다. 내 소비패턴, 왜 이렇게 엉망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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