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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내 INAE Mar 13. 2020

돈을 '모으려면' 자취를 하지 마라

<매일매일 가계부 쓰기> 1,2월 통계 Epilogue

자취를 하기까지의 아주 긴 서론


인간은 누구나 함께이길 원함과 동시에 혼자이길 원한다. 내가 태어나고 길러져 당연하게 보호받을 수 있는 가족들과의 집이 필요함과 동시에 혼자 있기에 발현되는 온전한 ‘나 자신’만을 위한 오로지 나만의 방을 필요로 한다. 지독한 히키코모리조차도 완전히 타인으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킬 수는 없다. 또한 반대로 대단한 오지랖을 부리는 사회쟁이에게도 구리구리한 민낯이 드러나는 비밀의 방을 만들기 마련이다.


나 혼자만 있을 수 있는 공간에 대한 욕구, 다른 누구의 간섭도 없이 혼자 힘으로 일어나야만 하는 자립에 대한 욕구. ‘자취’. 그래서 인간에겐 필시적으로 자취에 대한 로망이 가슴속에서 자라나 피어나는 순간이 어쩔 수 없이 오기 마련이다. 법적으로 혼자서는 아무것도 결정할 수도, 그래서 아무것도 책임질 수 없는 미성년자거나 이제 막 성인이 되어 다 컸다며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다니고 싶은 사회초년생 준비생일수록 자취로망, 자취욕구가 넘실거린다.


그래서 나도 자취를 했다. 아. 이렇게 말하면 너무 철없고 충동적으로 보이려나. 나름의 중요한 계기가 있다.


“나 독립할 거야!” 중학교 때부터 입버릇처럼 말해왔다. 벌써부터 엄마 품을 떠나고 싶어 안달났구나,라며 엄마는 서운하다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의 어깨에 짊어진 짐 중에서도 ‘나’라는 짐만은 빨리 내려놔드리고 싶었다. 물론 그 어린 나이에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기보다는 독립을 한 어엿한 나를 상상하기 바빴지만, 그래도 말이다. 자취로망은 있지만 자취욕구는 아직인 그런 상태.


그래서 당장의 독립은 못해도 사회적 독립, 그러니까 아무도 날 모르는 곳에 스스로를 뚝 떨어뜨려 무인도에서도 살아남는 사람이 되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동네중학교를 벗어나 버스로 1시간 가까이 가야 하는 고등학교로 진학했고, 3년 동안 쌓은 통학으로 이번에는 지하철로 1시간, 총 왕복 4시간의 대학교도 거리낌 없이 진학했다.


기나긴 통학에는 거리낌이 없었다. 2학년 1학기까지는 그랬다. 학보사를 다니면서 일주일에 2-3일은 아침 첫 차로 등교해 막차로 하교를 해도 여전히 자취로망은 있지만 자취욕구는 없었다. 그때까지는 내가 편집국장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말이다.


원래 같았으면 3학년부터 편집국장이 되는 것이 맞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생겨 전 편집국장님이 사퇴를 하게 되어 10월부터 당장 편집국장을 뽑아야 했다. 조금 이른 국장선거를 치렀고, 1표의 차이로 내가 됐다. 내가 맡은 부서의 단 한 지면만 신경 쓰면 됐던 부서부장은 하루아침에 전체 지면을 몽땅 관리해야 하는 편집국장이 됐다. 하루에도 몇 번씩 교수님과 조교님께 의견을 나눠야 하고 빠릿빠릿하게 기자들을 관리해야 하는 편집국장이 4시간 통학을 하면서 컨디션 관리도 못하는 건, 기자들이 자기 기사 쓰겠다며 시키지도 않은 밤을 새우고 있는데 막차 끊긴다고 일찍 편집국을 나오는 건 편집국장으로서 상당히 찔리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자취를 했다. 여태껏 내 안에 자리 잡은 자취로망을 밀어내고 필요에 의해 자취욕구로 인해 한 첫 자취였다.


2016년 10월, 급하고 서툴게 자취방을 잡아버렸다.



보증금 50만 원/월세 18만 원, 싼 집은 다 이유가 있다


물론 이보다 싼 집도 많을 테지만 내가 알아본 학교 근처, 아니, 편집국 근처의 집 중에선 그때 산 방이 가장 쌌다. 보통은 보증금 100만 원에 월세 20만 원부터 시작해 비싸면 3-500만 원에 3-40만 원까지가 기본적인 대학생 원룸 가격이다. 이렇게 세팅된 가격을 조금 더 나이 든 지금의 나는 알지만 지금보다 어린 그때의 나는 몰랐다.


그때의 나에게는 오로지 딱 2가지만 중요했다. 첫 번째는 수중에 지불할 수 있는 보증금은 50만 원이라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걸어서 3분이면 편집국이라는 것. 그래서 내겐 이 집이 곰팡이와 동거하는 반지하라는 것도, 세면대도 없이 변기 하나가 고작인 코딱지만 한 화장실도, 가끔 남의 양말이 내 세탁물에 함께 섞여 나오는 공동세탁기도, 힘들게 빨래한 세탁물마저도 말리려면 3층 발코니까지 가지고 올라가야 한다는 것도, 그게 싫어서 방 안에 그나마 겨우 있는 여유공간에 딱 맞는 싸구려 건조대를 놓고 숱하게 빠지는 건조대 다리를 다시 끼우길 반복해야 한다는 것도 내겐 중요하지 않았다.


편집국을 위해 잠을 잘 공간이 필요했다. 날 힘들게 하는 사람들 틈 속에서 잠깐이라도 빠져나와 온전한 휴식을 취할 공간이 필요했다. 게다가 어차피 가족들과 사는 집에서도 이보다 작은 방에서 살았는데 뭐가 얼마나 더 필요할까 싶기도 했다. 평소처럼 방에서 자고 일어나 방문을 나섰는데 가족들이 없다는 거? 솔직히 처음 집을 나와 사는 20대 초반에겐 대단히 설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가족들이 한 집에 없다는 뜻은 내가 언제 들어오든, 나가 놀다가 밤을 새우거나 친구들을 집에 초대해도 눈치 볼 필요가 없다는 뜻이니까.


첫 자취를 하고 나름 여유가 생겼다. 남들이 자는 시간에 일어나 채 뜨지도 못한 눈에 찬물을 끼얹으며 학교 갈 준비를 하지 않아도 됐다. 열차 속 허공에서 버리는 1시간을 온전히 충족하지 못한 잠으로 채울 수 있다는 게 너무 행복했다. 별로 배고프지도 않은데, 가뜩이나 열차 시간 때문에 나가야 하는데 굳이 밥을 먹고 가라는 엄마의 성화를 감내하지 않아도 됐고, 한창 놀 시간에도 막차 시간을 생각하다가 막차를 놓치고 걸려오는 엄마의 전화를 더 이상 무서워하지 않아도 됐다. 겨우 난 공강시간이면 단과대학 독서실에 가서 남들 공부하고 있는 틈 속에서 진동 알람을 맞춰놓고 잠을 자곤 했는데, 이젠 편안히 눈치 안 보고 내 방에서 잘 수 있게 됐으니 얼마나 마음이 놓이는가.


도망칠 곳이 생겼다는 것, 그것은 내게 내일이 오지 않기만을 바라던 매일매일의 아침이 더 이상 두렵지 않게 됐다는 5평짜리 위로였다.


그러나 인간의 심장은 피와 살과 욕심으로 이뤄져 있다. 소소한 행복에도 '적응'하기 시작하는 순간 인간은 그보다 더한 무언가를 상상하다 꿈꾸고는 바라게 된다. 6개월 즈음이 지났을까, 5평짜리 반지하가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여름방학을 맞이해 한 달 정도 부모님과 살기 위해 다시 경기도 집으로 향했기 때문이다. 새삼스레 평생을 산 낡은 아파트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생각해볼 수 있었다.


완벽한 주거공간의 조건은 대체 무엇일까? 모르긴 몰라도 적어도 반지하는 절대 '괜찮은' 주거공간조차 될 수 없다. 채광이라는 게, 통풍이라는 게 사람의 인생에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지 겪고 나서야 알았다.


눈부신 아침햇살에 저절로 눈이 띄며 시작되는 하루의 소중함은 실내등을 켜지 않으면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캄캄한 방 한 칸을 초라하게 만든다.


아무리 무더운 한여름 속에서도 창문 너머로 불어오는 바람이 한 줄기만으로도 신선하다는 것을, 에어컨은커녕 손바닥만 한 선풍기로 간신히 곰팡이만을 면하는 삶을 살고 나서야 그 신선함을 알 수 있다.


이 모든 것들을 몸소 겪으니 처음엔 견딜만했던 것들마저도 빨리 계약기간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게 내 등을 떠미는 요소들이 되었다. 세면대가 없는 화장실과 남의 빨래가 가끔 섞여 나오는 공동세탁기 등등 말이다. 슬슬 이것들을 견디고 싶지 않아졌다. 그래도 참았다. 어차피 신문사 임기가 끝나면 무조건 휴학을 할 생각이었고, 그럼 더 이상 이 망할 반지하방에서 살지 않아도 됐으니까.


참다가 문득 생각이 들었다. 이 부담 없이 싸기만 한 집에서 그나마 돈은 모을 수 있지 않을까?



일을 많이 하면 돈을 모을 줄 알았지,

몽땅 다 쓸 줄은 몰랐지


매호마다 나오는 취재비 10만 원씩과 매주 주말에 빠짐없이 나간 웨딩홀 주급 18만 원씩. 못해도 최소 80만 원은 벌었다. 남는 돈이 없었으니 그 돈을 모두 자취하는 학기 중의 생활비로 썼다는 말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자라다고 생각했다. 여름방학이 끝날 때 즈음 알바 사이트를 살펴보다 평일야간 편의점 아르바이트 구인광고를 보게 됐다.


미친 결심이 섰다. 취재비는 신문을 내는 한 계속 나올 것이고, 웨딩홀도 계속 나갈 테니 여기서 생활비를 쓰고, 편의점 아르바이트에서 번 돈을 안 쓰고 모아두면 휴학할 때 굉장한 목돈이 되겠구나! 당장 편의점에 전화를 걸었다. 2017년 8월,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이곳에서 월 100만 원씩 받아가며 일을 했다. 그렇다면, 계획대로 편의점에서 번 돈을 쓰지 않고 착실히 모아뒀다면 휴학을 할 때쯤 수중에 600만 원이 쥐어졌어야 한다. 만일 생활비가 부족해 편의점 급여에 손을 댔다 하더라도 성격상 50만 원 단위로 끊어서 사용했을 테니 못해도 300만 원은 남아있었어야 한다. 그러나 휴학을 할 때 내게 남은 돈은 50만 원이 전부였다. 그것도 자취방을 나오면서 받은 보증금 50만 원이었다.


최소 80만 원이던 생활비가 200만 원 가까이로 늘었다는 말이 된다. 왜 그랬을까? 그 이유는 스스로의 성격을 가장 잘 알기에 감히 짐작할 수 있다. 누구보다 바쁘게 살았던 만큼 스스로에게 관대해져 '게으름'을 포상으로 주었기 때문이고, 사람은 많이 가질수록 씀씀이도 커지기 때문이고, 특히 내가 완전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내가 자취를 한다는 건 도박중독자에게 돈을 쥐어주고 강원랜드를 데려간다는 의미와 다를 바 없었다.


학교 바로 옆에 자취방을 구함으로써 이미 게으름이란 영혼에게 나의 껍데기를 점령당해 있었다. 수업시간이나 신문사 출근시간 10분 전에 일어나 외출하는 건 기본이었고, 처음엔 잘 사용하며 자기 자신을 위한 밥을 해서 먹던 나는 슬슬 쌓이는 설거지거리가 귀찮아서 배달음식이나 오는 길에 가게에 들러 포장한 음식을 주로 애용했다.


그랬던 내가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아니, 편의점 알바도 시작했다. 이전엔 학교까지 걸어다니기라도 했지, 이후부터는 수업시간 시작 3분 전에 일어나 걸어서 10분 거리인 인문대학까지 택시를 타고 가기 시작했다. 탈 때마다 택시기사님들이 헛웃음 짓는 것을 봤는데, 아무렇지도 않았다. 게다가 편의점에서 일을 하니 끼니 걱정을 할 필요가 사라졌다. 자취방에선 전자레인지가 없어 조리된 음식이라도 먹었지, 이젠 일하는 시간에 아무 거나 꺼내서 뚝딱 먹으면 그만이었다. 야간근무라 손님도 별로 없겠다. 편의점이 곧 내 두 번째 자취방이라도 된 셈이었다.


매일매일 그런 사치를 아무 생각도, 관리도 없이 누렸으니 당연히 돈이 모일 리가 없었다. 위기의식을 느낀 건 마지막 월급이 들어오고 나서였다. 이제 다음 달부터는 평소 벌이의 반이 줄어들 것이었다. 100만 원이나 깎아야 하는 생활비가 덜컥 겁이 났다. 그리고 우려했던 대로 2018년의 나는 거지가 됐다. 그야말로 '알거지'. 다시 행복한 우리 집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그 행복한 우리 집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상태가 돼버렸다.


혼자 산다는 건 겪어보지 않으면 로망에 불과하다. 막상 혼자 떨어져서 살게 되는 순간 온전히 나 스스로를 내가 키워내야 한다. 나는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월세를 밀리거나 보증금을 떼먹히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결과적으로는 알거지가 됐지만 매달 돈이 들어올 때는 부족함 없이, 보다 넉넉하게 생활할 수 있을 정도는 됐으니 말이다. 하지만 만약 그것마저도 하지 않았다면 나는 절망했을 것이다. 평생 꿈꿔왔던 '독립'의 꿈을 꿀 자격조차 없는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무튼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무턱대고 시작한 반지하에서의 자취에게 호되게 당한 후 부모님이 차려주는 맛있는 밥과 부모님이 내주는 안정적인 집세, '집'에 대해선 그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부모님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자취욕구가 싹- 사라졌느냐? 무슨 소리.


2년의 휴학을 지내는 동안 딱 한 가지 목표만 가져왔다. 자취하자.


복학하면 무조건 좋은 집, 넓은 집, 개별세탁기와 개별에어컨이 있는 풀옵션에 채광이 좋은 지상층 집에서 살자.

지난 자취 때처럼 버는 족족 써버리는 생각 없이 사치스러운 삶은 살지 말자.


그리고 지금, 새로운 자취방에 입주한 지 20일째가 되고 있다. 물론 지난 자취 때와는 여러 면이 다르긴 하다. 먼저 신문사를 퇴임했고, 이제 더 이상 웨딩홀을 나가지 않는다는 점. 이제부터는 아르바이트 하나만 다닐 예정이어서 꽤나 아끼고 아껴가며 자산을 관리할 것이고, 가계부를 쓰는 습관을 들이고 있는 덕분에 돈을 함부로 쓰지 못한다(함부로 쓸 생각도 없다)는 점.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도 보증금 150만 원/월세 31만 원(심지어 관리비 별도)의 집이라 나름의 자산관리가 필수가 됐다는 점 등등. 이번 자취방에 굉장한 애정이 생겨버렸다는 점이 제일 다르긴 하겠다.


3월의 가계부가 몹시도 기대된다. 자취를 하며 돈을 관리할 나 자신의 모습이 그려져 벌써부터 뿌듯해지려고 한다. 그리고 그전에 자취방을 구하고 내가 사는 집으로 만들기 위해 사용한 돈이 어마무시해서 통계를 내기가 무서워지기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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