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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내 INAE Feb 17. 2021

엄마와 아빠가 끝까지 지키고 싶었던 자존심

나의 가난의 뿌리를 찾아서 - #4

지금은 좀 덜한 것 같지만 현역으로 군대를 다녀온 사람들이 다녀오지 않거나 현역 복무를 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군대 경험을 과시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같은 군인이더라도 육군이냐, 해병대냐, 공군이냐 등등에 따라서도 자신이 소속했던 집단을 향한 자부심의 크기도 달라지곤 한다. 그만큼 나라를 지키는데 일조한 경험은 아무나 겪을 수 있고 선뜻 겪겠다 나설 수 있는 경험이 아니라는데서 오는 자부심이 남다른 것이라고 감히 생각한다.


앞서 말했듯 아빠는 특전사 출신이시다. 지금도 TV만 틀면 국방TV 채널을 먼저 틀어 보신다. 아빠는 지금도 외출을 하실 때 군복을 입으신다. 아빠는 국방의 의무를 다 하기 위해 마지 못해 군대를 다녀오신 게 아니었다. 아빠에게 군대란 자랑스러운 소속이었고, 군복이란 부끄럽지도 우습지도 않은 생활복이자 유니폼이었다. 아빠는 여전히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일과를 해내시고, 가족들 중에서도 가장 정리정돈에 열정적인 분이시다.


깔끔하고 규칙적인 생활방식은 아빠의 천성이기도 했다. 오죽하면 회사일을 할 때도 공장 단지를 매일 아침 청소하셨는데, 그 때문에 당시 회사 동료들이 '너무 청소를 열심히 해서 있는 복도 다 달아나겠다'고 뒷말을 했다더라. 청소에 진심인 모습을 유별나게 바라보던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아빠도 알고 계셨으리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빠는 자신의 원칙을, 생활방식을, 성격을 버리지 않으셨다. 아빠 때문에 회사가 망했다는 말을 들어도 마찬가지였다. 아빠는 회사를 사랑하셨다. 사랑하는 만큼 아빠만의 방식으로 아낀 것이었다.


아빠에겐 당신의 젊었던 시절이, 당신의 청결한 성격이, 당신의 삶이 자부심이었고, 자존심이었다.


어쩌면 그래서 회사가 사라졌을 때 선뜻 이불 밖을 나올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가세가 기울어졌다는 슬픔과 당신의 회사가 망했다는 부끄러움과 그 모든 것이 당신 때문은 아닐까 하는 죄책감, 그리고 지금까지 삶에 대한 자존심의 추락이 더불었을 것이다.


솔직히 그렇다. 자랑스러운 특전사 뱃지를 내려놓고, 크던 작던 한 회사의 이사로서 명함을 날리던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한순간에 초라한 백수가 되어 취하지 않고선 살 수 없는 몸이 되었다. 누가 그의 심정을 감히 헤아릴 수 있을까. 그의 불행보다 더 한 불행을 겪는 사람도 많은데 웬 유난이냐고 말해선 안 된다. 그것은 단순히 불행의 크기와 사태의 경중을 따지는 문제가 아니다.


자부심을 느꼈던 삶으로부터 외면 당한 심정은 당사자가 아니고선 절대 나의 기준으로 헤아릴 수 없다. 그래서도 안 되고.


그러니 아빠의 자부심으로 비롯된 강한 자존심을 알기 때문에 아빠가 침대에서 벗어나 고물상을 다니기 시작했다는 말을 들었을 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직종이었다. 고물상만큼 빚 많은 고령의 신용불량자가 다닐 수 있는 직종이 아닐까. 아무나 선뜻 나서서 하는 일은 아니지만 누군가는 꼭 해야만 하는 일이기에 그 누구의 나이, 학력, 집안사정 등을 고려하거나 궁금해 하지 않을 수 있는 일.


누구나 선뜻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고되고 어지럽기만 한 작업환경이 그려진다. 조금 더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말이 고물상이지 쓰레기상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폐지 줍는 노인분들이 찾아가는 곳. 동네에 온갖 고물들이 모여 처리를 기다리는 가전제품의 저승과도 같은 곳. 이러한 이미지가 선입견인지 사실인지 여전히 알지 못하는 곳. 아빠는 그곳에서 새 삶을 찾으셨다.


중요한 점은 고물상이 아빠에게 새로운 소속을 주었다는 것이다. 사실 돈을 벌자면 할 수 있는 일은 많다. 대표적인 남성들의 고수익 일용직이라고 할 수 있는 공사판 막노동이 있지 않은가. 물론 세상엔 더 많은 고되고 위험한, 그래서 돈이 되는 일들이 있다. 하지만 아빠에게 필요한 건 당장 가족들을 먹여 살릴 돈이 아니었다.


당시 아빠에겐 아빠 자신을 살릴 소속감이 필요했다. 자랑스러웠던 일터도, 당신을 자랑스러워 했던 가정도 그를 떠나거나 외면한 상황에서, 당장 잠에서 깨어나면 할 수 있는 일이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다시 자는 매일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직업이란 그런 것이다. 반복되어 지루한 일상의 연속이라 할 지라도 우리는 그 연속성 안을 돌며 살아가고 살아낸다. 오늘의 끝이 비록 비루할지라도 내일은 오니까. 그리고 나를 불러주고 사용해주는 오늘의 시작이 계속해서 나를 살게 하고, 내일을 기대하게 만들면서 또 살게 하니까. 그래서 직업엔 귀천이 없다. 모든 직업은 종사자를 살게 하기 때문에.


그리하여 아빠는 고물상에 출근하게 되었다. 아빠의 일터를 가본 적은 없지만 며칠 고물상에서 퇴근하고 돌아온 아빠의 얼굴에 점점 생기가 도는 모습은 썩 괜찮았다. 첫 월급이 들어왔을 땐 엄마도 안도의 미소를 지어 보이신 걸 기억하고, 재미 삼아 고물상 명함을 만든 아빠의 얼굴에 다시금 자랑스러운 감각이 드리웠을 때를 기억한다.


우스갯소리지만, 아빠가 새 삶을 살게 된 그곳을 (지금은 아니지만 당시의) 엄마는 그리 달가워 하진 않으셨던 것 같다. 학교에서 가족 정보를 기입하라며 종이를 나눠줬을 때, 아빠의 직업란에 뭐라고 기입해야 하는지 당시의 나는 몰랐다. 나에게 고물상이란 직장 이름이었지 직업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엄마한테 여쭤보니 엄마는 잠시 고민하시다 '그냥 회사원이라고 적어'라고 하시는 거다. 그땐 '아, 고물상도 회사일 텐데 그럼 회사원이 맞지' 싶어서 엄마 말대로 회사원이라고 적었다가 그 다음 해부턴 왠지 계속 이러면 아빠의 직업을 무시하는 게 아닐까 싶어 '고물상'이라고 적어내곤 했다.


생각해보니 엄마가 아빠의 직업이 부끄러운가도 싶었다. 반절은 맞을지도 모르겠다. 괜히 딸의 담임선생께 지나치게 디테일한 정보를 알려줄 필요가 없겠다고 생각하셨을지도 모른다. 다만 확실한 건 엄마는 아빠가 부끄럽다기보단 엄마 스스로의 삶에 자존심이 상했다는 것이다.


아빠의 경우처럼 확실하게 자부심을 느낄 만한 소속이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엄마는 자존심이 높은 사람이다. 엄마가 살아온 삶에 후회를 할 땐 하더라도 항상 더 나은 미래를 향해 가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다. 아빠와 결혼한 것도, 결혼한 뒤에 아이 둘을 낳아 육아에 힘쓰고, 와중에 직장을 다니면서도 가사에 소홀하지도 않았다. 가난하고 싶지 않은 마음은 크지만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기보다는 그저 어제보다 나은 오늘과 오늘보다 행복할 내일을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엄마의 자존심이었다.


엄마의 바람과는 달리 결국 가세가 기울었을 때, 내 기억에 엄마는 결코 한시도 쉬지 않으셨다. 카드를 돌려막는 한이 있더라도 가족들 밥을 굶기지는 않으셨고, 사는 집만큼은 나라에 대출금이라는 명목으로 월세를 내는 한이 있더라도 남의 집에 세 들어 살지는 않기 위해 노력하셨다. 아빠가 돈을 벌어오지 못하시거나 곧 돈을 벌어와도 생활비가 부족하자 엄마는 휴일을 반납하고 식당으로 향하셨다.


최저시급이 5천 원도 안 할 때였다. 주휴수당이 뭔지도 몰랐던 시절이었다. 엄마는 평일에 직장을 다니시면서 주말이면 새벽부터 인근 식당으로 출근해 돈까스 소스를 만들고 서빙을 하시는 등 아르바이트를 하셨다. 그 전에도 콘센트에 부품을 끼우는 부업을 종종 하셨지만 주말을 팔아가며 일하신 건 그때가 시작이었다. 엄마는 그때부터 작년까지 주말 내내 일하시며 생활비를 마련하셨다.


참 많이 바쁘셨으면서도 절대 오빠와 내 밥은 굶기지 않으셨다. 참 많이 고단하셨으면서도 아빠와 엄마는 오빠와 내 용돈 한 번 밀려서 주신 적이 없었다. 우리 남매가 사춘기로 부모님 속을 문들어지도록 썩였을 때도 가정을 포기하지 않고 함께 성장해주셨다. 고물상에서 다리를 다치고 얼굴에 큰 화상을 입었을 때도 아빠는 철심 박힌 다리와 과일망처럼 생긴 붕대를 칭칭 감은 얼굴로 출근하셨고, 매일 서있고 돌아다니고 몸을 쓰며 일하느라 하지정맥류를 앓고 아직도 온몸이 쑤시는 고질병을 앓게 되었을 때도 엄마는 일에도 가정에도 소홀하지 않으셨다.


자식들이 어느덧 모두 성인이 되었다. 오빠는 원하는 대학에 가고 싶어 입시를 이어갔고, 나는 대학에 입학했다. 내가 최종적으로 한 대학에 입학을 확정 받자 엄마가 나를 앉혀놓으셨다.


당시 나는 가정형편을 비롯한 여러 가지를 고려하여 이름 있는 사립대학을 포기하고 지방의 국립대학을 선택했다. 앞선 사립대학의 인문대 등록금 평균이 600만 원이고 선택한 국립대학의 인문대 등록금 평균이 170만 원인 것을 비교했을 때, 게다가 애초에 미성년자일 때부터 쭉 스무살이 되면 용돈 받지 말고 알바부터 시작해야지 생각했기 때문에 난 나의 선택에 상당히 만족하고 있었던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내가 가정형편 상 등록금 때문에 원하는 대학도 마음대로 선택하지 못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많이 안 좋으셨는지 내게 말씀하셨다.


"집안이 가난해서 앞으로 용돈도 제대로 못 줄 거고, 등록금도 아마 다는 못 내줄 거야. 엄마는 많이 미안하게 생각해. 그래서 입학 선물로 주는 거야. 풍족한 만큼은 아니지만 대학생활에 보탬이 됐으면 해."


엄마는 곧바로 내 통장에 정확히 600만 원을 송금하셨다. 자기는 왜 안 주냐며 눈에 불을 켜는 오빠도 대학에 입학하면 똑같이 줄 거라며 600만 원을 보여주셨다.


나는 놀랐다. 다른 것도 아니고 부모님이 그 와중에, 바쁘고 아픈 와중에 1200만 원을 모으셨다는 게 너무도 놀랄 노자였다. 누군가에게는 별 거 아니고 금방 모으는 액수일 수도 있겠으나, 당시의 부모님의 삶과 급여와 생활비를 생각했을 땐 엄청 큰 액수이지 않는가. 다시 말하지만 최저시급이 지금의 절반도 안 되던 시절에 말이다.


그리고 그 무렵, 회사의 부도로 큰 아빠가 미국으로 가시고, 여러모로 피해를 입고 빚을 지게 된 가족들을 위해 시골에 있던 집터를 팔게 된 친할머니가 형제들에게 땅을 나눠주셨다. 당시엔 길도 없는 맹지라는 게 흠이었지만 어찌됐든 땅을 주시겠다고 하셨고, 엄마는 그 땅을 어떻게든 사람 사는 곳으로 만들어 도시에서 살 수 없는 숫기 없는 시골 태생 남편에게 조그만 초가집이라도 지어주겠다는 일념 하에 받으셨다나.


아마 엄마는 몰랐을 것이다. 그때 받은 땅이 지금 우리 가족을 이만큼 살려놓을 것이란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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