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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내 INAE Feb 15. 2021

도시남자인 줄 알았던 시골남자의 도시적응실패기

나의 가난의 뿌리를 찾아서 - #3

아빠와 처음 만난 엄마는 아빠를 도시남자인 줄 아셨을 것이다. 제대로 각 잡힌 정장을 빼입고, 5만 원권 지폐는커녕 지금의 신권 지폐조차 먼 미래의 일이었던 구권 지폐 중에서도 가장 비싼 1만 원권 지폐를 현금 뭉치로 지갑에 넣어 다니던 당당하고 멋있는 도시남자. 하지만 그 남자는 사실 겨우 포장된 1차선 도로가 꼬불꼬불 이어지다 마을 중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시골 중의 시골구석에서 태어난 시골남자였다.


그런 순박한 시골남자가 도시로 올라와 군인, 특히 특전사에 복무하셨다. 대단한 직업적 꿈을 가지거나 엄청난 야망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래서 대한민국 남자라면 누구나 가야 하는 군인이 되었다가 뚜렷한 위계질서와 정해진 생활패턴 속에서 직업적 안정감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가족 모두가 인정하는 것이, 아빠는 군인이나 공무원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창조적이거나 모험적인 일보다는 정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삶의 질을 국가로부터 보장받는 나랏일하는 삶 말이다.


다시 말해, 아빠는 여느 창업의 단꿈을 꾸는 부류에 속하지 않는다. 그런 아빠의 삶이 바뀌었다. 특전사로 복무 중 큰아빠, 그러니까 아빠의 형님이 면회를 왔다고 한다. 아빠의 전역일을 얼마 남기지 않았을 때였다. 큰아빠는 그 자리에서 아빠에게 사업을 하자면서 전역 후 퇴직금이 나오면 투자해주기를 요청했다. 즉, 가족사업으로써 함께 일해 달라는 말.


순박한 시골남자였던 우리 군인 아저씨는 유난히 가족에게 약했다. 특히 장남이 잘 되어야 집안이 잘 된다는 믿음으로 똘똘 뭉친 그 시대 가족의 둘째 아들이었다. 자기 형님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 당시 군인의 퇴직금은 서울에 아파트 한 채를 살 수 있을 정도로 꽤 두둑했는데, 그 퇴직금으로 회사를 차렸다. 큰아빠는 사장이 됐고, 아빠는 이사가 됐다.


자수성가한 도시남자의 모습으로 엄마와 만났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사업은 크진 않았어도 꽤나 번성해서 수도권에 신축 아파트 한 채 분양받고, 서울에 있는 아파트 한 채에는 세를 두었다. 가장으로서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에 넘치면 넘쳤지 전혀 부족함 없었다.


그때 엄마는 아빠에게 회사를 그만뒀으면 좋겠다고 말하셨다. 이유인즉슨, 아빠의 자식과 큰아빠의 자식의 나이 차이가 꽤 컸기 때문이었다. 아빠는 결혼을 마흔 가까이에 하셔서 바로 아이를 낳았어도 오빠와 나는 초졸이었지만, 큰아빠에게는 장성하고 학력도 좋은 아들이 둘이나 있었다. 어차피 큰아빠가 사장으로 있는 회사를 누군가에게 넘긴다면 그건 동생인 아빠가 아니라 자기 아들들 중 한 명일 게 뻔하다는 것이었다.


아빠는 그 말에도 개의치 않으셨던 건지, 아니면 당신의 형을 여러모로 믿었던 것인지 회사를 떠나지 않으셨다. 사실 회사가 누구의 손에 넘어가느니 마니 하는 문제는 중요하지 않았다. 부도가 날 마당에 그딴 것들이 다 무슨 소용일까. 사업을 하면 당연히 따라야 하는 지겨운 수순처럼 얼마 뒤 부도가 났고, 회사를 살리고자 여러 방면으로 수를 쓰던 도중 아빠가 보증을 섰다.


평생 벌어도 만져보지 못할 것 같은 액수가 마이너스로 아빠 앞에 섰다. 그때 나는 초등학교 졸업을 목전에 둔 상태였다. 태어나고 1-2살 때 이사 와 동네에서 제일 좋은 32평짜리 아파트에서 살던 나는 내가 그 집을 떠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아, 우리 가족이 헤어질 수도 있겠구나'란 싸한 느낌이 들었다. 사소한 걸로도 살벌할 정도로 싸우시던 아빠와 엄마가 더 이상 싸우지 않게 될 때부터였다.


불안한 마음은 현실로 이어졌다. 어느 날 하교 후 엄마와 소파에 나란히 앉게 됐다. 그 자리가 마련되기까지 엄마는 갑자기 떠안게 된 빚더미에 대처하기 위해 서울에 세를 내었던 집을 팔았고, 그 돈으로도 기울어지는 가세를 멈출 수가 없어서 말로만 들었던 카드 돌려막기를 하시는 등 있는 재산 없는 재산을 정리하며 살 길을 유지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난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한순간 바닥으로 내려앉은 당신의 처지를 감당할 수 없으셨던 건지, 그렇게도 피하고 싶었던 가난이 다시 찾아온 운명이 지긋지긋했던 건지, 나란히 앉힌 어린 딸의 눈을 바라보며 엄마가 물으셨다.


"엄마랑 아빠랑 위장이혼을 하면 어떨 것 같아?"


초등학생이란 사뭇 어린 나이면서도 야속하게도 알 건 다 아는 나이다. 위장이혼이란 어른들 마음 편하자고 지어낸 말장난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혹시라도 엄마와 아빠가 헤어지게 된다면 슬프겠지만 어떻게 해서든 우리 가족이 편안해질 수 있다면 그걸로 됐다는 것이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그래서 나는 엄마한테 그렇게 대답했던 것 같다.


"그게 엄마랑 아빠의 결정이라면 나는 상관없어."


그때 내 대답을 듣고 엄마가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는 감히 짐작할 수 없지만, 그 날, 엄마의 그 질문을 기점으로 우리 가족은 큰 전환점을 맞이했다.


가장 큰 변화는 사는 곳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그 바쁜 와중에도 엄마는 집만큼은 대출 이자를 비싸게 갚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남의 집에 세 들어 살 수 없겠다는 생각에 아파트를 자가로 마련하셨다. 하지만 그만큼 없는 형편에 마련한 아파트다보니 부족함이 많았다. 동네에서 가장 낡은 아파트인 데다 그마저도 건설할 당시 건설하던 회사가 부도가 나 짓다 만 흔적이 곳곳에서 보였으며, 원래 살던 집보다 절반 정도 작았다. 꾸역꾸역 소파와 침대는 들여왔어도 식탁과 피아노 같은 큰 가구들을 버려야 했고, 안방에 있던 11자 장롱을 잘라 8자로 만들어야 했다.


사는 곳이 달라지니 생활패턴도 달라졌다. 집이 좁아 가족들끼리 부딪치는 일이 많아졌는데, 그만큼 서로 더 예민해져 사소한 일로 시비 걸고 싸우는 게 잦아졌고, 부딪치고 싶지 않아지자 서로의 방에서 나오지 않게 됐다. 그나마도 가족들이 모이던 식사시간도 식탁이 없어지고 각자 자기 방에서 식사를 해결하게 됐다. 가족들이 한 공간에서 오순도순 있을 수 있는 시간이 공간과 함께 사라졌다.


그래도 '우리'는 살았다. 나와 오빠는 학교로, 엄마는 직장으로 향해 살았다. 집에는 아빠 혼자만 남았다. 아빠는 그 '우리'에 끼어들지 못했다. 한순간에 직장을 잃고, 가족을 잃을 뻔하고, 모든 부담을 짊어지게 된 아빠는 어디로도 도망갈 곳이 없었다. 순박한 이 시골남자는 사실 자신의 고향을 떠나 도시인이 되는 동안 그 누구와도 친구가 되지 못했다. 바빠서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아빠라는 사람 자체가 그리 사교적이지 못한 사람이었다. 도시에선 그 누구와도 친구가 되지 못했고, 집과 회사만 오가며 사회생활을 이어갔던 것이다.


그런데 회사가 사라졌다. 그러자 회사 동료들이 사라졌다. 남은 건 집뿐이었는데 집이 좁아지자 가족들이 멀어졌다.


그 무렵부터 아빠는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잠을 잘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원래도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지만 술에 의존하지는 않았었다. 가족들과 함께 살았어도 혼자였던 아빠는 함께 술잔을 기울일 친구도, 술보다 먼저 찾을 그럴듯한 취미도 없었다. 당장 할 수 있는 게 술을 마시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술에 취하고 나서야 잠이 들면 맨정신에서는 절대 그 누구에게도 쓰지 않았던 욕설을 코골이와 함께 내뱉는다. 당신의 꿈에선 어떤 광경이 보이고 들렸던 걸까.


도망칠 곳은 침대와 꿈속뿐이었던 이 남자는 도시 적응에 실패했다. 이 남자와 함께 가난을 벗어보려던 여자는 이 남자의 빚으로 다시 가난을 맞이했다. 엄마는 가족을 포기하기 직전이었고, 아빠는 삶을 포기하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가난의 괴롭힘에 울지 않았고, 아빠는 지독한 외로움과 우울감으로 가득 찬 이부자리에서 일어났다. 순전히 살기 위해서였다. 더없이 가난해져도 삶은 살아야 했고, 부양해야 하는 가족이 있었으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대로 죽고 싶지 않았다. 있는 빚을 극복할 수는 없었다. 그는 애초에 포기했다. 지금 있는 아파트 대출 이자라도 꼬박꼬박 갚는 수밖에 없었고, 자라나며 비싸지는 아이들의 학비를 줄일 수도 없었다. 아무리 아껴도 아껴도 생활비는 언제나 부족했다.


그래서 엄마는 평일엔 직장을 다니고 주말엔 식당에서 알바를 하셨다. 그리고 아빠는 고물상에 들어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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