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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내 INAE Oct 12. 2023

무신론자가 펫로스로 미치는 과정

<안녕, 우리 똥강아지>

나는 무신론자다. 종교를 거부하지도, 혐오하지도 않고, 오히려 종교적인 지식과 역사를 공부하는 걸 즐기는 편이다. 그런데도 내가 무신론자인 이유는 단순하다. 사후세계, 영혼, 귀신같은 것 자체에 관심도 없고 믿지도 않기 때문이다.


남들처럼 어릴 때의 기억은 거의 없지만, 다섯 살 때의 기억 중 유일하게 생생한 순간이 있다. 여느 때와 같이 친할아버지 집으로 놀러 가 안방에 누워 쉬고 있을 때였다. 아무런 뜬금없이 ‘죽음’을 떠올렸고, 그 순간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듯 걷잡을 수 없는 상념에 빠져들었다.


죽음을 생각하는 순간 눈앞이 컴컴해졌고, 한 줄기 빛도 찾을 수 없는 어둠 속에서 내 존재감은 점점 작아졌다. 작아지다 못해 점이 되고, 머지않아 사라졌다. 눈을 뜨고 있는데 아무것도 볼 수 없었고, 숨을 쉬고 있는데 숨이 막혔다. 다시는 어떤 것도 만질 수 없고 아무도 나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영원히 길을 잃을 것이다. 사라질 것이다.


다섯 살의 나는 밥 먹으라는 엄마의 말씀에 어둠을 뚫고 안방을 나설 수 있었다. 거기에, 친할아버지 집에 가면 옆집에 살던 누렁이가 웃으면서 내게 항상 달려와줬다. 죽음인지 뭔지 알 게 뭔가. 밥 먹고 누렁이 보러 갈 생각에 신나기만 했을 다섯 살의 나는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 여전한 자신의 무신론 덕분에 거의 미치기 일보 직전이다.





1단계. 믿지도 않는 신을 필요할 때만 찾으니 이렇게 벌을 받지


이 세상에 신이나 사후세계가 존재함을 실감하지 않을 뿐이지, 무엇이든 간절한 상황에서는 곧잘 무릎을 꿇고 신을 찾곤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나도 결국엔 사람인지라 간절하게 기도했더니 잘 된 경우엔 기도에 응한 누군가에게 감사하고 싶고, 간절하게 기도했지만 잘 안 된 경우엔 기도에 응하지 않은 누군가를 원망하고 싶었다.


곰탱이가 2022년 11월 겨울밤에 응급실에 다녀와 곧 죽을 거란 진단만 받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차마 곰탱이의 끝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던 나는 집 밖에 마련된 내 컨테이너에 들어갔다. 거기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으고 빌었다.


“저를 지켜보고 있는 누군가가 계시다면, 그게 전지전능한 신이라면 제발 우리 곰탱이 좀 살려주세요. 다시는 신을 믿지 않는다며 시건방 떨지 않고, 다시는 감히 신께 제 어떤 것도 잘 되게 해달라고 빌지 않겠습니다. 다시는 도움을 청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진짜 딱 한 번만, 이번 한 번만 부탁드릴게요, 우리 곰탱이 5년은 더 살 수 있단 말이에요.“


기도가 통해서였을까, 곧 죽을 거라던 곰탱이는 그로부터 6개월을 더 살았다. 그것도 잘 돌아다니고, 똥도 잘 싸고, 잘 먹고.


하지만 기도가 너무 잘 통했던 걸까. 곰탱이가 떠나는 날도, 축 늘어진 곰탱이를 안고 빌었다. 제발 부탁이니 이번만, 딱 이번만 더 도와달라고. 정말 마지막으로 부탁할 테니, 곰탱이 좀 살려달라고. 적어도 이렇게 갑자기, 이렇게 아프게 떠나선 안 되는 아이이지 않겠냐고.


이번 기도는 닿지 않았다. 벌 받은 거다. 신은 없다며 잘난 척은 다 하더니 필요할 때만 신을 찾은 죄로 나는 곰탱이를 잃은 것이다. 11월에 한 번 들어줬으면 됐지 않았냐면서.


그러니 곰탱이가 죽은 건, 나 때문이다. 내가 신의 분노를 사서 우리 똥강아지를 데려간 거다.


아니, 잠깐.


저기, 저거… 곰탱이 같은데?





2단계. 엄마, 곰탱이가 파리로 다시 태어났어


신에게 미운털이 제대로 박혀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죄송스럽기만 했던 내 손에 파리 한 마리가 날아와 앉았다. 원래도 벌레를 죽이지도, 관심을 갖지도 않았던 나였기에 간단하게 손을 털어 파리를 날려 보내려고 했다.


휙-. 손을 털자 파리가 날아갔다. 그리고 다시 앉았다.


몇 번을 더 그렇게 했는데도, 파리는 내 손에 앉았다. 그때 내가 그 손으로 뭘 먹었는지, 뭘 먹은 입을 그 손으로 닦은 건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때 내게 중요했던 건, 직감이었고,


“곰탱이?”


내 말에 파리가 다시 휭 날아 원을 그리곤 다시 손에 앉았다는 것이다.


곰탱이가 파리로 다시 태어났다. 미친.


파리가 날아갈까 봐 어정쩡한 자세로 굳었다. 나는 30분을 그 상태로 가만히 있었고, 파리는 이따금 내 손등을 돌아다닐 뿐, 파리도 내 손등을 떠나지 않았다.


옛날부터, 사랑하는 연인을 남겨둔 채 죽은 사람이 온갖 벌레들로 여러 번 다시 태어나 연인의 곁을 맴돌며 굶어 죽거나 잡아 먹히거나 연인의 손에 죽임을 당하는 식의 소설 소재를 상상한 적이 있었다. 나의 상상은 현실이 됐다. 파리로 다시 태어난 곰탱이가 내게 온 것이다.


파리곰탱이는 내가 공부를 하고 있을 때면 모니터 모서리에 앉았고, 밖에 나갔다 들어오면 내 자리 언저리에서 휘휘 날며 춤을 추고 있다가 ‘곰탱이?’하고 내가 부르면 뚝 멈췄다. 그리고 내가 침대에 누우면 내가 덮은 이불 위, 내 종아리 부근에 딱 앉았다. 곰탱이가 살아있을 때, 늘상 내 종아리에 몸을 딱 붙이고 잤던 것처럼.


그때 파리의 수명이 20일 남짓이란 사실을 알았다. 이제 나는 내 방에 파리가 있으면 문득 ‘곰탱이야?‘하고 물어본다.


내 방에 파리곰탱이가 있다는 말에 그저 웃기만 하셨던 엄마가 어느 날 말씀하셨다.


“곰탱이가 다시 태어났는데, 그게 파리면… 조금 슬프다.”





3단계. 곰탱이는 그냥 이 세상에서 사라진 거라고 어떻게 인정해


햇살이 좋고 바람이 선선하면 곰탱이를 묻어준 자리 옆에 앉아본다. 곰탱이를 보낸 지 얼마 안 됐을 때는 마냥 울부짖으면서 보고 싶다고만 소리쳤는데, 일련의 과정을 겪으면서 신이 아무리 날 미워해도 이런 나를 지켜보기 불쌍하니 파리로라도 곰탱이를 내게 보내주셨나 보다고 생각했다.


곰탱이 자리에 심어준 데이지꽃 씨앗에서 좁쌀만 한 풀이 자랐던 날, 곰탱이 털을 쓰다듬듯 그 풀을 쓰다듬었을 때였다.


지금 컨테이너에서 춤추고 있는 파리가 정말 곰탱이라고 생각해? 아니.

곰탱이가 그럼 어딘가에서 이미 다시 태어났다고 생각해? 아마도.

그게 과연 지구에서일까?


신을 믿지 않지만 외계생명체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 이 무신론자는, 또 한 번 자신이 무신론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상념에 빠지기 시작했다.


곰탱이가 죽은 자리 바로 근처에서 어떤 생명체로든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과연 곰탱이가 다시 태어난다면 이 동네에, 이 한국에, 이 지구에서 다시 태어나겠는가? 우주는 무한해서 지구가 아닌 다른 행성에, 다른 은하계에, 다른 차원에도 생명이 살 가능성이 있을 텐데, 곰탱이가 다른 행성에, 다른 은하계에, 다른 차원에서 태어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우리 모두가 이 땅에 태어나 이 모습으로 이렇게 만난 게 전부 운이 좋아서였다면?


불길한 생각의 전개가 끝없이 가지치기를 하다가 과부하가 생겨 머릿속이 터져버렸다. 굉장한 폭발음과 자욱한 연기, 그 가운데 아주 작은 불씨가 남아있는데, 불씨는 이렇게 말했다. ‘죽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 그것만큼은 부정할 수도 반박할 수도 없었다.


인정해야 해. 이제 다시는 곰탱이를 만날 수 없어. 곰탱이는 이 세상에 없어. 적어도 이 세상에서 다시 만날 가능성이 아주 많이 희박해.


근데 어떻게 인정해? 이렇게 보고 싶은데.







겨우 괜찮아졌던 마음이 다시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나의 이런 생각을 들은 친구는 그렇게 생각을 안 하면 되지 않냐고 별 거 아니라는 식으로 말했다.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말이었다.


내 상념이 진짜인지 가짜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다. 내 상념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는 그리 간단한 문제이고, 별 것도 아니고, 쓸데없는 생각일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쓸데없는 생각이 내 세계에서만큼은 아주 중요하다는 게 중요하다.


내 인생은 막연하게 두렵기만 한 죽음에 잡아먹히지 않기 위한 노력이 삶이라는 형태로 진행 중이다. 존재하기에 사랑하고, 존재하기에 사랑받던 생명이 존재하지 않아 사랑할 수 없고, 더 이상 사랑받을 수 없다는 아이디어가 날 살게 했고, 또 사랑하게 했다.


내가 사랑하는 어떤 존재라도, 나는 그를 사랑하기 위해 존재하고, 그에게 사랑받기 위해 존재하고자,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니 나를 살게 한 우리 똥강아지의 죽음이 내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들고 있는 건 결코 유난이 아니다. 사랑하던 너를 사랑할 수 없다는 것, 사랑받던 너에게 사랑받을 수 없다는 것보다 슬픈 건 지금의 내겐 적어도 없다.


그래도 지금 내가 사랑하던 너를 잊지 않고 사랑하기 위해서만이라도 노력하려고.


그래서 귀신의 존재를 믿기로 했다.


참, 이상하지. 죽은 뒤에 어떤 세상이 있다거나 죽은 다음에 다시 태어난다는 발상이 날 미치게 했는데, 죽은 영혼이 아직 곁에 떠돈다는 발상으로 조금 기분이 나아졌다는 게.


그렇게 생각하면, 곰탱이는 꽤 때깔 좋게 떠났다. 다닐 데 다 가볼 만큼 다리가 건강했고, 맛있는 것도 다 먹고 갔으니, 세상에서 가장 때깔 좋은 귀신이 됐을 것이다. 귀신이 돼서 여전히 우리 옆에 몸을 딱 붙여서 자고 있으리라.


여전히 우리 옆에서 우리를 사랑해주고 있으리라.


외롭지 않으리라.


2022년 9월 3일. 물에 닿는 걸 극도로 싫어해서 비가 온 날엔 산책은 안 가고 현관 앞에서 저러고 쳐다봤다. 근데 아침에 잎사귀에 맺힌 이슬을 먹는 건 좋아했다.

사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름의 위로를 받았다는 것도 미안해. 그건 결국 널 또 혼자 두게 했다는 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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