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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내 INAE Oct 11. 2023

노견의 죽음이 급사 같은 건, 이별을 준비 못한 탓

<안녕, 우리 똥강아지>

난 어릴 적부터 벌레를 잡지 못했다. 더 정확하게는 벌레‘조차’ 죽이지 못했다. 벌레가 자신을 해칠까 봐 무서워 도망치는 친구들과는 달랐다. 벌레가 무서웠던 게 아니라, 내가 그 작은 벌레를 다치게 할까 봐 무서웠다.


아주 어릴 적, 죽어가는 벌레를 본 적이 있다. 아무렇지도 않게 작고 무시무시하게 생긴 벌레를 사정없이 내리친 어떤 어른의 손바닥 아래에서 온몸이 뒤틀린 그 이름 모를 벌레는 숨이 끊어지지 않았다. 대신 몸집에 비해 너무도 보잘것 없이 얇은 다리를 꿈틀거렸다.


그건 한 생명의 열정이었다. 죽을 때까지 할 수 있는 한 생존을 위해 힘껏 발버둥을 치는 본능이자 집념, 태어난 순간 자신에게 주어진 생명이라는 의무를 최선을 다해 이행하리라는 생명을 가진 모든 생명체의 책임감이었다.


단순한 내 혐오감으로 죽일 수 있는 생명은 어디에도 없고, 반대로 단순한 내 호감으로 소유할 수 있는 생명 또한 어디에도 없으니, 생명 그 자체의 존재함을 존중하자는 것이 나름의 신념이 됐다. 그래서 나는 동물을 좋아하지만 동물을 키우는 행위 자체에는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다 곰탱이를 만났다.


아빠가 몸 담으셨던 사업이 부도가 나고, 살던 집이 더 좁고 초라해지고. 부모님은 예상치 못한 가난으로, 오빠와 나는 지독한 사춘기로 가족 자체가 예민함의 극치에 달했을 때였다. 가족을 위해 돈을 벌어야 했던 아빠는 고물상에 들어가셨고, 그곳에서 하얀 똥강아지를 덜컥 데리고 오셨다.


나와 오빠는 그저 신기하기만 했고, 개를 싫어하기도 무서워하기도 하셨던 엄마는 질색하셨다. 아직 이름이 지어지지도 않던 똥강아지는 무서워서 소파 밑에 숨어 덜덜 떨고 있었다.


아무도 몰랐다. 말도 안 통하는 새로운 존재가 우리와 함께 밥을 먹고, 벌벌 떨던 아이가 그 집안 딸내미의 게으름으로 방구석에 쌓아놓은 빨래더미 속에서 잠이 들고, 어느덧 외출에서 돌아오면 제일 먼저 웃으며 반겨주게 될 거라는 사실을.


암울한 사춘기를 보내던 아들에겐 예쁜 여자친구가,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방황하던 딸에겐 귀여운 동생이,

마음처럼 되지 않는 삶에 지쳐가던 아빠와 엄마에겐 없어선 안 될 막내딸이 되어 있었다.


가족들이 입을 모아 곰탱이에 대해 말하는 건 결국 하나였다. 우리 가족은 곰탱이로 인해 성장했고, 완성됐다는 것.


아빠가 다니던 회사가 망하지 않았다면, 빚더미에 앉아 엄마와 아빠가 결국 이혼을 하셨더라면, 술과 담배를 좋아하던 아빠가 실직으로 술과 담배만 좋아하게 됐더라면, 동물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던 엄마의 입김에 결국 곰탱이를 어딘가로 보냈더라면… 우리 가족은 어쩌면 이마저도 가족으로 부르지 못하는 삶을 살았을지도 몰랐을 것이다.


우리는 곰탱이를 키우지 않았다. 곰탱이와 함께 살았다. 어쩌다 보니 태어나 이 가족의 일원이 된 것처럼, 어쩌다 보니 만나 우린 다섯 식구가 된 것이다.


해주지 못한 게 너무 많아, 같이 가보지 못한 곳이 너무 많아, 함께 보내지 못한 시간이 너무 많아 이렇게 사무친다.


동물의 왕국 같은 다큐멘터리에서 육식동물이 초식동물을 사냥할 때, 살기 위해 발버둥 치던 초식동물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내 주변에서 소리 없이 숨을 거두는 크고 작은 벌레들은 눈앞에 둔 죽음을 향해 발버둥 칠 때, 벌레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곰탱이는, 사지가 경직되어 움직이지도 못하면서 남겨질 내게 자기 숨을 불어넣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곰탱이도 다른 동물들처럼, 다른 벌레들처럼 발버둥 치고 싶지 않았을까? 답답하진 않았을까?


아니면 자신의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기만 했을까? 다만 그 자리에 없던 다른 가족들이 보고 싶었을까?


아니면 날 원망했을까? 자길 살려주지 못해서, 여러 번 위기의 순간이 있었음에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 내 무능력과 가난을 원망하지 않았을까?


사실 곰탱이가 열여섯 살이 되던 해 봄에 세상을 떠난 건 급사가 아니었을 것이다.


곰탱이가 떠나기 전, 근 일이 년 동안 곰탱이는 급속도로 쇠약해졌다. 산책을 나서도 평소 다니던 거리의 절반도 채 다니지 않았고, 평소보다 더 많이 자고 좀처럼 깨지 않았다. 외출을 하거나 오랜만에 가족을 보면 너무 반가운 나머지 심장에 무리가 가 발작을 일으키기는 것도 부지기수였다.


가족들은 곰탱이를 만날 때면 반갑다고 들뜨기보다는 곰탱이가 무리하지 않도록 아는 척을 안 하거나 그 옆에 앉거나 누워 흥분을 가라앉혀주려고 했다. 게다가 밥 먹고 탈이 나 병원에서 당장 죽을지도 모른다고 했던 그 겨울날 이후로 곰탱이의 밥은 물론 소화를 시켜주는 것도 신경 쓰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마음의 준비를 했어야 하지 않았나, 지금 생각해 보면 그랬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곰탱이가 떠나는 날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침 산책을 나가자고 했는데, 소파에 앉아 멀뚱멀뚱 현관문에 서서 자기를 기다리는 나를 쳐다만 보고 있었다. 화장실이 가고 싶을 시간인데 나오지 않는 곰탱이에게 계속해서 나오라고 조르니 마지못해 나와주었고, 현관문을 나서자마자 발작으로 쓰러졌다. 그날은 처음으로 소변을 지렸다.


언제나처럼 심장 부근을 마사지해 주면서, 괜찮아- 괜찮아-를 반복해 말해줬다. 언제나처럼 곰탱이는 벌떡 일어나 멀쩡하게 다시 걸었다.


그날은 답지 않게 더 멀리, 더 오래 산책을 다니면서 주변 냄새를 더 꼼꼼하게 맡았다. 그날은 답지 않게 먹고 싶지 않으면 줘도 안 먹는 밥을 싹싹 긁어먹었다. 답지 않았던 그날이 곰탱이의 마지막 날이었다.


엄마는 말씀하셨다. 곰탱이가 자기 마지막 날인 거 알고, 언니랑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산책 다 하고, 마지막으로 아빠가 주는 음식도 다 먹고 간 것 같다고.


그러니 급사가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곰탱이는 계속해서 자신의 끝이 다가올 것을 알려주고 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모두 내 탓이다. 곰탱이가 자신을 살려주지 못한 날 원망한다면, 곰탱이를 살려주지 못한 내 탓이고, 곰탱이가 덤덤하게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였다면, 당사자도 받아들인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지금까지 허덕이고 있는 내 탓이다.


모두 내 잘못이다. 정말 잘못했다. 뭐가 됐든 다 내가 미안해.


곰탱이가 죽을 거란 걸 직감하면서도 외면하고 싶었지만 끝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그 시간에 나는 곰탱이의 뺨을 그러쥐어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그리고 말했다. 새벽에서 아침이 올 때까지.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나면 그때는 꼭 언니 딸로 태어나야 해, 알았지? 먹고 싶은 거, 하고 싶은 거, 다 하게 해 줄 테니까 꼭 언니 딸로 태어나 줘. 사랑해. “


곰탱이가 알아듣고 무지개다리를 건넜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숨이 넘어가기 직전까지 귀에 딱지가 앉도록 말해주었으니, 무지개다리 너머 이 말을 번역해 줄 누군가가 있다면 지금쯤은 내 말을 알아들었으리라.


2022년 10월 22일. 곰탱이는 산책하다가 늘 날 앞서 간다. 멀어지던 곰탱이가 문득 뒤돌아 걸음이 느린 나를 기다린다. 난 그 엉덩이가, 보채는 눈빛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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