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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내 INAE Oct 16. 2023

펫로스가 가장 힘들 때는, 내가 깨끗해질 때다

<안녕, 우리 똥강아지>

동물을 키우는 행위 자체에 관심이 없거나 동물을 집안에서 키우길 꺼려하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이유는 단연 위생 때문일 것이다. 특히 털과 냄새. 직접 키워본 우리 가족조차도 냄새는 익숙해졌을지언정 곰탱이가 움직일 때마다 공중에 날아다니는 개털에는 적응하지 못했다.


우리 다섯 식구는 2015년부터 차로 1시간 정도 떨어진 시골의 단독주택과 아파트에서 나눠 살기 시작했다. 시골집에는 아빠와 곰탱이가, 아파트에는 엄마와 오빠와 내가 살았고, 금요일 저녁에 모든 일이 끝나면 아파트 식구들이 모여 시골집으로 가 주말을 보냈다. 주말가족이라고나 할까. 평일 내내 아빠와 있던 곰탱이는 간만에 만난 나머지 가족들을 항상 격하게 반겨주었는데, 나름 떨어져 살아 개털로부터 자유로웠던 아파트인들의 깨끗한 옷은 삽시간에 하얀 진돗개의 털로 범벅이 되었다.


그러니 다섯 식구가 아파트에서 함께 살았던 2015년 이전의 삶은 어땠겠는가. 특히나 곰탱이처럼 항상 엉덩이를 누군가의 몸에 꼭 붙이고 있어야만 하는 강아지와 함께 살다 보면 외출복과 실내복의 구분이 필수다. 하지만 그렇게 구분을 철저히 해도 인간의 몸에 난 털보다 딸려 붙은 개털이 더 많아지는 건 정말 금방이어서 그 당시에 교복을 입고 다니던 나는 개털 투성이의 교복을 당연하게 입고 다녔다. 그럼 친구들이 둥글게 달라붙어 내 남색 부직포 재질의 교복에 붙다 못해 꽂힌 개털을 하나하나 떼어주곤 했다.


하지만 곰탱이가 털갈이라도 하는 기간에는 잠자코 체념한 뒤 청소기나 열심히 돌리는 게 심신 안정에 더 낫다.


냄새도 마찬가지다. 동물을 키우는 사람의 몸이나 집에서 나는 특유의 냄새가 있다. 비에 젖은 흙냄새와 빨지 않은 옷에서 나는 냄새의 중간 어디쯤의 냄새라고나 할까. 약간 콤콤하고 시큼한데 고소한 그런 냄새. 특히 곰탱이처럼 털이 젖거나 물에 닿는 것 자체를 극도로 싫어해서 목욕을 시키자고 서로 고생할 바엔 포기하는 게 편하다. 실제로도 우리 가족이 곰탱이를 목욕시키는 건 거의 1년에 한 번 될까 말까. 더럽다고 뭐라 해도 어쩔 수 없다. 뭐, 비 오는 날 우비나 우산도 없이 산책을 나가거나 흙탕물에 뒹굴지도 않았는데 굳이?


그러니 우리는, 곰탱이 털이 안 빠지게 할 순 없고, 곰탱이가 싫어하는 목욕을 좋아하게 만들 자신도 없으니, 열심히 청소기를 돌렸고, 우리 자신의 목욕과 빨래나 더 열심히 했다. 사실 그래서 안 되는 이유가 뭔가? 동물한테서 냄새가 난다고 불편한 것도, 동물의 털이 옷을 지저분하게 만든다고 해서 불편한 것도 전부 난데, 절이 싫으면 중이 나서야 맞지 않겠는가.


그리고 난 곰탱이의 털이나 냄새가 그리 싫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고 해야 맞겠다. 어딜 가나 곰탱이 털은 날 따라왔다. 곰탱이와 같이 살 때도 그랬고, 곰탱이와 떨어져 살 때도 마찬가지. 곰탱이가 와본 적도 없는 대학시절 자취방들에서도 청소를 하다 보면 빗자루에 곰탱이 털이 끼어 있었고, 곰탱이와 떨어져 산지 5년이 넘어가는 때에 다녔던 직장에서마저도 내 자리에는 곳곳에 곰탱이 털이 붙어있었다.


시골을 더 좋아하는 곰탱이를 억지로 아파트에서 키울 수도 없고(아파트에서 살 때의 흑역사가 있었다) 그렇다고 직장을 다녀야 했던 내가 버스도 잘 안 다니는 시골에서 살 수 없었기에 주말에라도 볼 수 있음에 감사할 뿐이다. 그러니 곰탱이가 없는 공간에서마저 곰탱이의 흔적이 나타나준다는 건, 힘들고 지치는 하루의 연속 속에서 널 보러 가는 날 위해, 날 보고 싶을 널 위해 힘을 낼 수 있는 버팀목이 되기 충분했다.


게다가 오랜만에 맡는 곰탱이의 냄새가 얼마나 꼬수운지. 냄새조차 귀엽다는 말을 믿을 수 있겠는가?


“곰탱이가 죽어도 이 놈의 털은 절대 안 없어질 거야.” 매일매일 퇴근 후에 청소기를 돌려야 직성이 풀리던 아빠는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아빠는 틀렸다. 아빠는 더 이상 청소기를 돌리지 않으신다.


여전히 우리는 금요일 저녁이 되면 시골집에 가지만, 더 이상 시골집에서는 곰탱이 냄새가 나지 않는다. 옛날만큼 목욕을 하거나 청소를 하지 않아도 하루이틀 정도론 내 몸에선 냄새가 나지 않았고, 방구석에 쌓여 있는 건 오로지 내 머리카락 뭉텅이뿐이다.


곰탱이의 부재가 어느 정도 익숙해져도, 그 부재의 존재감이 불쑥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갑자기 어느 날 문득. 코를 찌르는 꼬순내가 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낯설고, 검은색 니트가 깨끗한 모습이 이상해 보인다.


가슴이 답답해진다. 곰탱이의 흔적조차 더 이상 내 곁에 없음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휴대폰을 꺼내 갤러리를 연다. 처음으로 옷을 입혔다가 고장 난 곰탱이가 귀여워 찍은 사진, 가장 좋아하는 자리에서 가장 좋아하는 이불을 껴안고 곤히 자는 사진, 갑자기 하던 짓을 모두 멈추고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숨을 죽이는 사진.


하지만 이 마음을, 보고 싶고 만지고 싶고 한없이 껴안고 싶기만 한 이 마음이 채워지지 않는다.


이런 사진보다 가혹하고 생생한 기억들이 떠오른다. 나란히 얼굴을 마주 보고 누운 내 얼굴에 뿜어주던 따뜻한 숨, 날 바라보며 끔뻑이던 눈꺼풀, 애기 손을 잡듯 꼭 잡아 쥐며 주무르니 답지 않게 피하지 않던 왼쪽 앞발. 숨이 넘어가는 순간 내 가슴을 부여잡던 두 앞발과 마침내 꺼진 눈빛.


내게 불어주던 숨이 끊긴 팝콘 같은 콧방울과 입이 차가워지던 감각. 밤새 가슴팍에 손을 올려 확인했던 심장박동의 정적. 너무 조심스러워서 감겨주지도 못했던 눈꺼풀은 쪼그라들고, 눈동자의 표면이 말라갔다. 뺨을 쓰다듬고 주물러주면 좋아서 내 손바닥에 머리를 얹었던 곰탱이는 더는 뺨을 아무리 쓰다듬어주어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아직도 그 생명의 부재로 인한 찬기가, 부드럽던 털의 결이, 거실에서 방에 있는 나를 찾던 그 발톱 소리가 아직도 이렇게 생생한데, 시간은 가차 없이 아이의 흔적을 가져간다. 앞으로 내 주변은 더 깨끗해지겠지. 곰탱이가 떠난 나는 앞으로 점점 더 반려인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 되겠지.


조금 섭섭하지만… 괜찮아. 그런 흔적이나 사진 따위보다도 내 몸에 남은 감각, 더할 나위 없이 생생한 기억이 있다. 그러니 괜찮아. 괜찮아져 볼게.


그러다 창고에 넣어둔 계절 지난 옷에서 곰탱이의 털을 보게 된다면, 너를 본 것처럼 반갑기만 할 거야.




2021년 9월 4일. 어릴 땐 오빠가 날 쿡쿡 찌르면서 괴롭히면 그렇게 싫을 수가 없었는데, 동생이 생겨보니 왜 건드리는지 알겠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꼬순내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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