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우리 똥강아지>
좋은 곳에 가면 보고 싶은 사람들이 떠오른다. 대차게 싸우고 헤어져 연락조차 하지 않는 관계가 됐을지라도, 좋은 곳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어마어마한 장관을 보게 되면, 좋은 기억을 단 하나라도 남겼던 그 어떤 사람이라고 해도 가슴이 울적하도록 보고 싶다. 사랑했던 남자가 떠오를 때도 있고, 오랫동안 연락을 끊은 친구가 떠오를 때도 있다.
나는 요즘 좋은 곳에 가면 반려견과 여행 또는 산책을 나온 사람들에게 눈길이 간다. 처음 본 곳을 반려인과 함께 용감하게 누비며 처음 본 사람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크고 작은 강아지들을 보면, 나의 적당히 크고 하얀 똥강아지가 보고 싶다.
이 좋은 곳을 곰탱이와 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다른 강아지들이나 사람한테 관심은 없던 내성적인 진돗개지만 나와 걷는 산책길을 좋아하던 곰탱이였으니 내가 데려간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냄새가 나는 이슬을 핥기도 좋아해 주지 않았을까.
함께 가보지 못한 곳이 너무 많아, 함께 해보지 못한 것이 너무 많아 아쉬운 마음을 스치는 다른 이의 반려견들을 바라보며 달래곤 한다. 그러다 내가 좋아하는 생김새의 강아지들을 보면 ‘잘생겼다’며 소곤대기도 하고.
서해를 옆구리에 끼고 멋들어진 노을을 이불 삼은 산책길을 걷던 날이었다. 어떤 아저씨가 자기 개를 칭찬하는 내 혼잣말을 듣고 신나서 말씀하셨다.
“얘, 잘생겼죠? 데려갈래요? 천 원에 팔게요!”
꼭 짓궂은 아빠들이 자기 애가 이뻐 죽겠다는 표현을 갖다 버릴 거라던가 돌다리에서 주워왔다는 장난으로 하는 경우가 있다. 아저씨의 말이 진심이었든 아니든 그 옆에 앉아 아저씨를 바라보며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의 모습에서 얼마나 사랑받고 길러지고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별다른 대답 없이 그저 웃으며 아저씨를 지나쳤지만 사실 고백하자면, 조금 혹하기는 했다. 수중에 현금이 있었다면 진지하게 흥정을 해봤을지도 모르겠다.
유독 곰탱이처럼 털이 하얗고, 복실복실하면서도 귀는 뾰족하고, 주둥이가 길쭉한 아이들을 보면 곰탱이와 함께 했던 시절이 그립다.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곰탱이를 화장실로 보낼 겸 산책을 나서고, 갔다 오면 곰탱이 밥을 주고, 속이 든든해진 곰탱이는 자기 몸을 핥으며 단장을 좀 하다가, 틈틈이 낮잠을 자는 몸을 옆에 두고 나는 내 할 일을 시작하던 그 시절의 루틴이, 바이오리듬이 그립다.
사람의 죽음보다도 동물의 죽음이 조금 더 아프기도, 또 그럭저럭 견딜 만 하기도 한 이유가 여기 있다. 곰탱이를 닮은 아이들이 꽤 많다는 것. 또, 곰탱이를 대신할 수 있을 것 같은 아이들을 비교적 쉽게 데려올 수 있다는 것. 사람이 아니라 동물이라서.
곰탱이가 죽고, 백일쯤 지났을 때였다. 곰탱이가 아파트에서 살았을 때는 배변패드를 많이 사다 놨지만 시골집에서 살기 시작하면서부터는 현관문을 열기만 하면 온 천지가 곰탱이 화장실이었기에 배변패드를 쓸 일이 없었다. 그나마 곰탱이 밥그릇 주변에 깔아놓는 정도?
안 그래도 쓸 일이 없어 뜯지도 않은 배변패드가 거의 200장이 있었는데, 곰탱이가 죽고 나니 아예 쓸모가 없어져서 나눔을 하기로 결정했다.
‘아이가 강아지별로 떠나서 배변패드 나눔 합니다.’
사실, 나눔은커녕 중고 거래 자체를 해본 적이 없었던 나는 나눔이래 봤자 얼마나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주겠냐고 간단하게 생각했는데, 크나큰 오산이었다. 게시글을 올리자마자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연락을 줘 서둘러 제일 먼저 연락을 주신 분께 드리기로 결정했다.
옆동네에 사시는 분이긴 했지만 그래도 버스로 30분 거리에 사시는 분이셨는데, 심야에 일을 하셔서 당장 당일에 나눔 장소로 정한 우리집 앞에서는 받지 못하신다는 거다.
무슨 욕심에서였을까. 난 그럼 내가 지금 그쪽으로 가겠다고 했다. 그분이 자주 당근 거래를 부탁하는 편의점이 있다고 해서 거기에 맡겨두겠다고. 그 길로 바로 버스를 타 약속장소로 갔다.
왜 그렇게까지 했냐고 누가 묻는다면, 글쎄, 그냥 그러고 싶었다고 답할 수밖에. 그리고, 나는 조금 위로가 필요했을지도 모르겠다.
난 곰탱이의 죽음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펫로스가 내게 재난 같은 충격을 주긴 했고, 그로 인해 다시 일어서기가 꽤 오래 걸렸다. 하지만 그래봤자 남들 눈에는 키우던 화분이 죽었다는 것보다 조금 더 슬픈 일이지, 가족이 죽은 일보다는 별 거 아닌 일이었다. 그걸 알게 된 후에는 우리 똥강아지가 죽었고, 나는 슬프다는 이야기를 거의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래도 나도 사람인지라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를 실행하여 누구라도 좋으니 내 슬픔을 이해해주는 사람을 원했던 게 아니겠는가. 굳이 배변패드 나눔글을 올리면서 아이가 떠났다는 말을 썼으니 말이다. 게다가 나눔을 결정한 분도 몇 년 전 키우던 아이를 떠나보내고 지금은 새로운 아이를 키우고 있다고 말씀하시니, 드디어 내 상실감과 슬픔을 공감받고 위로받을 수 있다는 기대감이 내 발을 움직였을 것이다.
그런데, 물건을 받기 전에도, 물건을 받고 나서도 그분은 내게 ‘반려견 입양‘을 꽤 적극적으로 권유하셨다. 본인도 이전에 키우던 아이를 떠나보내고 한 달 만에 새로운 아이를 입양하며 행복한 날을 보내고 있다고. 하늘나라로 간 아이를 금방 잊을 수 있고 완전히 새로운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거라면서. 본인이 아이를 입양한 곳의 주소도 링크로 보내주면서.
갑자기 기분이 나빠졌다. 어쩌면 화가 났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단순히 이 분뿐만이 아니라 이제까지 곰탱이가 우리 곁을 떠났다는 말을 들은 나와 가족들의 지인들도 모두 입을 모아 말했었다. ‘새 강아지 데리고 와.’
펫로스를 겪고 극복의 방법으로 입양을 하는 분들을 나쁘게 보지 않는다. 그냥 내 성격이 꼬여서 친절한 위로의 말도 꼬아서 듣는 괘씸함 때문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내겐 그 말이, 새 강아지를 좀 더 새끼 때부터 길러서 이번엔 오래 키워보라는 그 말이, 너무 야속하게만 들렸다.
난 같이 산책할 개가 필요한 것도, 외출하고 돌아온 날 반겨줄 다른 개가 필요한 게 아니야. 곰탱이가 보고 싶은 거야. 곰탱이랑 산책하며 좋아하던 아침 이슬을 맛보게 하고 싶은 거고, 마트에 맛있어 보이는 육포가 보이면 먹여 보고 싶은 거란 말이야.
곰탱이가 살아있을 때조차도 멋진 셰퍼드를 기르고 싶다고 말씀하시던 아빠는 여전히 곰탱이를 묻어준 자리를 서성이고 계시고, 엄마는 곰탱이였으니까 같이 살았을 뿐이라며 다른 개를 키우는 건 상상도 해보지 않았다고 하신다.
우리 가족에게 곰탱이는 막내딸이었다. 어린 딸이 죽었다고 새 아이를 고아원에서 입양해오지 않는 것처럼 우리에게 곰탱이는 그런 존재였다. 다른 이들의 반려견들이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말이 아니다. 그저, 우리는 우리 똥강아지만이 보고 싶을 뿐이다.
그러니 적어도 우리 가족들이 겪고 있는 펫로스를 위로하고 싶다면,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다 문득 실없는 소리를 할 때가 있을 것이다.
파리로 다시 태어난 곰탱이가 컨테이너에 들어왔다거나, 갑자기 곰탱이 지금 어디 있냐고 물어본다거나, 혼자 밥을 먹고 있으면 옆에 와서 ‘왜 곰탱이는 안 주고 혼자 먹어?’라고 시비를 건다거나.
현관문의 유리중문이 닫힌 너머에서 늘 문을 열어주길 기다리던 곰탱이를 떠올리며 현관문을 쳐다본다거나, 곰탱이가 좋아하는 소파 자리에 깔린 이불을 말없이 쓰다듬어본다거나.
그럴 때면 그냥 옆에서 말없이 얘기를 들어주며 기다려준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그래주고 있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모두 고맙다. 이 글을 보며 묵묵히 라이킷을 눌러주시는 여러분들도 모두모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