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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내 INAE Oct 17. 2023

진심으로, 동물은 키우지 마세요

<안녕, 우리 똥강아지>

예전에 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정신과 의사의 말이 기억난다. 언제 결혼하는 게 좋을까요?라는 출연자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혼자 살아도 상관없을 때 결혼하면 좋습니다."


누구에게도 과하게 의지하지 않고, 어느 정도 독립적인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할 준비도 되어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불안을 해소하고 싶어서 누군가가 보고 싶고, 자신의 결핍을 채우고 싶은 마음으로 누군가를 소유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나의 이기적인 욕심이지 상호 간에 괜찮은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


이건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에서도 중요한 말이지만, 사람과 동물 간의 관계에서도 굉장히 중요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사람의 관계나 사람-동물의 관계도 모두 서로 다른 세상에서 자라나 서로 다른 언어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삶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동물을 그렇게 키우기 시작하지 않는다. 내 경험이 비단 협소하여 우물 안 개구리라고 해도, 적어도 내 우물 속의 사람들이 동물을 키우기 시작하는 과정이 거의 비슷했다.


학생 때는 '나도 귀여운 강아지나 고양이를 키우고 싶어'라는 소유욕이 생긴다. 잔인한 말이겠지만, 인형 뽑기 기계 속에 수많은 귀여운 인형들을 갖고 싶은 마음과 비슷할 것이다. 외동으로 자란 친구들의 경우에는 친구 또는 형제 삼고 놀라고 부모님이 선물로 주기도 더러 있었다.


그러다 대학생이 되고, 사회인이 되어 가족의 품을 떠나 자취를 시작한다. 외롭다. 혼자 집에 있거나 집에서 노는 걸 더 좋아하는 내성적인 내향인이라고 해도 가족들이 같이 사는 집에서나 괜찮았을 것이다. 불 꺼진 집안에 홀로 들어가 냉장고 돌아가는 기계음만이 전부인 집에서 살다 보면 어느새 누군가의 목소리, 숨소리를 느끼고 싶어진다.


같이 살 사람을 만드는 건 굉장히 어렵다. 그나마 친구와 함께 사는 게 쉬운 방법이겠지만, 서로 다른 세상에 있던 사람과 갑자기 살을 부대끼고 살아간다는 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거의 90퍼센트 넘는 확률로 일주일에 한 번은 꼭 싸울 것이다. 가족들과도 싸우는데 아예 남끼리는 오죽하겠는가.


그럴 때 모양 좋게 데려와 키울 수 있는 게 반려동물이다. 말은 못하지만 나 없인 못 사는, 움직이지 못하는 인형보다도 더 귀엽고 잘 놀아줄 수 있는 나만의 아이. 관계에서 오는 상대방을 모른다는 불안감과 내 내 마음을 몰라주나 싶은 원망을 전혀 느끼지 않을 수 있는, 나 없이 넌 어떻게 살았나 싶고 넌 나 없이 어떻게 살았나 싶은, 그야말로 '반려동물'이라는 말이 너무나 잘 어울리는 우리 주인님.


무턱대고 데려오기도 쉽고, 키우는 방법에 대한 정보들은 요즘 인터넷에 널리고 널렸다. 강아지? 키우기 쉽지. 산책 많이 나가주고, 시간 맞춰 사료 사다 먹이면 되고. 고양이는 더 좋다. 산책 나갈 필요도 없고, 집안에 캣타워랑 모래 담은 화장실만 설치해주면 되잖아.


자기가 혼자 살기 외로워서, 나는 동물을 좋아하는데 남들은 다 키워서, 누가 혼자서 적적하게 살고 있는 것 같으니까 툭-. 내가 나에게 주는 선물이든 누군가에게 주는 선물이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를 툭-. 그러다 지나치게 짖어대는 개가 시끄럽고, 산책 한 번쯤이야 귀찮으니까 안 나가고, 분명히 날 사랑하는 것 같기는 한데 어느 틈에 갑자기 날 물어버리고. 건방지고 예의 없는 아이의 모습이 더 이상 사랑스럽게만 보이지 않을 것이다.


아니라고? 아닐 거라고 미약하게나마 다짐하지도 못할 거면, 동물을 키운다는 게 뭔지도 모르면, 누군가와 함께 새 가족이 된다는 의미를 짐작조차 할 수 없다면, 그만큼 당신 자신에게 확신하지 못하는 스스로와 그런 당신에게 잡혀 새로운 세상에 떨어져야 할 작은 아이를 위해서라도 ‘키운다’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내 아이와 다름없는 반려동물이라면서, 너에게 가족이 되어 주고 싶은 반려인이라면서. 자신의 세상에서 자신만의 방법으로 살아가고 또 살아갈 말도 안 통하는 아이를 멋대로 데려와 내 세상에 끌고 왔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인간의 측은지심이, 정말로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고 싶고, 불행이 예정된 누군가의 삶을 행복하게 해주리라는 약속에서 우러나온 마음이 아니라, 이렇게 귀여운 네가 추위와 배고픔으로 떨고 있는 게 불쌍해서, 반려견과의 산책이든 반려묘와의 사냥놀이든 남들도 다 하는 거 나도 하고 싶다는 욕심을 측은지심으로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래야 내 불안이나 결핍 없이 온전한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게 온전한 사랑이 가능해진 뒤에야 말이 통하지 않는 우리라고 해도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고, 서로가 서로의 선을 침범해 무례와 실례를 느낄 때 따끔하게 일침을 가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이 또한 결국 내 입장일 뿐이다. 인간의 욕구 중에서도 한 생명을 보살피고자 하는 욕구는 굉장히 중요한 본능적 욕구라고 생각한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게 천직인지라 다견가정을 유지하는 사람도 있고, 불쌍한 동물을 보면 절대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인간이 가진 보살핌의 욕구는 또한 인간 사회를 발전시킨 원동력 중의 하나다.


단지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무언가를 보살피고자 하는 욕구와 무언가를 막연하게 갖고 싶은 욕구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개를 16년 가까이 키워봤다는 이유로, 그런 내가 16년을 함께 한 개를 무지개다리 너머로 떠나보냈다는 소식을 듣고, 꽤 많은 지인들이 말해왔다.


"16년이면 엄청 많이 산 거야. 너무 상심하지 말고 이참에 새로 아주 어린 새끼로 하나 데려와 키워."

"넌 곰탱이 있었으니까 안 외롭고 좋았겠다. 나도 하나 키울까?"


이전에도 언급했지만, 이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는 펫로스에 대한 충격과 슬픔을 위로받고 싶었던 마음이 반이었고, 나머지 반은 내게 '동물을 키운다'는 행위를 그럭저럭 괜찮은 취미처럼 말하는 사람들에게 정중하고 진지한 거절의 말을 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은 곰탱이를 키우지 않았다. 서로의 살을 부대끼고, 서로의 숨을 나눠 쉬었다. 서로에게 원하는 게 따로 없어서 서로의 선을 지키도록 노력했고, 식구라는 이름 아래 함께 하는 일상을 귀하게 여겼다.


다만 행복했다. 함께 있어서. 함께 살아서.


그러니 말하고 싶다. 동물이 키우고 싶다면, 키우지 말라고. 다만 같이 살라고.


내가 널 필요로 해서가 아니라, 네가 날 필요로 하는 것 같으니까가 아니라, 너에게 내가 나이고, 나에게 네가 너라서 사랑하게 되라고.


사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내 수명의 반의 반도 안 되는 아이와 함께 하는 삶을 택함으로써 필연적으로 겪어야 하는 펫로스라는 아픔을, 이 재난을, 이 상실을 당신도 느끼지 않았으면 하는 하는 게 내 마음이다.


날짜 미상. 시골엔 집들이 띄엄띄엄 있어서 종종 그냥 산책을 하고 다녔다. 곰탱이는 걸음이 빠르진 않지만 부지런해서 내가 부르면 멈출지언정 돌아서지 않았다. 똥고집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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