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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내 INAE Oct 19. 2023

참치김치찌개를 좋아하던 어느 똥강아지 이야기

<안녕, 우리 똥강아지>

2000년대 후반, 우리 가족은 찢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가족이 모두 뛰어든 사업이 망하고, 평생 일해도 벌 수조차 없는 액수의 빚을 떠안고, 가족이 찢어져 사는 게 현명한 방법일 것 같을 때였다. 실제로 거의 그럴 뻔했고. 그 당시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내게 위장이혼을 한다면 어떨 것 같냐고 물어보시던 엄마의 말이 아직도 생생하다.


하지만 우리는 찢어지지 않았다. 말뿐인 위장이혼을 하는 대신 가진 재산을 모두 털어 당장의 위기를 넘겼고, 건설사의 부도로 짓다 만 아파트로 이사했다. 엄마는 하시는 일에 주말 아르바이트까지 병행하셨고, 아빠는 고물상에 다니기 시작하셨다.


가세가 기울어도 넘어지진 않았다. 그래도 아슬아슬했다. 엄마와 아빠는 매일 같이 싸우셨다. 쉼 없이 일하느라,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죄책감과 상처받은 자존심이 비수가 되어 서로의 가슴에 꽂았던 것이다. 초등학생이었던 내 눈에도 엄마와 아빠가 그 길로 갈라서지 않은 게 이해되지 않을 정도였는데, 감수성이 예민한 중학생이었던 오빠의 눈에는 위태로운 상황이 얼마나 잘 보였을까.


곧 우리는 가족일 수 없겠다. 그렇게 생각한 때, 퇴근한 아빠의 품 안에 하얀 털뭉치가 안겨 있었다. 투박한 황토색 상자 안에 들려있었나? 아무튼. 평생 동물이라곤 키워볼 생각도 하지 않았던 내 눈앞에 하얀 진돗개가 벌벌 떨고 있었다. 고물상에서 묶어 놓고 키우던 진돗개가 낳은 새끼라고 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아마 7-8개월 정도였지 않았을까.


”왜 데려왔어?“라는 내 말에 아빠는 ”애가 밥도 못 먹고 떨고 있는 게 불쌍해서“라고 하셨다. 그러거나 말거나 동물이라면 질색팔색을 하시던 엄마는 당장 다시 가져가라고 소리를 지르셨다. 그러거나 말거나 오빠와 나는 그저 시골에 가면 종종 보던 누렁이 이후에 처음 보는 강아지가 퍽 신기하기만 했다.


“이름이 뭐야?”

“백곰!”


그렇다. 처음 곰탱이의 이름은 백곰이었다. 나이가 들어서는 털 끝이 조금 누렇게 변했지만 어릴 땐 정말 털이 하얬으니까.


이름이 없던 똥개가 처음으로 이름을 갖게 된 역사적인 순간이었지만, 그걸 잘 살다가 웬 인간남자에게 납치 당해 애먼 세상에 뚝 떨어진 강아지에겐 그저 아주아주 너무너무 무서운 순간일 뿐이었으리라. 그러니 내내 소파 밑에, 식탁 밑에 숨어 있었다.


사실 아빠도 이 강아지를 평생 키울 생각으로 데려오신 건 아닌 듯하다. 뼛속까지 시골사람이었던 아빠는 어릴 때부터 밭 갈고, 동물을 키우는 일이 익숙한 분이셨다. 청년이 돼서는 직업군인이셨고, 전역을 하자마자 가족 사업에 투입 됐지만 그 본능이 어디 가겠는가. 결혼을 하고서도 산속에 들어가 혼자 자연인처럼 사는 게 꿈이라고 하셨으니. 가정적으로도, 직업적으로도 상황이 악화되는 상황에서 삐쩍 마른 어린 똥개를 외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그의 와이프는 절대 개를 키우게 할 사람이 못 됐고, 그 시절에는 아파트에서 진돗개를 키우는 게 죄였던 시절이었다.


결국 친척 중 건강원을 하시는 분께 아이를 주기 전까지만 키우기로 합의를 보았다. 이 사실도 솔직히 난 기억하지 못한다. 정말로 친척 분의 집에 인사를 드릴 겸 아이를 전해주러 간 날마저도 11세의 나는 이 아이와 함께 집에 돌아갈 거라고 알고 있었다.


아빠가 이미 이름이 ’백곰‘이라면서 실제로 부르기를 ’곰탱이‘랄 때부터, 엄마가 매일매일 곰탱이를 보며 못마땅해하면서도 도통 밥을 먹지 않는 곰탱이를 걱정하실 때부터, 오빠가 곰탱이만 두고 학원 가기 싫다며 자기 몸의 반만 한 곰탱이를 안고 기어이 학원에 갔을 때부터.


도무지 떠는 몸을 멈추질 못하는 곰탱이에게 어디서 들은 잡지식으로, 주인의 체취가 묻은 옷을 덮어주면 강아지가 편안함을 느낄 거라는 말을 떠올리고 내가 제일 아끼던 가디건을 덮어줬더니, 그날 이후부터 곰탱이가 내 방구석에 쌓여있던 빨래더미 위에서 자기 시작했을 때부터 곰탱이는 우리 가족이 될 운명이지 않았을까.


게다가 거의 결정적으로, 곰탱이를 처음 밥 먹이던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밥을 통 먹지 않아 불쌍하다던 아빠의 말씀처럼 곰탱이는 도통 밥을 먹지 않았다. 마트에 겨우 하나 있던 강아지 사료를 사다 줘봐도 냄새만 킁킁 맡을 뿐 입에도 대지 않았고, 그나마 물을 떠다주면 몇 번 날름하는 정도였다. 이러다 굶어 죽는 게 아닌지 곰탱이를 중심으로 둥글게 모여 앉아 가족들은 고민했다.


그때, 갑자기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참치김치찌개를 참 좋아하는 딸내미가 있어 항상 참치김치찌개가 구비되어 있었다. 갑자기 그게 떠올랐고, 평생 본 개라고 하면 시골에서 짬밥 먹으며 밖에서 키우던 똥개밖에 몰랐던 이 딸내미가 호기심에 자기가 먹으려던 밥 말아놓은 참치김치찌개를 스윽- 내밀어 본 것이다.


이놈. 맛있게 잘 먹었다. 고물상에서도 역시나 짬밥 먹이며 키워서 그랬는지 아주 설거지도 못하게 싹싹 긁어먹는 것이다. 처음 본 포동포동하게 차오른 분홍색 배를 잊을 수 없다. 동물이라면 질색을 한다던 엄마도 그 순간 얼마나 기뻐하셨는지 똑똑히 기억한다.


그날 이후로 계속 국밥을 먹였는가, 그건 아니다. 그렇다고 똥고집 똥강아지를 설득해 사료 먹이기를 성공했는가, 그건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이미 첫 입부터 나트륨 맛을 알게 된 녀석에게 생사료를 먹이는 건 미션 임파서블보다 더 어려웠다. 실제로 많은 훈련사들의 조언에 따라 굶겨보라고 해서 3일 넘게 굶겨 봤지만 녀석은 절대 먹지 않았다. 그래서 찾아낸 절충안이 캔참치를 사료에 섞어주는 것이었다.


사실 그것도 주면 다 먹지도 않고 지가 굶어 죽기 직전까지 참았다가 억지로 먹는 거였지만 그게 어디인가. 알고 보니 곰탱이 자체가 먹는 것에 욕심이 없는 편이었고, 진돗개가 으레 먹는 것에 욕심이 없더라는 말을 아주 최근에 듣고 이제야 안심이 됐다. 곰탱이 말년에는 그마저도 질려서 안 먹기 시작하니 아빠가 아침마다 드시던 사골국에 사료를 말아줬고, 또 어떤 날엔 떡갈비를 먹고 신세계를 맛본 곰탱이에게 떡갈비 한 덩이씩 화식처럼 먹이기도 했다.


식구라는 말은 먹을 식과 입 구자를 써서, 함께 밥을 먹는 사이를 뜻한다고 하던가. 곰탱이가 그 집 딸내미의 빨래더미를 침대 삼아 자기 시작하니 슬슬 다른 가족들과 이부자리를 나누기 시작했고, 곰탱이에게 밥을 먹이기 시작하니 자연스레 곰탱이 밥을 챙기는 게 일상이 됐다.


의식주가 해결된 곰탱이는 점점 가족들의 귀가를 반기기 시작했고, 귀가를 반기는 유일한 존재가 된 곰탱이는 가족들의 세상에서 가장 이쁘고 사랑스러운 막내딸이 되었다.


그러니 곰탱이를 친척에게 주려고 길을 떠나던 차 안에서 오빠가 곰탱이를 버리지 말라며 끌어안고 울어도 나는 그저 웃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엄마의 태도는 강경했고, 그런 엄마를 아빠는 묵인했지만, 곰탱이를 그 집 베란다에 놓고 우리끼리 밥을 먹고 집에 갈 준비를 할 때에도 곰탱이 없이 집에 가는 걸 생각하지 않았다.


역시나 엄마는 베란다에서 곰탱이를 꺼내 다시 차에 태웠다. 엄마는 그 당시를 이렇게 회상하셨다.


“그때 곰탱이가 베란다에 가만히 앉아서 말썽도 안 부리고 창문 너머로 나를 아련하게 쳐다보는데 도저히 그냥 두고 올 수가 없었어.”


곰탱이도 알았겠지. 그 어리고 작았던 아이가 자길 두고 떠나려는 건지, 아니면 빨리 집에 가고 싶어서 얌전히 기다리는 건지는 몰라도 어쨌든 자길 두고 가지 말라는 신호를 보낸 것이리라.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 중 하나를 꼽자면 그날 그렇게 곰탱이를 다시 데려온 것이라고 엄마는 말씀하셨다. 왜냐, 곰탱이를 정식으로 가족으로 받아들인 이후로 가족관계에 생긴 금이 메꿔졌기에.


곰탱이와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엄마와 아빠가 싸우는 빈도가 눈에 띄게 뜸해졌다. 술을 마시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도 했던 아빠도, 하루하루 바쁘게 치이는 일상에 제정신을 유지하기도 바빴던 엄마도, 지독한 사춘기에 접어든 오빠와 나도. 우리 모두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곰탱이를 위해 귀가했고, 곰탱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해 모였다.


곰탱이가 우리를 살렸다고 우리는 말하곤 한다. 우리 가족의 중요한 위기 순간은 늘 곰탱이 덕분에 극복할 수 있었다. 정신적 버팀목이자 우리로 하여금 가족을 포기하지 않는 마지막 보루였다.


곰탱이가 떠난 지 6개월이 훨씬 넘은 지금도 우리는 때때로 곰탱이 얘기를 꺼낸다.


갑자기 문득. “곰탱이 지금 일어났나?”

그러면, “벌써 일어나서 여기저기 냄새 맡고 있을 거야.”


아빠는 이따금 내가 혼자 삼겹살을 구워 먹고 있으면 씨익- 웃으면서 “너 혼자 먹지 말고 곰탱이도 좀 줘“라신다. 그럼 나는 ”곰탱이 벌써 맥였지“라며 응수한다.


곰탱이가 아파트집이 아닌 시골집에서 산지는 벌써 거의 10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여전히 아파트 현관문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면 어느 방 안에 있던 곰탱이가 신발장까지 뛰어올 것만 같다. 현관문을 열고서도 어느 방 안에서부터 뛰어나오는 곰탱이의 타닥타닥- 발톱소리가 이명처럼 들린다.


보고 싶다. 쓰다듬고 싶다. 심심하다며 날 재촉하는 검고 꽉 찬 눈동자를 마주 보고 싶다. 날 베고 누운 너를 꼭 안고 싶다. 마음껏 뛰고 싶어 먼 곳을 바라보는 너와 함께 숨이 막히도록 뛰고 싶다.


우리 가족. 우리 똥강아지. 우리 가족의 중요한 위기 순간은 늘 곰탱이 덕분에 극복할 수 있었지. 이제 우리는 가족의 행복한 순간에 항상 곰탱이를 추억하고 있다.


2011년 1월 18일. 때는 연아의햅틱을 쓰던 시절. 곰탱이는 여름이면 제일 서늘한 저 자리에서 저렇게 엎드려 있는 걸 좋아했다. 이제보니 어릴 땐 코가 까맸구나. 역시 귀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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