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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내 INAE Oct 20. 2023

애견인이었는데 반려인이 됐고, 다시 애견인이 되렵니다

<안녕, 우리 똥강아지>

대여섯 살 때의 좋았던 기억은 둘뿐이다. 어린이집 버스기사님이 짜장면을 비벼주시던 기억과, 시골 할아버지집에 가면 옆집에 살던 누렁이가 항상 날 향해 달려와 안아주던 기억.


듬직한 황구였던 누렁이와 언제 인사해서 언제 그렇게 친해졌는지는 생각나지 않지만 나보다 덩치가 컸던 누렁이가 거의 내 인생에 첫 친구였다. 할아버지집에 도착하자마자 집안 어른들께는 인사하지 않아도 마당 끝에 놓인 연못 너머에 날 보고 환히 웃는 누렁이를 부른다. 그럼 누렁이가 달려왔다.


그때 누렁이는 앞발 하나를 절었다. 발목뼈가 훤히 드러나 빨간 앞발로 깨금발을 하며 내게 달려왔다. 누렁이의 주인인 옆집 할아버지는 집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판잣집에서 누렁이를 풀어놓고 키우셨는데, 어쩌다 보니 교통사고가 나는 바람에 누렁이 발이 그렇게 됐다고 했다. 옆집 할아버지의 주머니사정은 잘 모르지만 옛날엔 동물이 다치면 병원에 가는 게 아니라 죽게 내버려 뒀거나 바로 죽였으니, 누렁이는 용케 살아 내 친구가 됐던 것.


난 누렁이가 좋았다. 누렁이는 내게 잘해줬다. 우린 보폭이 맞았고, 뭐든 함께 있는 순간이 좋았다. 정확히 기억할 수 없어도 누렁이를 생각하면 좋았던 느낌만 기억난다.


어느 날, 아무리 불러도 누렁이가 나타나지 않았다. 연못을 기웃기웃거리고, 무시무시한 옆집 할아버지의 집도 훔쳐보는데 누렁이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아빠는 누렁이가 또 교통사고에 당해 이번엔 정말 죽었다는 말을 하셨다. 그게 내 인생에 접한 첫 죽음이었다.


그땐 누렁이가 죽었다는 사실에 마냥 슬프진 않았다. 그때 좋아했던 영화 '라이온킹'에서 죽으면 별이 되어 날 내려다본다고 했으니까, 누렁이도 죽어서 날 떠난 게 아니라 저 위 구름에 걸터앉아 날 흥미롭게 내려다보고 있겠지?


나중에서야 들었다. 누렁이를 키우신 옆집 할아버지는 개를 참 좋아하셔서 누렁이가 다쳐도 죽이지 않고 팔자대로 살게 놔뒀는데, 누렁이 다리를 고쳐주겠다며 나선 이에게 누렁이를 맡겼지만 마취제를 맞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고. 결국 죽은 누렁이는 마을 사람들의 보신탕이 됐다고. 불과 20년 전까지만 해도 시골개들의 견생은 이랬다.


그 사실을 듣고, 또 외지인이 거의 없는 우리 시골을 지나다닐 때마다 보던 묶여 사는 수많은 개들을 보면서, 내 인생에 개를 키우는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릴 때 개를 키운다는 건 돈이 많은 사람들의 취미생활 또는 시골 어른들이 복날에 드시는 보신탕용 가축, 이 둘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난 돈이 많지도 않고, 보신탕을 먹지도 않으니 개를 키우는 일은 나와 무관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어쩌다 보게 되는 개들이 귀여워서 시선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시선만 보냈다.


인생이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고, 그랬는데도 곰탱이를 만났다. 그것도 누렁이와 털색만 다르지 태어난 용도는 거의 똑같을 진돗개였다. 사실 순혈 진돗개도 아닐 수도 있다. 똥개지, 그냥.


운명인 것처럼 가족이 됐다. 곰탱이는 우리 가족들의 성격과 똑같이 조용하고, 내성적이고, 개인적이었다. 함께 있어 행복하긴 하지만 혼자 있다고 불안해하지도 않았다. 우린 해주지 못한 게 너무 많은데, 곰탱이는 한 번도 말썽을 부린 적이 없었다. 그나마 큰 말썽이라고 하면 나무로 만들어진 소파 손잡이를 이갈이용으로 써먹었다는 거지만, 그걸 혼낸 가족들은 한 명도 없었다.


곰탱이는 (적어도 우리 가족들에게는) 너무 괜찮은 아이였다.


아마 곰탱이가 아니었으면, 다른 성격의 다른 종의 다른 개였으면 가족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철옹성 같았던 엄마의 마음을 사르르 녹였던 건 다른 어떤 이유에서도 아닌 곰탱이가 곰탱이였기에 가능했다.


그러니 나는, 우리는 곰탱이가 아닌 다른 강아지를 곰탱이처럼 키우지 못할 거고, 곰탱이보다 더 잘해주지도 못할 거다.


여태까지 나는 내가 동물을 좋아하는 줄 알았다. 동물 관련 프로그램을 챙겨보고, 길을 지나다 동물이 있으면 시선을 거두지 않고, 관심도 많아서 각종 책이나 영상을 찾아보는데, 아니라고 할 수 있겠나.


그런데 아니었다. 곰탱이를 떠나보내보니 알았다. 동물을 정말로 좋아했다면 잠깐 슬퍼했고, 그 슬픈 마음에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조언했듯 새로운 강아지를 입양했을 것이다. 곰탱이와 닮은, 곰탱이를 처음 데려왔을 때보다 더 어린아이로 데려와 곰탱이에게 해주지 못해 아쉬운 만큼 더 잘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니었다. 난 동물을 좋아한 게 아니라 곰탱이를 사랑했던 거라고. 곰탱이를 알고 싶어서 동물에 대한 정보를 공부했던 것이고, 동물과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아니라 곰탱이와 함께 살고 싶었던 거라고.


곰탱이와 함께 살면서 동물과 함께 살아가는 삶의 이점을 마음껏 누린 건 사실이다. 말 못 하는 동물이라고 내 말을 못 알아듣지 않는다. 동물들은, 내가 겪어본 하얀 백구는 하지 못하는 말이라도 전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아줬다. 원하는 게 있다고 알려주는 간절한 눈빛, 매일 나가는 산책길도 매번 새로워 신나 덩실대는 엉덩이, 무슨 꿈을 꾸기에 잠꼬대가 저리 심할까 싶은 꿈틀대는 눈꺼풀. 이것들이 나를 살게 했고, 힘든 순간 내내 날 힘내게 했다.


어떻게 욕심나지 않을 수 있겠어. 이렇게 멋진 아이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삶을 어떻게 꿈꾸지 않을 수 있겠어.


그래서 누군가 아예 동물을 키워본 적이 없거나, 적어도 손바닥보다 큰 동물을 키워본 적이 없는 사람이 본인이 외롭고 키워보고 싶어서 개를 키우고 싶다고 말하면, 나는 말리고 싶다. SNS에서 유기견들의 입양 공고를 보면서 곰탱이와 닮은 애들에게만 눈길을 주는 지금의 나를 말리듯 말리고 싶다.


나는 이 펫로스가 너무 힘들었으니까. 펫로스란 단어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이 사별을 어떻게 '펫'을 '로스'했단 무미건조한 단어로만 아우를 수 있을까.


네 견생에 전부였던 나였기에 내가 너에게 해주지 못한 게 이렇게나 사무친데, 내 인생에 항상 행복을 담당했던 너였기에 이제 나는 너와의 행복했던 순간을 추억하기만 할 수 있는데. 아무것도 해보지도 못하고 널 눈앞에서 떠나보낸 이 허무함과 죄책감과 상실감을, 난 다시금 겪고 싶지 않다. 그게 너라면 기꺼이 한 번 더 겪겠지만, 네가 아니라면 시작조차 두렵다.


그래도 지금의 2020년대는, 그리고 앞으로는 우리가 처음 곰탱이를 데려와 함께 살던 시대보다 반려견 문화가 더 발전됐다. 어디든 중대형견을 산책시켜도 이젠 이상하게만 바라보지 않고, 반려견을 바라보는 시선도 예전보다 훨씬 다정하게 바뀌었음을 느낀다. 사람들도 강아지를 가족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훨씬 더 많은 공부를 하고 준비를 한다. 부럽다. 부러워 죽겠다.


물론, 반려견들이 앞으로 더 많아짐에 따라오는 사건사고들도 많아지고 있다. 동정과 사랑이 책임감을 앞선 반려인들과 그로 인해 본능을 숨기지 않는 개들이 늘어나고 있는데 이 사태를 해결해야 하는 사회는 시대를 따라갈 준비가 안 된 것 같다.


더불어 펫로스를 겪은 사람들보다 앞으로 겪을 사람들이 더 많아질 텐데, 그에 비하면 펫로스를 겪은 사람은 물론 동물 자체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까지 펫로스에 대해 큰 위기감을 느끼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요즘엔 펫로스 전문 심리상담기관도 생겨나고 있는 추세지만 아직 멀지 않았나.


반려동물을 키우는 문화가 점점 확대된다는 건, 그만큼 반려동물을 잃는 사람들도 많아진다는 뜻. 그러니 우리는 펫로스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애견인에서 반려인으로, 그리고 다시 애견인으로 돌아간 나는, 조금씩 덤덤해지고 있을 뿐이다. 가슴에 난 구멍을 오가는 찬바람이 처음엔 매섭게 느껴지다가도 지금은 조금 소름이 끼칠 뿐. 근데, 이 구멍을 메꾸고 싶진 않다. 비워진 이 공간마저도 곰탱이의 존재감 같아서.


그러니 누군가 이런 나를 보고도 새로운 가족을 받아들여야만 하겠다면 꼭 약속해 줬으면 좋겠다.


당신이 이 아이의 집이 되어주길. 누구도 함부로 들어올 수 없도록 지켜주시고, 집안에서도 예의를 지킬 수 있도록 지켜주길. 너무 예쁜 '내 새끼'일뿐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길.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보다 수명이 짧은 아이의 숨이 멎는 그날까지 최선을 다해, 후회 없이 사랑해주길.


2021년 8월 29일. 곰탱이 아래앞니가 뽑혔다. 말은 또 어떻게 알아듣고 계속 ‘아-‘를 하는데, 이빨 빠진 빙구 같아서 너무 귀여웠다. 우리 가족이 가장 좋아하는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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