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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내 INAE Oct 19. 2023

나의 반려견에게 나는 반려인이었을까

<안녕, 우리 똥강아지>

그런 생각이 든다. 곰탱이는 우리 가족에게 완벽한 반려견이었다. 그런데 과연 곰탱이는 나를 그렇게 생각해 줄 만큼 나는 곰탱이에게 좋은 반려인이 되어줬을까?


지금이야 많은 반려견과 반려인들이 산책을 숙명처럼 생각하고, 사람이 집사를 자처하며 동물과 함께 사는 삶이 갈수록 개인화, 고령화되는 인간사회의 이상향인 것처럼 여겨지고 있지만, 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 지금처럼 목줄을 메고 사람과 함께 산책을 나온 개들을 종류별로 볼 수 있다거나 꽤 잘 사는 사람이 아니면 동물을 한 마리 이상 키울 수 있다는 걸 상상도 하지 못했다.


특히 티컵 강아지가 유행이던 시절에 중-대형견을 아파트에서 키운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상식 밖의 일이었다. 게다가 그게 시골이나 공장 마당에 짧은 목줄로 메어 경비견으로 키워지다가 어느 정도 살이 차오르면 잡아 먹히는 게 견생의 운명이었던 진돗개를 아파트에서 키운다?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죄인이던 시절이었다.


산책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그때는 다들 그랬다. 강아지를 산책시킨다는 아이디어 자체가 강아지를 키우는데 필수인 시절이 아니었다. 보통의 소형견들은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된다는 인식이 많았고, 중대형견들은 애초에 묶어놓고 키웠다. 그때도 유명한 강아지 전문 훈련사가 종종 있었고, 틈틈이 방송에도 나왔지만, 대부분의 반려인들은 올바르게 키우는 방법이 뭔지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우리도 그랬다. 곰탱이를 처음 데려온 2000년대 후반부터 쭉. 아무래도 진돗개다 보니 기본적으로 원맨독의 성향이 강했고, 겁도 많아서 가족 외의 그 어떤 인기척에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미친 듯이 짖었고, 어릴 때는 이갈이 시기와 겹쳐 입질도 있었다.


인간에겐 다행이고, 곰탱이에겐 미안한 점은, 곰탱이는 단 한 번도 진심으로 문 적이 없었다. 산책도 안 나가고 주중에는 내내 홀로 있어야 해서 지루하기 짝이 없었을 텐데. 지금 방영되고 있는 많은 반려견 행동 교정 프로그램들을 보면 곰탱이와 같은 환경에서 자라 지독하게 물고 짖고 사고 치는 문제견들을 보다 보면 곰탱이는 아주 보살이었다.


‘우리 애는 안 물어요, 우리 애가 이렇게 똑똑해요’라는 억척스러운 부모처럼 말하고 싶진 않지만, 정말로 곰탱이는 배변 훈련을 시켜본 적이 없는데도 배변패드를 깔아주니 알아서 거기에 맞춰 볼일을 봤다. 정확한 훈련법을 몰랐는데도 ‘앉아’와 ‘기다려’를 바로 할 줄 알았다. 낯선 인기척에 아무리 험하게 짖어도 그만하라고 하거나 다른 방에 들어가면 금방 진정했다. 사실 이것만 해도 말도 안 통하고 본능도 다른 사람과 개가 함께 살아가는데 하나 불편한 게 없다.


단지 그게 인간에게만 불편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곰탱이는 입질이 끝난 시기부터는 틈만 나면 베란다에 나가 바깥을 바라보았다. 13층이던 집에서 개미보다 작은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게 인간이 TV를 보는 것만은 못하겠지만 그래도 그게 유일한 취미이지 않았을까. 하지만, 지금도 진돗개가 지나가면 겁을 먹는 사람들이 많은데 더 심했던 그때 곰탱이를 데리고 산책을 나갈 수는 없었다. 아파트 단지는 작고 노인이 많으셨기에 혹시나의 사태를 방지하는 것보다 혹시나의 사고를 원천 차단하려 산책을 데려가지 않았다.


한 번도 산책을 다녀본 적이 없던 곰탱이는 당연히 산책을 나가자며 칭얼거리진 않았다. 다만… 자해를 시작했다.


아무것도 몰랐던 가족들은 그저 피부병인 줄 알았다. 자기 몸에 난 털을 다 뜯어먹고, 하루종일 얼굴을 앞발로 긁어댔다. 저러다 가죽까지 벗겨내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병원에 데려가 약도 처방받았고, 곰탱이 역사상 가장 무섭게도 위협하며 약 먹기를 거부했지만 꾸역꾸역 먹였는데도 낫질 않았다. 그즈음 곰탱이는 털이 하나도 없는 스핑크스 고양이 뺨치게 빈 가죽이 훤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게 너무 미안했던 17세의 나는 목줄을 메고 산책 나가기는 무섭고 그렇다고 집안에만 있는 곰탱이에게 기분전환을 시켜주고 싶어서 아파트 복도만이라도 나섰다. 복도식 아파트 중에서도 가장 끝에 살아서 복도를 제 집 마당처럼 사용할 수 있었고, 그 층에 사는 사람들도 별로 없었기에 가능했다. 곰탱이는 짧은 복도와 엘리베이터 냄새를 맡고, 비상계단 냄새를 맡았다. 많이 나가봤자 5분도 채 되지 않았지만 곰탱이는 고맙게도 내가 들어오라고 하면 바로 집으로 들어갔다.


그러다 2015년 운명의 시간이 다가왔다. 친할머니의 재산을 정리하면서 아빠가 시골땅을 증여받으셨다. 꽤 큰 평수였지만 맹지여서 가치도 없고 쓸 수도 없는 땅이었다. 인접한 땅의 주인에게 몇 푼이라도 받고 팔아 살림에 보탬을 할 수 있었지만 엄마의 생각은 달랐다. 인접한 땅의 주인과 거래를 해 길을 내어 조그만 집을 짓기로 한 것이다.


처음엔 평생 시골에서 밭일을 하며 살고 싶다는 아빠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서였다. 진짜 길을 내고 조경석을 깔고 집을 짓기 시작하면서 도시에서 우울하기만 했던 아빠의 표정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아빠가 직접 용접을 하며 기반을 다지고 있는 집터에 곰탱이를 데리고 갔다. 그날, 그렇게 활발하게 뛰어다니는 곰탱이의 모습을 처음 본 가족들은 생각했다.


집이 지어지면 곰탱이도 시골집에서 살게 해야겠다.


평생 잘한 결정 중 또 하나다. 곰탱이는 시골집에서 살기 시작하면서 상태가 눈에 띄게 좋아졌다. 지속적인 자해로 피부염이 만성이 되긴 했지만 덜 긁고 자기 몸을 씹는 건 아예 멈췄다. 곰탱이의 털이 다시 자라나기 시작했고, 심지어는 밥맛도 좋아졌는지 처음으로 살이 통통해졌다. 1년 조금 넘었을 때 곰탱이는 어릴 때 모습 그대로에서 조금 더 예뻐진 모습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때가 곰탱이 나이 9-10살이었다. 노견이 되어서야 반려견다운 삶을 누릴 수 있게 됐다는 건 곰탱이에게 좋은 일이었을까? 그나마 행복한 말년을 보낼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나는 말할 수 있을까?


곰탱이를 처음 본 순간부터 떠나간 그날까지 내 눈에 곰탱이는 항상 너무 예뻤다. 이렇게 예쁘게 생긴 진돗개를 본 적이 없다고 여기저기 자랑하고 다닐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 이제와 곰탱이가 아파트에 살 때 찍어놓은 사진들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당시의 내겐 예쁘기만 했던 당시의 곰탱이가 마트에 파는 생닭처럼 추워 보여서.


슬슬 사람들이 반려견과 산책을 다니고, 반려견 전용 음식이 팔리고, 여행을 가든 출근을 하든 어딜 가든 항상 반려견과 함께하기 시작했다. 그즈음부터 나도 돈을 벌기 시작해 어딜 가도 곰탱이가 좋아할 만한 간식이 보이면 사게 되고, 조금이라도 더 편해 보이는 하네스를 사게 됐다. 조금만 돈을 더 벌어 차를 사면 제일 먼저 곰탱이와 함께 바다에 놀러 가고 싶었다.


내 앞에서 엉덩이를 흔들며 산책을 하고 있는 곰탱이를 보면서 속으로 ‘언니랑 딱 5년만 더 같이 살자’며 얼마나 빌었는지 모르겠다. 그동안 해주지 못한 것보다 배는 더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다.


곰탱이는 그렇게 하루하루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예뻐지더니 가장 예쁜 날 숨을 거뒀다.


변명하고 싶지 않다. 시절이 그랬다고 해서 내가 나쁜 반려인이 아닌 건 아니니까. 얼굴도 모르는 이웃들이 불편해할까 봐, 혹시나 곰탱이가 누군가에게 짖다가 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무것도 해보지도 못하고 곰탱이 견생의 절반 이상을 불행하게 보냈으니까. 시골에서 산책을 다니던 때와, 그 이후로 이따금 아파트집에서 머물면서 산책을 다녔을 때를 생각해 보면 곰탱이는 리드줄 끝에 나를 믿고 있었던 것 같다. 아무에게도 관심 주지 않았고, 내가 멈추면 바로 멈춰 내 옆에 착 붙어있었으니까. 그게 더 속상하다. 그런 아이인 줄 진작에 알았더라면.


그래서 난 곰탱이가 마냥 보고 싶으면서도 마냥 미안하다. 사람이 죽으면 먼저 떠난 반려견이 마중을 나온다는 말이 있는데, 그것조차도 언감생심 바라지 못하겠다. 내가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그때까지 곰탱이가 마냥 날 기다리길 원하고 싶지 않다. 어디엔가 있다면 해보지 못한 만큼 더 뛰어다니고 더 많은 냄새를 맡고 더 많은 동물들과 놀고 있으면 좋겠다.


곰탱이는 날 어떤 반려인으로 기억할까. 마지막 순간 내 얼굴을 보면서 말을 할 수 있었더라면 곰탱이가 마지막으로 내게 해준 말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곰탱이에게 어떤 반려인으로 기억되고 싶을까? 어떤 말을 듣고 싶었을까?


곰탱이는 내게 너무 예쁜 동생이었지. 마지막으로 곰탱이에게 해준 말이 “꼭 언니 딸로 태어나줘”였는데. 우리 똥강아지.


2015년 11월 18일 수요일. 곰탱이 원숭이 시절. 시골집이 지어지고 있던 중이라 시골과 아파트를 왔다갔다 했는데, 이래봬도 이때부터 솜털이 다시 나기 시작하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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