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어제 6월 19일 신촌에서 있었던 브런치 무비 패스 시사회를 통해 영화 '칠드런 액트'를 보고 왔습니다.
작품을 만나보기 몇 주 전부터 시놉시스나 캐스팅 등 영화 정보를 찾아보면서 기대를 정말 많이 했던 작품이에요. 또, 동명의 원작 소설이 있다는 것 까지 듣고 어느 정도 각본은 일정 수준 이상이겠다고 생각도 했었습니다. 또, 영화 배급사 측에서 준비해주셨는지, 투명 책갈피랑 영화와 관련된 이야기들을 담은 도록을 하나 만들어서 주셨어요. 17년에 나온 작품인데 여러모로 많이 공을 들여서 스크린에 올리게 된 작품이구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너무 큰 기대를 했었나 봐요. 영화를 보며 만족스러웠던 점들도 있지만, 그만큼 아쉽고 계속 마음에 남는 부분들도 많았습니다.
영화 이야기에 앞서 제목에 대해서 먼저 짚고 넘어가자면, 영화의 원제는 The Children Act입니다. 제목은 실제로 존재하는 영국의 아동법을 의미하며 한국의 청소년 기본법에 대응하는 것 같아요. 원작 소설은 1989년의 영국 아동법 법안을 기반으로 쓰였다고 합니다. 매 번 영화 제목을 보면서 하는 말이지만, 저는 국내 개봉 제목을 정할 때 음차를 하는 것이 꼭 필요한지 잘 모르겠어요. 물론, '번역은 반역'이라는 말도 있지만 번역을 했을 때 음차를 할 때보다는 본디 의도한 메시지를 더 잘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어떤 경우에는 음차의 결과물이 그 의미를 이해하기 더 어려울 때도 있거든요. 그래서 번역이 어려웠다면 지금 상영 중인 RBG의 젊은 시절을 다룬 모 영화와 같이 우리말 제목을 새로 짓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엠마 톰슨이 연기한 영화의 주인공 중 하나인 피오나 메이는 아동 복지와 관련한 심리를 담당하는 가정법원 판사입니다. 직업의 특성상, 당연하게도 피오나에게는 단 한 번의 선택으로 다른 이의 인생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화를 보기 전부터도 '법이라는 객관적 도구로 내린 판결로 인해 삶에서의 개인적이고 심리적인 갈등을 마주하게 되는 판사의 모습'을 그려낸다는 것 자체에서 영화가 꽤나 매력적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피오나 메이 판사의 캐릭터 설정은 많은 애정을 가지고 이루어졌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메이 판사의 캐릭터를 정의할 때, 영화 속에서 보인 행동과 소품 등 캐릭터 설정 중 단 하나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법정에서 심리를 진행하는 모습과 퇴근 후 늦은 새벽까지 밤을 새우며 컴퓨터 앞에서 일을 처리하는 모습, 책상 위에는 언제나 사건 파일이 가득 올려져 있는 모습 그리고 영화 초반에서 보여준 것처럼 자신이 맡은 사건에 대해서는 너무 인간적으로 대하지 않으려고 하는 모습 등에서 프로의 면모를 엿볼 수 있습니다. 또한, 규칙과 기준이 중요한 직업적 특징처럼, 메이는 몇 가지 정해진 일상의 모습을 보여주는데요. 언제나 퇴근 후에는 곧바로 거실의 피아노 옆 카펫에 가지런히 신발을 벗는다는 것, 감정을 달래기 위해서 음악을 찾는다는 것 등 피오나 메이는 정해진 루틴에 따라 하루하루를 보냅니다. 또한, 피오나 메이가 특정 사건을 계기로 스스로의 삶의 방식에서 어긋나는 모습들을 보여주게 함으로써 영화의 주된 갈등을 더욱 부각하는 연출 또한 매우 인상 깊었습니다.
하지만, 영화를 보며 좋았던 점보다 아쉬웠던 점이 더 컸습니다. 영화의 좋고 나쁨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각본입니다. 영화의 의의나 영상미, 배우들의 연기력 등이 아무리 뛰어날 지라도 각본이 빈약하면 관객들은 그 영화를 절대 높게 평가하지 않을 거예요. 제가 느끼기에는, 이 영화는 앞부분의 판사로서의 피오나의 이야기들과 이후에 인간으로서 겪게 되는 문제들 사이에 연결이 부족했습니다.
이 영화는 오리지널리티가 있는 작품입니다. 관람 전 미리 책을 읽어보지 않은 관객들에게는 작품 속의 주인공과 이야기는 낯선 대상입니다. 요즘 인기 있는 대형 프랜차이즈 영화들은 하나의 히어로를 두고 적게는 트릴로지 많게는 펜탈로지까지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에, 영화의 세계관과 그 속의 인물들과 친해지는 과정이 천천히 이루어질 수 있지요. 하지만, 대부분의 영화는 그렇지 않습니다. 짧게는 1시간에서 길게는 3시간이라는 제한적인 시간 동안 인물과 그들의 배경이 충분히 소개가 되고 이야기의 기승전결이 모두 이루어져야 합니다. 즉, 이런 영화가 사랑받기 위해서는 관객들로 하여금 짧은 시간 동안 한 편 만으로 영화 속의 캐릭터들에게 매력을 느끼고 그들의 삶에 공감할 수 있도록 이끄는 힘이 필요해요. 인물들에게 공감해야 이후에 일어나는 사건의 진행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따라갈 수 있으니까요. 이 부분에서 영화와 소설의 전달 방식의 차이가 크게 벌어지는 것 같습니다. 소설을 통해서는 미묘한 감정 변화까지도 글로 표현할 수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영화에서는 관객들의 눈에 보이는 게 전부입니다.
이 작품 한 편만을 두고 보았을 때, 각각의 문제 상황에서 주인공들의 선택은 공감하기 어려웠습니다. 캐릭터 설정과 이용 방식에서 비롯한 문제라고 생각해요. 피오나 메이라는 한 캐릭터는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지만, 나머지 캐릭터들은 매우 평면적입니다. 이 작품의 경우 모든 사건은 한 인물의 독단적인 선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러 인물 사이의 상호작용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파오나 주변의 인물들에게 공감하기도 애정을 갖기도 어려우니 당연하게도 이 인물들이 만들어내는 사건들에 공감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나 이런 점이 힘들어"라며 감정을 표현하는데, 과정도 빌드업도 부족하다 보니 그게 온전히 전달되지는 않아요. 같은 이유에서, 캐릭터들이 이야기 속의 드라마를 위해 기계적으로 움직인다고도 느꼈습니다. 피오나의 남편 잭은 그저 갈등의 유발과 해소를 위한 역할만을 했고, 주인공 잭 또한 사건의 발달에서부터 절정까지의 이야기를 위해 등장했다가 퇴장하는 듯합니다. 간결하게 이야기하자면, 상영 내내 "쟤네 왜 저러지?"라는 질문이 머릿속에 가득했습니다.
등장인물들의 감정선을 따라갈 수 없으니 영화 속 에피소드들은 자연스레 서로 연관성 없게 느껴집니다. 영화에서는 여러 사건들이 등장합니다. 메이 판사가 다루게 되는 여러 재판들이나 그가 겪는 가족 내에서의 문제라든지, 영화는 여러 에피소드들을 다룹니다. 이 일련의 사건들을 하나의 주된 메시지가 관통해야 영화의 주된 메시지가 전달되는데 이 영화에서는 그렇지 못해서 각각의 일들이 따로 논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인지 매 편 마다 다른 이야기를 다루는 법정 드라마를 보는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주인공들에게 공감하지 못했기 때문에 당연히도 충격적이고 울림을 주었어야 하는 장면들에서 저는 웃음이 나왔어요. 상영관에서 종종 피식거리는 소리가 들렸는데, 저만 그렇게 느낀 것은 아닌 듯합니다. 캐릭터들의 감정선에 잘 따라가신 분들께는 휴먼 드라마로써의 제 역할을 톡톡히 해냈겠지만, 제게는 그저 아침 드라마 같은 치정극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집에 도착해서 차분하게 생각해보니, 영화는 '극단적 자유지상주의'를 주제로 했던 것 같습니다. 아내와의 관계에서 충족되지 않는 부분들을 위해 외도를 할 것을 인정받고자 하는 잭이나 종교와 신앙의 자유를 근거로 자신을 죽도록 방치하기를 요구하는 아담 헨리와 이에 동의하는 그의 부모의 모습 등을 보며, 나의 선택 혹은 상호 간의 동의가 사회의 통념과 도덕 체계의 위에 있다고 믿는 점에서 마이클 샌델의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의 아르민 마이베스의 사례를 떠올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이걸 메시지로 담고 싶었는지, 이런 제 해석이 꿈 보다 해몽에 가까운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한편으로는 원작 소설을 읽어야만 이런 궁금증이 시원하게 풀릴까 싶기도 하네요. 기대가 컸던 만큼이나 아쉬운 점들이 자꾸만 생각나는 감상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