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킨슨병 아내를 지극정성으로 돌본 할아버지의 사랑
스물한 살 무렵부터 동경해온 작가님이 있는데, 그분의 어머니가 최근에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파킨슨병이라고 하셨습니다.
파킨슨병은 신경 퇴행성 질환 중 하나인데, 점차 목소리가 나오지 않고, 잘 듣지 못하게 되고, 근육의 강직으로 운동장애 증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작가님은 2년 전, 바이러스를 피해 한가로운 곳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고 하는데, 바이러스가 한 풀 꺾인 그 무렵, 그런 시기에 바이러스에 감염이 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5월이 시작될 무렵, 갑자기 숨쉬기 어렵게 되셨다고 합니다.
영상으로 뵀던, 스케치북 위에 나무와 건물을 느릿한 손으로 색칠하는 어머님은 정말 천사같이 고운 분이셨습니다. 작가님의 작품을 통해 오랜 위로를 건네받았기에 누구보다도 어머님의 평안함을 기원했습니다.
이윽고 문득, 보고 싶은 한 분이 떠올랐습니다. 파킨슨병을 앓던 아내를 지극정성으로 돌봤던, 마준성 할아버지였습니다.
2016년, 취재로 인연이 닿게 된 마준성 할아버지는 당시 카메라의 매력에 푹 빠져있던 분이셨습니다. 정훈장교로 오랫동안 군 생활을 했던 할아버지는 퇴역 후 캠코더를 접하고부터 촬영의 매력에 빠졌다고 하는데, 그 세월이 무려 25년이라고 했습니다. 젊은 사람도 하기 어려운 영상 편집 실력도 수준급이셨는데요.
할아버지의 첫 작품은 가족을 촬영한 영상이었습니다. 지금은 미국에 사는 큰 딸과 손녀의 모습이 담겨있었습니다. 할아버지는 가족과 나들이를 가서도 카메라를 손에서 놓지 않았습니다. 할아버지 영상 속 단골손님은, 아내 백정자 할머니입니다. 그런데 해가 갈수록 영상 속 할머니의 건강이 좋지 않아 보였습니다.
28년 전, 할머니는 불치병 진단을 받았습니다. 손이 떨리는 증상으로 시작해 운동 능력을 점점 잃게 되는 파킨슨 병이었습니다. 온몸이 굳어져 표정도 지을 수 없고, 목소리도 잃었지만, 할아버지의 말은 알아듣는다고 했습니다. 28년 간 병마와 잘 싸워줬던 아내는 9개월 전에, 아예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투병 중인 아내 대신해 요즘은 할아버지가 집안일을 도맡아 하고 있습니다. 할아버지는 식사를 할 때도 항상 아내를 마주 보며 앉습니다. 눈을 맞추며 아내와 대화를 하기 위해서랍니다.
"나 밥 먹어요, 밥 먹고 있어요~ 오늘은 진짜 방송국 카메라가 오니까 눈도 잘 뜨고 대답도 잘하고."
식사가 끝날 무렵, 할아버지 댁으로 요양보호사가 찾아왔습니다. 9년 전부터 하루에 세 시간씩, 할아버지를 대신해서 할머니를 돌봐주고 있습니다.
요양보호사와 교대하고 난 뒤, 할아버지는 카메라를 들고 집 근처 강가로 향합니다. 밤 사이 내린 눈으로 바뀐 강가의 경치를 카메라에 열심히 담습니다. 멋진 풍경을 담으며 즐거워하던 할아버지는 금세 우울해했습니다.
"이렇게 찍긴 찍어도 아내 생각하니까 눈물이 나네, 함께 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래도 사시사철 바뀌는 풍경을 이렇게 열심히 찍는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바로 아내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인데요.
"촬영해왔습니다. 오늘 찍어온 거. 한탄강에 눈 와서, 멋지죠?"
거동이 불편한 아내를 위해 이렇게라도 바깥세상을 보여주는 할아버지의 헌신적인 사랑에 취재하는 동안 몇 번이고 마음이 뭉클했습니다.
취재 중, 멀리 사는 막내딸도 오랜만에 집을 찾아왔습니다. 딸은 수척해진 어머니를 보자 목이 멥니다.
"엄마는 사랑한다는 소리 진짜 많이 해주시고, 몸으로 부대끼는 걸 정말 좋아하셨어요. 이제 점점 지나니까 엄마랑 대화가 안 되는 게 가장 힘들었어요. 아버지가 어머니가 아프시고 난 다음부터 조금씩 성향이 바뀌기 시작하셨어요. 엄마가 아프신 반면에 아빠가 그렇게 사랑해 표현을 해주시니까 그나마 마음이 조금 더 따뜻해졌어요."
무뚝뚝하기만 했던 아버지가 다정다감하게 변한 게 딸은 놀랍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염원이 하나 있다면, 기적이 어머니에게 일어났으면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예전처럼 함께 걷고, 함께 웃고, 즐겁게 이야기 나눌 수 있기를 희망하지만
요즘 들어 아내는 꿈속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고 합니다.
"점점 자는 횟수가 늘었어요. 거의 하루 종일 아니면 18시간 이상 씩 자는 경우도 있어."
남들은 이만큼 했으면 됐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아내가 없는 그날은 상상할 수 조차 없다고 했습니다.
요즘 부쩍 기운이 없는 할머니를 위해, 할아버지는 특별한 이벤트를 준비했습니다. 오래전 할머니와 데이트했던 장소들을 촬영해 영상으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할아버지가 찾은 곳은 할아버지의 모교인 k대학교 캠퍼스였습니다. 호수 위 무지개다리는 할머니와 데이트를 하며 사진을 찍은 추억의 장소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아마 이쪽에 아 이쪽이다. 이쪽에 서고 여기가 오늘날의 집사람 그 당시에는 애인 이렇게 해서 사진을 찍어달래서 사진 찍었거든."
할아버지는 눈 닿는 곳마다 옛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고 말했습니다. 등나무 아래 벤치도 잊을 수 없는 장소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둘이 아내하고 앉으면은 같은 과 애들이 눈을 힐끗힐끗 보면서 부러운 듯이 쳐다도 보고 가고."
그 옛날, 이곳에서 사랑을 고백했다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할아버지의 첫사랑이랍니다.
할아버지 그 시절 둘이서 바라봤던 풍경을 카메라에 열심히 담았습니다.
시간은 화살 같고, 좋은 건 다 짧게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매 순간이 아쉬운데요. 작은 침대에 갇혀 지내는 아내는 오죽할까-
그래서 할아버지는 아내의 눈이 되고, 다리가 돼주고 싶답니다. 그래서 더 많이 보고, 기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며칠 후, 할아버지가 영상 제작을 완성했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제작진은 할아버지를 도와 텔레비전을 안방으로 옮겼습니다. 할아버지는 아내분이 잘 볼 수 있도록 자세를 고쳐준 뒤에 준비한 영상을 틀었습니다.
화면 속에는 50년이 지나도 그대로인 대학 캠퍼스를 시작으로 두 분의 추억이 가득 담긴 장소가 순차적으로 흘러나왔습니다.
"여기 우리 자주 데이트하던 남산타워, 다음에 꼭 같이 오면 좋겠어요."
이어서 준비된 깜짝 선물, 바로 막 미국에 있는 손녀딸의 영상편지였습니다. 몰라보게 자란 손녀의 모습에 할머니는 눈을 떼지 못합니다. 다음은 막내딸 가족의 영상편지, 10년 전 결혼한 막내딸과 사위는 이제 두 아이의 부모가 되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픈 거 빨리 낫게 해 주세요. 그리고 할머니 할아버지 사랑해요."
사랑하는 가족의 모습을 보고 있는 이 순간, 할머니는 어떤 생각을 하실까-
마지막으로, 할아버지의 영상편지입니다.
"나는 당신 사는 날까지 항상 당신 곁에 지켜서 당신과 대화도 나누고 싶고 당신의 그 예쁜 얼굴도 보고 싶고 또 눈, 암호로 정해놨던 깜빡깜빡하는 것도 보고 싶고 그래요."
52년 전 그날처럼, 평생 곁에 있어주겠다는 할아버지의 고백. 쉽지 않은 세월이었지만 이 정도면 참 잘 살아왔다고 합니다. 어떤 순간에도 할머니를 절대 잊지 않겠다는 할아버지의 약속, 그 진심이 할머니의 눈에 닿고, 마음에 전해졌습니다.
할아버지의 소망은 단 하나입니다. 아내보다 하루만 더 살 수 있기를, 그래서 아내의 마지막 순간을 든든히 지켜낼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