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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다 디자인이야!"

진정한 디자이너

by 은옥

학교를 졸업하고 다듬어지지 않은 열정이 활화산 마냥 폭발하던 나의 사회초년생 때 만난 말이다.


회사에 입사해서 새내기라는 이유로 자잘한 잡일이 내 소중한 경력을 갉아먹게 하지 않으리라는 마음이 학생 때부터 있었다. 학교 졸업쯔음 고맙게도 주변의 추천으로 대기업 취업의 기회들이 있었으나 매번 거절했다.

주변에서는 가뜩이나 내 전공을 살려 취업하는 것도 별따기라는데 대기업으로 들어가는 자동 에스컬레이터에서 역으로 뛰어내려온 셈이니....... 나중에 후회막심할 것이라 장담들을 했다. (다행히 여전히 후회는 없다.)


내가 원하는 것은 '내로라하는 회사에 입사하여 바닥부터 시작해야지.'가 아니라 처음부터 내로라하는 프로젝트에 주인공이 되고 싶었다. 내 인생의 고속도로는 대기업이 아니고 내가 원하는 일을 빨리 시작하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운 좋게도 대기업의 광고를 대행하는 중견 광고회사에 들어가 국내외 글로벌 기업들의 광고들을 제작하는 데에 바로 투입될 수 있었다. 전쟁에 바로 투입되다 보니 선배들보다 두 세배는 더욱 버겁고 CD(creative director)역할의 팀장님께 혹독한 트레이닝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내가 원하던 험한 지름길이었으므로 충분히 감내할만했으며 인정도 받았기에 오히려 즐겼던 것 같다. 내가 사회초년생 때 힘들어했던 것은 이처럼 막중한 프로젝트를 맡아 숨 안 쉬고 일하는 것보다 포트폴리오에는 끼워놓을 수도 없는 소소하고 간단한 작업물들이였다.

(포트폴리오는 디자이너의 실력을 증빙할 수 있는 자료다)


아무래도 내가 회사에 새내기다 보니 그런 것들 대부분은 내게로 왔다. 물론 다른 새내기 동료 직원들에게도 고루 나눠졌지만 내가 욕심도 열정도 컸던 만큼 불만도 컸던 것 같다.

이 불만을 눈치 없이 같은 팀 선배 디자이너에게 풀어놓았다. 디자이너 경력에 포트폴리오는 생명줄 같은데 이런 스티커, 베너 같은 자잘한 디자인으로 뭐 볼게 있을 것이며 막중한 프로젝트 수행 중에 이런 하찮은 것이 껴들어오면 이게 나의 소중한 경력을 갉아먹는 느낌이라고 말이다.

이런 어린 말을 투덜투덜 뱉어놓는 내게 늘 동네 언니 같았던 선배는 정신이 번쩍 드는 따끔한 일침을 가했다.


"은옥씨!!! 사사로운 디자인이 어디 있어? 필요 없는 디자인이 어디있어?

(말이 나올 당시 아파트 놀이터 담장길을 지나고 있었다)

우리가 쉽게 지나치는 저 담장 하나도 디자이너는 어떻게 색을 입히고 어떻게 디자인해야 할까 늘 고민해! 놀이터에 그네 하나도! 저 간판도 저 박스도!......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이 다 디자인이야!!!"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선배가 흥분해서가 아니라 내 앞에 세상이 갑자기 못보던 아니 안보던 시각에서 펼쳐졌기 때문이다. 몇 초 전의 내가 바보 같았다. 선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판타지 영화 속 마냥 무심히 걷고 있던 그 골목에서 수많은 디자이너들이 내게 건네는 메세지와 배려가 소리 없이 뇌리에 울려댔다.

감사하게도 디자이너가 갖추어야 할 새로운 눈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학교에서는 박수 받는 디자인을 위해 공부했다.

회사에서는 큰 수익이 나는 굵직한 프로젝트들의 성공이 박수를 받았다.

나는 그것만을 바라보며 달려간 저 잘난줄만 알았던 , 사실은 우물 안 개구리였다.


그 후로 내게 오는 제작물들에는 하나같이 열의를 다했다. 내 손을 거쳐 나가는 디자인물들은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내 이름을 새겨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 경쟁되는 제작물 중에는 최고로 디자인하겠다는 다짐이 섰다. 나의 노력과 변화는 내가 그토록 갈망하던 때 보다 더 많은 박수로 돌아왔다. 클라이언트들에게 보내는 시안들은 호평을 받기 쉬웠고 회사는 그런 나에게 큰 신뢰를 갖었다. 선배들도 자그마한 일 하나라도 불만 없이 기꺼이 최선을 다해 신중히 대하는 나를 좋게 평가해 주었다. 그러면서 자연히 나의 업무는 큰 프로젝트 위주로 옮겨졌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더욱 겸손해졌으며 세상에 혼자 잘난 것이 없음을 되뇌었다. 내가 편히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많은 디자이너들의 셀 수 없는 훌륭한 작품들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나는 어느 디자이너의 세심하고도 훌륭한 작품에 기대어 글을 쓴다.



직장 선배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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