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견디는 문장들 #149
그늘은 처음엔 안온함이었다. 햇살을 막아주고 비를 피할 수 있게 해 준 커다란 나무. 어린 우리는 그 밑에서 놀고 쉬고 잠들며 자랐다.
그늘은 다정했고 넉넉했고 모든 것을 감싸주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그늘은 방향을 가리는 장막이 되었다.
걸음을 막고 그림자를 흐리게 했다.
그리고 문득 알게 되었다.
이제 나만의 해를 찾아야 한다는 것을
심리학에서는 이를 ‘분리-개별화 과정’이라 부른다.
정신분석가 마가렛 말러는 말한다.
아이의 자아는 부모로부터의 분리를 통해 독립된 개체로 성장한다고
처음엔 떼어내는 것이 고통스럽다.
죄책감과 불안, 눈빛 속의 서운함까지도 감당해야 한다.
그러나 독립은 결국 자신이 되어가는 유일한 길이다.
부모의 그늘을 벗어난다는 건 경제적 자립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건 정서의 독립이고 신념의 자립이며
타인의 기대를 살며시 내려놓는 용기다.
“너는 그렇게 하면 안 돼.”
“우리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이런 말들은 종종 사랑의 다른 이름으로 다가오지만
사실 두려움의 다른 얼굴이기도 하다.
자식이 자신과 다른 길을 선택할까 두려운 마음.
그러나 두려움을 넘어서야
비로소 서로를 진짜 어른으로 만날 수 있다.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는 현대인은 '선택적 전통' 속에 산다고 했다.
더 이상 부모의 가치관을 그대로 물려받지 않는다.
각자 자기만의 삶의 서사를 구성해 나간다.
부모를 사랑하지만 그 사랑이 곧 나의 모든 삶이 될 순 없다.
나는 나의 방식으로 사랑하고 실패하고 성장해야 한다.
부모가 걸어온 길은 내 삶의 나침반이 아니라
참고할 수 있는 한 권의 회고록이다.
과학적으로도 청년기의 뇌는 독립을 위해 설계되어 있다.
전두엽이 완전히 성숙하며
자기 결정과 판단 능력이 강화된다.
이 시기에는 모험을 하고 부모와 갈등을 겪고
자신만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때로는 반항처럼 보이는 태도조차도
자아를 정립하는 본능적 몸부림이다.
그러니 부모의 그늘을 벗어난다는 건
부정이 아니라 성숙이다.
사랑을 모른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을 더 깊이 이해하고 싶다는 신호다.
그늘 밖의 세상은 뜨겁고 눈부시고 때론 너무 거칠다.
하지만 햇살 속에서만
우리는 스스로를 뿌리내릴 수 있다.
그늘에서 벗어난다는 건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는 다짐이 아니라
내가 나의 삶을 책임지겠다는 선언이다.
언젠가 다시 부모를 마주할 때
이제는 기대는 아이가 아니라
함께 나이 든 사람으로 만나기 위해서
부모의 그늘은 우리를 키웠지만 그늘에만 머문다면 자라지 못한다.
그늘에서 나올 때 비로소 묻는다.
"이제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질문이야말로
진짜 어른이 되는 첫걸음이다.
은파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