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 속 생명, 깊은 맛의 노래
남원, 지리산의 품이 부드럽게 감싸는 땅. 춘향과 몽룡의 전설이 흐르고 광한루의 달빛이 지나는 이 고장에는 진흙 속을 헤치고 올라온 생명의 맛, 추어탕이 있다. 남원의 추어탕은 논두렁 진흙 속에서 꿈틀거리던 작고 끈질긴 생명, 미꾸라지로부터 시작된다. 그것은 비에 씻긴 마음 같고 가난했지만 정 많았던 시절의 밥상이기도 했다.
미꾸라지를 푹, 오래도록 삶아 가시 없이 곱게 갈고
토란 줄기와 시래기, 향긋한 깻잎과 부추를 듬뿍 넣어 팔팔팔팔 끓이는 국물이다. 그 속엔 보글보글 끓는 정성이, 훅훅 김을 타고 나는 들깻가루의 구수함이 솥 안에 진득진득 쌓인다. 부드러운 뼛속 고명처럼 풀어진 미꾸라지살, 혀끝에 닿는 부들부들한 살점 사이로 사각사각 토란 줄기의 식감이 뛰어다닌다.
입술이 뜨겁다 싶을 때 한 잎 깻잎이 향긋하게 미소를 짓고 맵싸한 청양고추는 찌릿 속을 쑤시며 정신을 번쩍 들게 한다. 흙에서 올라온 맛인데
왠지 이 국물은 하늘로 통하는 길처럼 느껴진다.
속이 비어 있을 때 더 따뜻하고 허기가 길게 남았을수록 맛은 더 진하다.
옛날, 남원의 들판에 풍년이 들어도 가난한 이들에게는 고기가 귀했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논에서 미꾸라지를 잡아 삶고, 다지고, 끓여 산해진미 못지않은 보양식을 만들었다. 시장통 안 어귀의 작은 식당, 땀 흘리는 아버지, 부지런한 어머니의 젓가락질 속에 추어탕은 집이 되고, 삶이 되었다. 전쟁 같은 하루 끝에 마시는 한 숟갈, 아이를 낳고 기운 빠졌던 날 어머니가 끓여주던 탕
그건, 마음의 힘이었다. 남원 추어탕은 말한다. “무너질 듯 살아온 시간도 괜찮다. 흙탕물 속에서도 생명은 다시 피어나니까.”
진한 국물은 어딘가 모르게 텁텁하지만 따뜻하고
거칠지만 정직하며 묵직하지만 고요한 울림이 있다. 남원의 풍경처럼 추어탕은 화려하지 않다.
하지만 한 숟갈 안에 삶의 내력과 사랑의 결,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오늘도 남원에서는 솥뚜껑이 들썩이고 국물은 삶처럼 끓고 있다. 그 속에서 우리는 배가 아니라 마음을 채운다.
은파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