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경영도, 자금상황도 다 엉망이고 길어야 3년은 버틸까 싶었지만 그럼에도 생각보다 더 급작스럽게 회사가 무너져 내렸습니다. 지난주 화요일, 영국 언론들은 더 바디샵이 경영 악화로 법정관리에 들어갔다는 뉴스를 대서특필 했습니다. 법정관리에 들어감으로써 회사가 이대로 망하는 거냐 아니면 다시 재정비 후 재기를 노리는 거냐 말들이 많았지만, 사실 본사 전 직원들은 뭐가 되었든 대대적인 정리해고 발표가 곧 있을 걸 알게 모르게 다들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제 오후 2시, 본사 직원 중 300명을 노티스 기간 없이 즉시 정리해고 한다는 발표가 나왔습니다. 전 직원의 40%에 해당하는 대규모 정리해고였습니다. 지난 2년 반 동안 봐온 바디샵 경영에 질릴 대로 질려 희망도 동기부여도 없던지라 내심 차라리 정리해고 당하고 비자 위약금 없이 회사를 떠나게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아쉽게도 저는 이번 대규모 정리해고의 대상자가 아니었습니다. 정리해고 대상사자 아니라는 소식에 솔직히 말해 조금, 아니 많이 아쉬웠습니다. 정말 이상하고 어이없는 소리지만 진짜 그랬습니다. 어차피 한 달 반 가량의 월급에 해당하는 비자 위약금을 내고 7월 초에 그만둘 예정이었으니, 위약금 면제나 받고 잘려서 차라리 영국 떠나기 전까지 하고 싶은 일에 도전하며 남은 시간을 가치 있고 뿌듯하게 쓰고 싶었는데 옴짝달싹 못하고 계속 바디샵에 묶여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정말 별로였습니다. 그래도 오늘 다른 동료들과 만나 어제 있은 대규모 정리해고와 바디샵의 미래, 그리고 법정관리를 받고 있다는 게 어떤 뜻인지 좀 더 깊게 생각해 보니 이번에 잘리지 않은 건 잘 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법정관리 시작 후 첫 2주 안에 잘릴 시 회사의 책임이 면제돼, 회사로부터는 어떤 것도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대로 정리해고가 끝이 아니라 7월 전에 또 다른 몇 번의 정리해고가 있을 수도 있기에 그때 잘리길 바래봅니다.
회사가 어떤 기준으로 300명을 상의 없이 골라서 어제 바로 해고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쩌다 보니 같이 일하며 제가 일 잘하고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동료들은 다행히 아직까지는 전부 남았습니다. 저야 정리해고를 바라는 입장이지만, 이 좋은 사람들, 그리고 집 대출이나 아이라는 큰 책임이 있는 사람들은 정리해고 없이 이 어려운 시기 잘 지나길 바랍니다. 부디 회사가 저만 자르고 다른 사람들은 잘 챙겨주길. 제에발 정신 좀 차리고 똑바로 재기 좀 하자 바디샵!
확실히 8월에 영국을 뜨기로 다 계획했고 비행기도 다 끊어 둔지라 오늘 매니저에게 회사가 어떻게 되든 7월 초에는 바디샵을 떠나게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매니저랑 같이 일하는 것도 좋고 팀원들도 다 좋고 회사도 뭐... 나쁘지는 않지만 개인적인 이유로 영국을 떠나게 돼서 그만둬야 하는 입장이라고 말씀드리니 정말 아쉽지만 괜찮다고 그리고 말해줘서 고맙다고 합니다. 또 진심으로 우리의 미래를 응원한다고. 정말 고마운 사람입니다. 비자 위약금 얘기와 함께 아이러니하게도 자발적으로 나가기보다 그전에 회사에서 잘리면 좋은 입장이라고 하니, 어떻게 하면 가장 제게 유리하게 회사를 나가게 될 수 있을지 알아봐 준다도 합니다. 부디 모든 일이 다 바라는 대로 다 잘 되면 좋겠습니다.
정말 말 그대로 영국을 떠나기 전까지는 내일 당장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를 미래를 살게 되겠지만, 그럼에도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하려 합니다. 회사 일은 최소한의 도리만 그리고 남에게 폐 까치 않는 정도로만 집중해서 끝내버리고 매일 남는 시간, 그리고 퇴근 전 후 시간은 제가 하고자 하는 일 혹은 개인적으로 해야 하는 일들을 할 예정입니다. 올해 해치울 일 리스트를 만드는 중인데, 리스트가 꽤 깁니다. 리스트에 있는 일들, 영국 뜨기 전 깔끔하게 다 해치워버리고 그렇게 지금부터 호주로 가는 8월 중순 사이의 시간 동안 많은 것들을 이뤄내 볼 겁니다. 어영부영 갈팡질팡 불안에만 갇혀있다 나중에 이때를 돌아봤을 때 시간만 낭비했다고 후회 않게, 부지런히 해보는 겁니다.
바디샵 소식으로 주위 여러 사람들로부터 걱정 어린 연락을 많이 받았습니다. 분명 스트레스도 받고 있고 쉽지 않은 상황이지만, 예전 군 훈련소에서 화생방 훈련을 받기 전 한 조교가 해줬던 말을 다시 되새겨 봅니다. '아주 불행하고 어렵고 고통스러운 경험도 한 가지 쓸모는 있다. 평생 남을 술자리 안주거리가 하나 느는 거다.' 평탄하기만 하다면 지루하고 재미없을 인생에, 좋던 나쁘던 일상을 벗어나는 사건이 있다는 건, 뭐가 되었든 좋은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