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얼떨떨합니다. 정말 해고되다니. 그렇게 바라고 바랬지만 생각보다 회사 상황이 좋아졌다는 소식에 포기하고 있었는데. 또 이렇게 인생이 바라던 대로 흘러가게 되었다니. 꿈만 같습니다. 해고당해서 기뻐하다니 이게 뭔....이라고 생각하시겠지만 여기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작년 9월, 회사를 다닌 지 2년쯤 되었을 때부터 본격적으로 회사 일이 많이 재미없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뻔한 레퍼토리, 지루한 메일들, 보이지 않는 성과, 방향을 잃은 수뇌부. 더 이상 배울 것도 없고 의미 있는 일 거리도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도통 동기부여가 되지 않아 이게 맞나 싶었습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 올해 2월. 역시나 안으로 곪을 대로 곪은 회사는 법정관리라는 철퇴를 맞았고 그나마 있던 프로젝트들도 다 취소되거나 연기되었습니다. 법정관리에 들어선 이후로는 정말 동기부여가 하나도 되지 않았습니다. 내가 한 일이 쓰일 일이 있을지. 3개월 뒤, 6개월 뒤, 1년 뒤 회사가 있기나 할지. 법정관리에 들어가고서도 정신을 못 차린 경영진 꼴을 보아하니 뻘짓은 계속 이어질 것 같고.
사실 돈과 시간의 양만 보자면 꿀처럼 느껴질지도 모를 시간들이었습니다. 일은 없다시피 한데 월급은 꼬박꼬박 들어오지 누구 하나 쪼아대는 사람도 없었으니까요. 누워서 뒹굴거리는데 하늘에서 돈이 떨어지는격이었습니다. 허나 마음과 정신은 의미 없이 허비되는 시간에 문드러져 갔습니다. 그렇다고 회사 일을 아예 제쳐두고 다른 걸 하자니 팀장 부장님은 어떻게 든 쓸데없는 일이라도 만들어 시켰기에 당장 회사를 떼려 치고 싶다는 마음이 굴뚝같았습니다. 하지만 자발적으로 퇴사한다면 비자 스폰서와 런던 본사 사무실로 옮길 때 받은 막대한 지원금을 뱉어내야 해서 싫어도 버텨야 했습니다. 최소 6월 말까지는 회사에 붙어있어야 돌려줘야 할 지원금 액수가 그나마 감당 가는 한 정도로 내려갔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회사가 절 잘라주기만을 간절히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 회사가 과연 절 해고해 줄까. 전혀 모를 일이었습니다. 다만 법정관리에 들어간 직후 발표난 첫 대규모 정리해고 때는 포함되지 않았고 그 이후 혹시 또 다른 정리해고가 있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3월 본사 미팅에서 회사 재정 상황이 생각보다 좋다 하여 기대를 저버리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팀장님과 부장님 심지어는 부서 이사님께도 어차피 8월에 영국을 떠날 예정이니 혹시 회사에서 정리해고 얘기가 또 나오게 된다면 다른 직원들을 보호하고 저를 먼저 잘라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그렇게 허수아비 마냥 축 늘어져 근근이 버티고 있던 와중, 아니 왜인걸 갑작스레 오늘 아침 본사 직원 중 40명을 모아 미팅을 잡더니 정말 미안하지만 오늘부로 즉시 해고라고 말을 들었습니다. 세상에 마상에. 정말 일어나다니, 정말 해고라니! 날듯이 기뻤습니다. 물론 저를 제외한 모두들은 충격에 빠진 표정이었습니다. 그럴 수밖에요. 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40, 50대의 책임질 것이 많은 당장 매달 월급이 절실한 분들이었으니까요. 다른 동료분들께는 정말 죄송할 일이지만, 제 개인적인 상황으로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습니다. 우선 천만 원가량 되는 지원금을 돌려주지 않아도 되고, 작지만 실업 급여를 조금 받을 수도 있었습니다. 나아가 무엇보다도 더 이상 귀한 시간을 의미 없이 낭비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무척 기뻤습니다. 내가 원해서가 아닌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빠져 시간을 허비하는 것, 정말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얼마나 기운 빠지고 정신건강에 해로운 일인지 알 수 없을 겁니다. 꼭 군대에서 사단장의 명령으로 종일 삽질해서 산을 왼쪽으로 옮겼다가 다시 다음날 오른쪽으로 옮기는 그런 기분입니다. 이제 이 뻘짓을 할 필요 없이 내가 원하고 내가 바라는 대로 시간을 의미 있게 쓸 수 있다는 게 더없이 행복했습니다.
해고 소식을 알리고 주위 사람들의 반응은 참 재미있었습니다. 다들 처음에는 제가 해고당했다고 말하자 어떡하냐며 안타까워하고 슬퍼해줬으나 제가 해고당해서 너무 행복하다고 축하해 달라고 말하면 인지부조화가 와 고장 난 기계 같은 반응들을 보여줬습니다. 친구들은 아니 들어보면 그래 좋은 일 같기는 한데 그래도 해고당한 애를 축하해 주는 게 당최 맞는지 황당하다며 얼빠진 표정들을 보여주었습니다. 안나는 소식을 듣고 처음에는 당황했다가 제가 워낙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자 함께 기뻐해주었습니다. 부모님의 반응이 가장 참신했습니다. 카톡으로 빅뉴스가 있다고만 말씀드리고 한 시간 뒤쯤 전화드려 해고당했다고 말씀드리자 그게 무슨 빅뉴스냐며, 안나가 임신했거나 계획이 바뀌어 한국에 오지 않기로 했거나 사돈댁이 한국에라도 방문하는 줄 알고 가슴을 쓸어내리셨다고 하셨습니다. 회사에 해고당한 건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며 스몰 뉴스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상황들을 듣고 보니 확실히 해고당한 건 별 일 아닌 것처럼 보였습니다.
영국을 떠나기 전까지 남은 3개월. 이제 이 시간을 온전히 제가 바라는 대로 쓸 수 있게 되었으니 열심히 리스트에 적어둔 미션들을 해치워 나가려 합니다. 영국 떠나기 전 해치우고 할 일 들, 짐 정리 및 이사 계획, 호주 로드트립 준비, 한국에서의 사업 및 집짓기 계획, 출산 및 육아 계획. 모두 꼼꼼하고 잘 챙겨 다가올 미래를 야무지게 즐겨보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