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시간 114 비밀의 문을 열면

영화 '누구나 아는 비밀'

by eunring

남에게 드러내거나 알리지 않아야 하고

아직 밝혀지지 않았거나

알려지지 않은 것이 비밀입니다

아무도 모르는 것이 비밀인데

영화의 제목이 엉뚱하게도

'누구나 아는 비밀'이랍니다

누구나 다 알면

이미 비밀이 아닌 거죠


알고 있으면서도 말하지 않고

꽁꽁 묻어두면 비밀은 비밀이지만

누군가 알고 있으니 그 또한

비밀이라고 할 수도 없어요

비밀인 듯 비밀 아닌

비밀 같은 비밀입니다


더구나 가족의 비밀이니

알면서도 넘어가고 덮어주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고

애써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죠

가족이니까요


가족이라는 관계는 참으로 오묘해요

너무 가까워서 얼기설기 복잡하고

가까워서 그냥 덮고 넘어가기도 하는데

그러다 보면 원망과 아쉬움이 쌓이기도 하고

빈틈 또한 많아서 부서질 듯 위태롭지만

쉽게 부서지지 않는 것 또한 가족입니다


스페인의 작은 마을에서 일어난

10대 소녀의 유괴 사건을

풀어나가는 긴박감 속에서

비밀인 듯 비밀 아닌 비밀 같은

가족들의 비밀과 갈등과 의심이 깊어지다가

마침내 드러나고 또 덮어집니다


두 아빠가 있어요

낳은 아빠와 기른 아빠

이쯤 되면 어김없이 복잡미묘해지는 거죠

가족이란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복잡한 관계인데

출생의 비밀까지 더해지니 두 배로 잡해지지만

배우들의 연기와 감독의 섬세한 연출 덕분에

뻔하지만 결코 뻔하지 않은

매력적인 영화가 됩니다


아르헨티나에 살고 있는

라우라(페넬로페 크루즈)는

여동생 아나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딸 이레네와 아들 디에고를 데리고

스페인에 다니러 옵니다


고향집에는 라우라의 언니 마리아나가

라우라의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어요

어릴 적 친구이며 옛 연인이었던

파코(하비에르 바르뎀)가

아내 베아(바바라 레니)와 함께

포도농장을 하고 있죠


즐겁고 흥겹고 시끌벅적한 결혼식 파티 후에

라우라의 딸 이레네가 사라집니다

거액의 몸값을 달라는 협박 메시지를 받은

라우라와 가족들과 옛 연인 파코까지

사라진 이레네를 찾아 나서고

라우라의 남편 알레한드로(리카도 다린)도

서둘러 달려오지만 그는 파산 상태라

돈을 마련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가족을 잘 아는 주변 사람이 벌인 일이라는

소문이 돌고 가족들은 서로를 의심하며

그동안 덮어두었던 비밀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죠

알면서도 서로 모르는 척했던

비밀 아닌 비밀도 있고

느닷없이 뒤통수치는 비밀도 있어요

모두가 다 아는 비밀을

나만 모르고 있었다는 당혹감은

배신감보다 더한 느낌일 테니까요


바람에 흔들리는 문을 바라보며

눈빛에 괴로움이 깊어지던 파코의 모습이

의미심장해 보여 혹시 범인인가 싶기도 하지만

거울을 보는 파코의 뒷머리에서 흰머리를 보며

왜 자신을 괴롭히느냐고 베아가 묻자

오래전 라우라에게 헐값으로 사들였던

땅을 팔아 이레네를 구하겠다고

이레네가 내 딸이라는 폭탄선언을 하죠


화를 내며 베아가 말합니다

'우리 사이에는 비밀이 없을 줄 알았어'

전부 한통속이라는 베아의 말이 옳긴 해요

16년 만에 느닷없이 딸의 존재를 알게 된

파코와 베아만 몰랐던 비밀이니까요


라우라와 남편 알레한드로

둘만의 비밀이라 믿었으나

가족들은 이미 알고 있었던 거죠

이레네가 어릴 적 파코를 똑 닮아서

알면서도 묻지 않고 덮어둔

비밀 아닌 비밀이었으니까요


모두가 아는 비밀이니

비밀은 이미 비밀이 아니고

파코는 농장과 아내를 잃으면서도

끝까지 이레네를 구해냅니다


땅을 팔아 돈을 마련한 파코가

16년이 흘렀지만 자신의 권리고

책임이라고 알레한드로에게 말하자

이레네가 태어나서 자신이 살아났다고 고백하는

알레한드로의 심정도 안타깝습니다

이레네는 폐인이 된 자신을 깨우기 위한

하느님의 충격요법이었다고

이레네 덕분에 자신이 살았으니

이번에도 이레네를 살려주실 거라고 믿는다는

알레한드로도 범인일 수 있겠다 싶은

생각이 잠깐 스치기도 합니다


한밤중 걸려온 전화 속 이레네의 목소리에

다급히 돈가방을 들고나가는 파코를 지켜보며

경찰에게 전화하려다 마는 베아와

돈가방을 싣고 바닷가로 가는 파코는

갈림길에 선 안타까운 가족의 모습입니다


돈가방 대신 이러네를 찾고

옷을 벗어 덮어주는 파코의 눈빛에는

가족인 듯 가족 아닌 가족 같은

정겨움이 가득하고

'왜 파코가?'라고 묻는 이레네에게

아무도 대답해 주지 않지만

이레네도 이미 알고 있을지 몰라요

모두가 아는 비밀이니까요


엔딩 장면이 친절하지 았지만

독특하고 인상적입니다

아르헨티나로 떠나는 라우라 가족을 배웅하고

딸 로시오의 비밀을 눈치챈 라우라의 언니가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무표정한 표정으로 남편을 붙잡아요


거리를 청소하는 장면이 이어지고

두 사람의 이야기는 소리도 없이

하얗게 번지는 화면 위로 스며들면서

무심한 까만 글씨로

엔딩 크레디트가 흐릅니다


가족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영화

'누구나 아는 비밀'은

비밀 이야기가 아니고 가족 이야기라서

비밀이라고 쓰고 가족이라 읽어야겠어요

누구나 아는 비밀 같은

가족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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