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시간 342 빛과 색과 검의 예술
영화 '영웅:천하의 시작'
영웅이 필요한 시기인가 봅니다
채널을 돌리기만 하면 영웅들의 이야기네요
장예모 감독의 영화 '영웅:천하의 시작'은
푸른빛 감도는 화면이 아름답고
색감이 뛰어난 영상이 화려한 만큼
엔딩이 적막하고 허무합니다
이연걸 양조위 장만옥 삼총사의 조합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견자단이 함께 하며
장쯔이의 야무진 사랑스러움이
나비처럼 나풀댑니다
이것은 미술인가요 영화인가요
노란 은행잎 무수히 나풀대고 흩날리는
가을의 눈부신 황금빛 속에서
단풍잎 같은 두 여인의 대결이
빛과 색과 검과 눈빛의 4중주 같아요
황금빛으로 소용돌이치는 은행잎 사이로
붉은 옷자락 휘날리는 비설(장만옥)과
주홍빛 옷 나풀대는 여월(장쯔이)
단풍잎 같은 두 여인의 대결은
대결이 아니라 미술이고
음악이고 예술입니다
비설은 싸우지 않겠다며
무술이 부족한 여월을 봐주려 하지만
주인님의 복수를 하겠다고
질투에 눈이 먼 여월은
무모하게 덤벼들어요
소용돌이치며 회오리바람 일으키는
은행잎 사이로 여유롭게 나부끼는 붉은 잎 비설과
소용돌이에 휩쓸리다 땅에 떨어지는 주홍 잎 여월
그리고 비 오듯 쏟아지는 황금빛 은행잎이
화려하고 적막하고 쓸쓸합니다
비설의 칼에 맞는 여월의 모습을
휘감듯이 붉은 단풍잎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뒤돌아선 비설의 빨강 옷자락 사이로
노란 은행잎들이 핏빛 아픔을 끌어안고
빗물처럼 젖어듭니다
빨강이 때로는 허무라는 생각이 들어요
춘추전국시대의 중국이 배경입니다
전국 7 웅이라 불리던 일곱 나라는
천하 통일을 꿈꾸며 전쟁 중이죠
진나라 왕 영정(진도명)은 천하를 통일하고
황제가 되려는 야망을 품고 있으나
그를 노리는 조나라 자객 3 총사
은모장천(견자단)과 파검(양조위)과
비설(장만옥)에 대한 두려움으로
자신의 100보 안으로 가까이 다가서지 못하는
백 보 금지령을 내립니다
게다가 현상금을 내걸고
조나라 자객들을 잡으려 하는데
수천 명의 군사로도 잡지 못했던
그들을 물리친 무명(이연걸)이
세 개의 상자를 들고 진왕에게 옵니다
어릴 적 고아로 자라 이름도 무명인데
지난 십 년 동안 필살 검법을 익혔답니다
진나라 사람인 그가 자객들을 죽여 공을 세우고 진나라 왕을 알현하는 장면으로 시작해요
무수히 많은 계단을 올라 몸수색을 받고
백보 안으로 접근하지 말라는 주의를
단단히 받은 후에 드디어 진왕을 알현하는데요
그가 들고 온 세 개의 상자 속에는
조나라 자객 3 총사 장천의 부러진 창
그리고 파검과 비설의 검이 들어 있어요
무명에게 상으로 무엇을 바라는가 묻고
진왕은 장천의 부러진 창을 보며
이십 보 안으로 다가와 상을 받으라고 합니다
진왕 앞에서 무명이 털어놓는 무용담은
화려하고 다채롭고 흥미진진합니다
파검과 연인 사이인 비설이
장천과 바람을 피워
두 사람은 삼 년 동안 말을 하지 않았고
장천을 먼저 제거한 후
두 사람 사이의 질투를 이용해
파검과 비설도 제거했다는 이야기죠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고택에서
눈이 먼 명인의 거문고 소리와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가 어우러지는데
빗줄기를 피하며 무명과 장천이 싸우는 장면에서
빗줄기와 부딪치며 날아오르는
무명의 검과 장천의 창의 대결은
빗소리와 쇳소리의 합주인 듯 멋들어집니다
무명이 한 곡 더 연주를 부탁하고
눈이 안 보이는 악사의 연주 속에서
마주 선 채 머리싸움을 하는
대결 장면 또한 인상적입니다
'무술과 음악은 다른 듯하나
최고의 경지를 추구하는 건 같다'며
삼십 분 동안 서로를 응시한 채
생각 속 결투 장면이
흑백의 예술처럼 이어지죠
창과 검과 바둑판에 흩어지는 빗방울과
거문고 소리에 이어 거문고 줄이 끊어지고
뒤이어 장천의 창이 부러지고
무명의 검이 장천을 이기는 회상 끝에
무명은 진왕에게 황금과 땅을 하사 받고
다시 십 보 안에서 진왕의 잔을 받으며
파검과 비설을 물리친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파검과 비설이 고산과 유수로 숨어 지내는
조나라의 서예 학교로 들어간 무명이
파검과 비설의 검을 무찌른 이야기가
조곤조곤 흥미롭게 이어지는데요
파검이 지닌 검법의 약점을 찾기 위해
파검에게 '검'자를 부탁하고
대나무책으로 가득한
장서각에서 무명의 검술 실력을
파검과 비설에게 보여주는 장면도
고즈넉하게 아름답습니다
발로 차올린 찻잔이 떨어져 깨지기 전에
대나무로 엮은 책의 끈들이 끊어지면서
와르르 소리를 내며 무너지는 모습에
감탄하게 됩니다
한 사람의 희생이 더 필요하다는 무명에게
검의 빠르기가 대단한 그가
분명 진왕을 죽일 수 있을 거라고
파검과 비설 두 사람은
그에게 운명을 맡기기로 하죠
푸른 안개 덮인 봄날의 산이
꽃 그림자로 비치는 신비로운 분위기에서
호수의 푸른 물 위를 가르고 허공을 나는
무명과 파검 두 사람의 결투 장면이
춤인 듯 화려하고 움직이는 그림처럼 절묘합니다
환상적인 푸른빛으로 젖어드는
한 폭의 산수화 같아요
무명의 긴 이야기 끝에
진왕은 자신의 생각을 덧붙입니다
장천은 일부러 무명에게 져주었다는 거죠
무명을 믿고 무명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목숨을 무영에게 맡기며
일부러 죽음을 택한 거랍니다
진왕 앞에서 열 걸음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만들어주기 위해서라며
흔들리는 불꽃에서 살기를 느꼈다고
진왕은 무명에게 물어요
진나라 사람이 아닌데 누구냐고 묻자
조나라 사람이라고 무명은 대답합니다
진나라에서 자랐으나 부모가 진의 군대에 죽어 진으로 입양된 조나라 사람으로
복수를 꿈꿔왔다는 거죠
무명의 10보 필살 검법은
열 걸음 안에서 빛보다 빠르게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는 검법이라며
'과인의 운이 다했구나 왜 망설이는가'
파검이 삼 년 전
진왕을 죽이기를 포기한 것은
'천하' 두 글자 때문이라고
무명은 덧붙입니다
'진실과 순수를 추구하는
서예와 검법의 근본은 같답니다'
파검과 비설은 유랑하다 만난 사이였죠
서예와 검법을 익히며 진왕을 암살한 후
검이 필요 없는 곳으로 함께 가기로 했답니다
초록옷 파검과 연두옷 비설이
3년 전 진왕을 암살하러 갔다가
연초록 휘장의 나풀거림 속에서
진왕과 싸우는 파검의 초록 옷자락이
바람처럼 나부끼는 장면이 인상적입니다
초록 휘장들이 바닥에 내려앉는 순간
파검은 서예의 깨달음으로
진왕을 죽이지 않았거든요
개인의 사사로운 원한은
전쟁으로 고통받는 백성들에 비하면
별것 아니라는 파검의 깨달음이
'천하'라는 두 글자에 담깁니다
파검이 모래바닥에 칼끝으로
그려내는 두 글자는 '천하'
진왕이 죽어도 또 누군가 그 자리에서
다시 전쟁을 벌일 거라고 생각한 것이니
천하통일이라는 대의를 위해
암살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죠
무명은 그걸 이해합니다
'생각지도 못했다
나를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이
정녕 내가 수배했던 자객이라는 말인가'
눈물 그렁한 진왕은 무명에게 묻습니다
'무기도 없이 나를 어떻게 죽이려고?'
무명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전하의 검으로'
진왕은 무명에게 칼을 던져주며
천하를 위한 결정을 내려보라고 하죠
'검법의 경지 중 최고의 경지는
손도 아니고 마음의 검도 아닌
모든 것을 포용하는 넓은 마음이라'고
진왕을 찌르지 않고 스치며
최고의 경지를 잊지 말라는 부탁을 남기고
무명은 떠납니다
'이것이 저의 결정입니다
검을 찌르면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겠지요' 최고의 경지를 잊지 말기를 진왕에게 부탁하며
군사들에게 에워싸인 채 걸어가는 무명은
법대로 처형을 당합니다
붉은 깃털 모자와 창으로 무장한 병사들이 거침없이 쏘아대는 무수한 화살은
소낙비처럼 문과 벽과 무명을 향하고
수만 개의 화살을 온몸으로 받으면서도
끝까지 버티며 최후를 맞이하는
무명의 모습이
비장하고 먹먹합니다
실패를 알리는 황색천의 휘날림을 보며
비설이 파검에게 건네는 말도 '천하'죠
'당신 마음속엔 천하만 있군요'
'당신도 있어'
검을 뽑으라는 비설에게
파검이 하는 말이 유난히 쓸쓸합니다
'첫 만남에서도 검을 뽑으라더니'
모래바람 속에서 검을 휘두르는
두 사람의 모습이 안타까운데
비설의 검을 막지 않고 쓰러지며
부디 잘 있으라고 파검이 건네는
작별 인사는 더없이 허망할 뿐이죠
왜 안 막았느냐 묻자
'그래야 믿을 테니'라고 대답하는
파검의 죽음 앞에서 눈물 쏟으며 울부짖는 비설
마주 앉은 두 사람의 옷자락을
부질없는 바람이 휘날려줍니다
이제 떠돌지 않을 거라며
함께 고향으로 가자는 비설은
파검과 함께 죽음을 맞아들이고
여월의 쓰라린 눈물과
빨간 천에 덮인 무명의 시신에 이어
'기원전 221년 진나라 왕은 6국을 물리치고
천하를 통일했다는 자막'이 흐르며
영화는 끝이 납니다
은행잎 노랗게 물들어
바람에 흩날리는 늦가을 어느 날
이야기의 전개와 상관없이
영웅의 이야기가 아닌
인생의 빛과 색과 검의 연주를
다시 보며 듣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