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시간 826 찬실이는 희망이 있지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
서른 알짜리 달걀 한 판을
이미 훌쩍 넘겨버린
그녀의 나이 마흔
이름은 이찬실입니다
빛날 찬燦 열매 실實
그러나 그녀의 현실은
이루거나 맺은 열매 하나 없이
어둡고 춥고 막막합니다
일을 하고 돈을 벌어
제대로 밥벌이를 하고 싶으나
찾는 사람 하나 없는
백수 신세인 그녀 찬실이
나이 마흔이 다 되도록
영화만을 꿈꾸고 열정을 다해
존경하는 예술영화감독 밑에서
프로듀서로 일하던 그녀는
새 영화 촬영을 앞둔 회식자리에서
감독이 돌연사하는 바람에
덩달아 실직을 한 상태거든요
한 알갱이의 먼지 같은 인생
훌훌 털고 이사를 간 샨동네에서
인생의 대선배인 집주인 할머니와
허상인 듯 환영인 듯 실제인 듯
그녀의 눈에만 보이는
귀신인지 유령인지 모를
장국영을 만납니다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것을 찾아야
비로소 행복해진다며
느닷없이 나타나 그녀를 응원하는 남자
흰 속옷 차림 장국영의 등장이
뜬금없으나 신선하고
엉뚱한 만큼 재미납니다
주민센터의 한글교실에 다니는
집주인 할머니는 찬실의 눈에
글이라고는 이름 석 자밖에 모르는
삐뚤빼뚤 까막눈 할매지만
사는 게 뭔지 다 아는 것 같은
인생의 대선배답게
따뜻한 밥그릇이 되어
그녀를 다정하게 보듬어 줍니다
보이는 사람 눈에만 보인다는
허무맹랑 속옷 귀신 장국영은
집주인 할머니의
세상 떠난 딸이 지내던
가운데 방에 살고 있어요
밥벌이를 위해 찬실이는
아는 동생이고 여배우인
소피의 집 가사 도우미를 하다가
소피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치러 온
다섯 살 연하의 남자
단편영화감독 영을 만나게 됩니다
별거 아닌 영화가 좋다는
그녀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영화는 별로라고 그는 말합니다
영화는 일단 재밌는 영화가 좋고
어릴 적 홍콩영화를 좋아했다는 그의 말에
그녀도 어릴 때 장국영을 좋아했다고
맞장구를 치며 그린라이트 반짝~
영화를 안 해도 살 수 있냐는
그녀의 물음에
그럴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는 선뜻 대답합니다
영화 아니라도 사람들과 함께
우정을 나누고 사랑을 주고받으며
영화보다 더 중요한 게 많은 삶이니
영화를 안 해도 살 수 있다는 거죠
밥벌이를 위한 가사도우미 그녀와
밥벌이를 위해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그의 만남은 잠시 녹색불인 듯하다가
안타깝게도 좋은 누나의 선을 넘지 못해
로맨틱한 인연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도시락 데이트 후
걷다가 뒤에서 끌어안는 찬실에게
PD님을 좋은 누나라고 생각한다며
괜한 오해를 준 것 같다고
분명하게 선을 긋는 그의 말이
참 아프고 쓰라렸을 테죠
잠시 미쳤었나 봐요~중얼거리며
민망함을 떨치려는 듯 급히 달려가다가
빈 도시락통을 떨어뜨리고
허둥대며 주섬주섬 주워 담고는
버스에서 혼자 우는
그녀의 모습이 짠합니다
그럼요 인생은 야박해요
뭐 하나 맘대로 돠는 게 없으니까요
불쌍해라 쯧쯧~
집주인 할머니가 손전등으로
어둠 속 찬실의 얼굴 비추며
왜 그러느냐 묻고는
애지중지 화분을 집안으로 돌여 가는데
기다렸다는 듯 장국영 등장합니다
욕심을 버리고
좋은 친구로 지내라고
그가 말합니다
다 가지려고 하지 말라고
외로운 건 외로울 뿐
사랑이 아니라는 장국영 귀신의 말이
그녀에게 위로가 되었을까요
오히려 상처에 솔솔 뿌려지는
쓰라린 소금 알갱이가 되었을까요
비디오테이프와 영화잡지와
책더미를 버리려던 그녀는
귀신이라 추위를 타지 않는다면서도
추위에 떨며 속옷 차림으로 맘보춤을 추는
아비 닮은 장국영을 봅니다
그녀의 인생이나
귀신 장국영의 인생이나
어차피 거기서 거기~
아무도 없는데
누구랑 얘기하냐 물으며
안고 쥐고 있으면 뭐 하냐
버려야 채워진다는 할머니의
말씀은 구구절절 옳으신 말씀이고
할머니의 인생철학은 단순하지만
단순한 만큼 깊이 있고
경쾌하고 명쾌합니다
'나는 오늘 하고 싶은 일만 해
대신 애써서 해'
콩나물 다듬는 것이 그날의 일이라면
그 일을 애써서 한다는 할머니의
주민센터 시 쓰기 숙제를 도와주며
아무거나 써보라고 하다가
그녀는 말을 바꾸죠
대단한 것을 쓰기보다는
중요한 걸 쓰라고
아무렇게는 아니고
아무거나 일단 써보라는 그녀의 말에
할머니는 맞춤법이 마구 어긋나서
찬실이가 무슨 말인지 알지 못하지만
기막힌 시 한 줄을 쓰시는데요
사람도 꽃처럼
다시 돌아오면 좋겠다는
할머니의 시에 찬실이는 울먹
나도 따라 먹먹~
옷다운 옷을 제대로 갖춰 입고
장국영 귀신은 찬실에게
그녀가 영화에 첫걸음을 내딛는
계기가 된 아코디언을 선물하고
찬실은 '희망가'를 연주합니다
채우고 또 채워도
가시지 않는 갈증이 있고
목이 말라서 꾸는 꿈은 행복이 아니며
사는 게 진짜 궁금해지고
그 안에 영화도 있다~고
찬실은 자신에게 용기를 준
장국영과 작별합니다
저 멀리 우주에서도
찬실을 응원하겠다는
장국영 귀신에게 그녀는
진심으로 고마움의 인사를 건네죠
고마웠어요 오래 기억할게요~
사는 게 뭔지 진짜 궁금해진 그녀는
다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하고
영화를 만들자며 동료와 후배들이
산동네 집으로 그녀를 찾아옵니다
노트북 속 시나리오를
도저히 지루해서 못 읽겠다는 소피와
전구가 나가 불이 안 들어오는데
달을 향해 기도 중인 할머니의 모습이
엉뚱하게도 진지해 보여서
피식 웃게 됩니다
허무 개그 같아서요
불을 켜기 위해 전구를 사러
영화를 만들자며 찾아온 후배들과
깊고 좁고 춥고 스산한 밤길을 걸어가는데
그녀는 맨 뒤에서 손전등을 비춰줍니다
'먼저 가라 비춰줄게'
다 함께 전구를 사러 가는
정겹고 소란한 골목을 비춰주는
찬실의 조그만 손전등이 바로
꿈이고 희망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믿고 싶은 거
하고 싶은 거 보고 싶은 거~
찬실이의 독백 끝에 빠져나오는
어두운 터널 끝 하얀 눈밭을 바라보는
장국영의 흰 러닝셔츠 뒷모습이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애틋합니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
제목처럼 찬실이는 복 많은 사람입니다
따뜻한 품을 덥석 내어주시는
인생의 일타강사 집주인 할머니도
그녀의 큰 복이죠
그녀의 눈에만 보이지만
그녀가 길을 잃고 헤맬 때마다
불쑥 나타나 툭툭 질문을 던지며
그녀를 응원하는 장국영이라는 귀신도
온전히 그녀의 복입니다
가파른 산동네에 이사를 올 때도
함께 짐을 나르며 돕는 이들이 있고
그녀가 주저앉아 지쳐 있을 때
찾아와 주는 이들이 있으니
찬실이는 복이 많은 게 분명합니다
복이라는 글자가
꿈이라는 글자로 보이는 건
왜일까요?
찬실이는 복도 많지~라고 쓰고
찬실이는 꿈도 많지~라고 읽으며
찬실이는 복 많고 꿈도 많고
희망도 있지~라고 덧붙이고 싶습니다
채웠다 비우고
또 채우다가 비워내는 달처럼
피었다 지고 다시 피는
꽃처럼 사람도
다시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집주인 할머니의 시를 중얼거리며
복 많은 찬실이와 작별합니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
찬실이를 만난 나 역시
복 많은 사람이고
이런 게 인생이니
즐거울 수밖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