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시간 325 체리꽃 필 무렵
영화 '1917'
제목이 '1917'입니다
1차 세계대전 당시의 이야기죠
독일군의 함정에 빠진 아군을 구하기 위해
적진으로 뛰어든 두 영국 병사의
새하얀 체리꽃 이파리들이
바람에 나풀대며 나비 떼처럼 흩어지듯
잔잔하면서도 숨 가쁘고 안타까운
청춘의 아픔이 담긴 영화랍니다
숫자나 전쟁 이야기가
그다지 흥미롭지 않은데
분위기에 끌려 보기 시작합니다
취향과 상관없이 시작하게 되는 일들이 있고
내 몫이나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다가도
어쩌다 내 안으로 불쑥 들어서는 것들이
분명 있으니까요
'1917'로 훌쩍 타임슬립 하여
대규모 전투 장면 하나 없는데도
영화를 보는 내내
긴장감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순간순간 전쟁의 참혹함과 비정함
그 한복판을 함께 달리는 듯해서
슬픔과 절박함으로 가득한 화면 속으로
금세 빠져들게 됩니다
1917년 4월 6일
영화는 노랑 하양 들꽃들이 하늘거리는
들판의 나무에 기대어 앉아 잠시 쉬고 있는
스코필드(조지 멕케이) 상병과
그 곁에 누워 쪽잠에 빠져 있는
블레이크(단-찰스 채프먼) 상병
두 병사의 모습으로 시작합니다
중사의 부름에 잠에서 깨어난 블레이크는
눈감고 있는 스코필드에게 손을 내밀고
함께 사령관 에린무어 장군(콜린 퍼스)의
명령을 받으러 본부로 가는데요
전략적 후퇴를 한 독일군이 통신선을 끊어
공격 중지 명령을 전할 수 없는 상황이라
톰 블레이크 상병의 형
조셉 블레이크 중위(리차드 매든)가 있는
데본셔 연대의 2대대가 수행하게 될
내일 아침 공격을 중지하라는 긴급 명령서를
직접 전달해야 하는 위험한 미션을 받게 되죠
독일군의 유인작전에 빠져 위험한 상황이므로
공격을 시작하기 전까지 명령서를
대대장 맥켄지(베네딕트 컴버배치) 중령에게
전달하지 못하면 형을 포함한 1600명이
독일군에게 몰살당할 위기에 처한
긴박한 상황입니다
두 병사가 출발하기 전
'지옥에 떨어지나 왕좌로 가나
혼자 가는 것이 가장 빠르다'는
에린무어 장군의 말씀에 복선이 깔려요
무모하고 위험한 미션이니
차분하게 생각하며
얘기 좀 하자는 스코필드에게
'생각할 필요 없어 형이야'
블레이크는 마음이 급해요
조금만 기다리자는 스코필드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조급하게 직진합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도 있는데
블레이크는 마음이 앞서는 직진남이고
스코필드는 차분하고 침착하고 냉정해요
블레이크와 스코필드는 목숨을 걸고
14Km 떨어진 데본셔 연대로 향합니다
독일군 주둔지를 가로질러서 가야 하는데
불탄 철조망을 넘어서자
독일군 참호는 텅 비어 있어요
제일 빠른 길을 찾아 지하통로를 선택했다가 느닷없이 폭탄이 터져 돌더미에 깔린
스코필드를 블레이크가 구해줍니다
무너져내리는 지하통로를 간신히 빠져나오자
한꺼번에 쏟아지는 햇빛이 눈부셔요
가까스로 탈출해 나와 흙투성이 눈을 씻어내며
'왜 하필 날 뽑았냐'라고 스코필드가 묻자
블레이크는 쉬운 건 줄 알았다고 해요
운명은 늘 그렇게 뜬금없이 다가오는 것이죠
시간과의 싸움 중인 두 병사는 다시 전진합니다
스코필드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향기 품은 헤어 오일을 발랐다가 쥐에게 귀를 뜯긴
윌코 이야기를 하다가 초록 들판을 만납니다
목이 말라서 훈장을 와인 한 병과 바꿨다는
스코필드는 훈장이 그냥 쇳조각일 뿐이라고 해요
집에 가기 싫었다는 그의 말이 먹먹합니다
집에서 다시 떠나와야 야하는데
떠나기 싫어질까 봐 가기 싫었다는 말이
안타까워서 가슴 뭉클~
전쟁터의 잠시 쉼표와도 같은
무너진 돌담 아래 서 있는 체리나무들이
새하얀 꽃송이를 올망졸망 매달고 있는데요
블레이크는 엄마가 체리나무 과수원을 해서
체리의 종류를 조르르 꿰고 있어요
해마다 이맘때 체리꽃이 피면 눈 내린 듯하다는
블레이크의 말속에 그리움이 가득합니다
체리나무는 씨앗이 썩으면 다시 자란다는군요
고통 속에서 희망이 자라는 것처럼
체리나무는 다시 무성해진답니다
부서진 농가에서 뭔가 불길하다는
스코필드의 중얼거림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적군 전투기가 추락하자 조종사를 구해주는데 스코필드가 잠시 물을 뜨러 간 사이에
조종사가 블레이크를 찌르고 말아요
데본셔 연대에 있는 형을 구하기 위해
반드시 임무를 수행하려는 블레이크의 의지는
안타깝게도 중간에 꺾이게 되죠
허무하게 정신을 놓아가는 블레이크에게
형을 찾으러 가자고 하자
'나랑 똑같이 생겼어 형이 좀 더 늙었어'
주머니 속 지갑 안에서 꺼낸 가족사진을 품에 안고
사랑하는 가족과 그리운 고향을 떠올리며
블레이크는 엄마에게 편지를 보내 달라고
스코필드에게 부탁합니다
'홀로 쓸쓸히 죽지 않았다고
겁내지 않았다고 사랑한다'라고
편지를 써 달라는 안타까운 부탁을 남깁니다
스코필드는 걱정하지 말라고 다독여요
'명령서 전달하고 네 형을 찾을게
너랑 똑같은데 조금 늙은 사람'
새하얗게 죽어가는 블레이크 곁에서
눈물을 꾹 눌러 삼키며
스코필드는 공격 중지 명령서와
블레이크의 반지와 인식표를 챙기고
가족사진은 블레이크의 옷 안에 넣어주며
아군의 도움으로 시신을 수습합니다
블레이크를 잃고 스코필드 혼자
에쿠스트 마을을 지나
데본셔 대대를 찾아가는 길은
위험하고 녹록지 않아요
트럭을 태워주던 친절한 스미스 장교는
친구의 일은 유감이지만 빨리 잊으라고 하죠
다른 부대 병사들과 함께 트럭에 탄
반쯤 넋이 나간 듯한 그의 모습이
측은하면서도 든든합니다
트럭이 진흙 구덩이에 빠지자
앞장서 트럭을 밀며 빨리 가야 한다고 재촉해요
그는 시간과 싸우는 중이니까요
원래는 둘이었는데 이제 혼자라는 그에게
병사들은 임무 수행이 불가능하다고 하지만
반드시 해낸다고 다짐하는
스코필드가 처음과 많이 달라졌어요
블레이크가 형을 위해 망설임 없이 시작한 임무를
살아남은 스코필드는 블레이크를 위해
필사적으로 달려들어 수행합니다
붕괴된 다리와 만나자 트럭에서 내린
스코필드의 눈빛이 반짝입니다
블레이크의 직진 본능을 이어받은 듯
반드시 임무를 완수하겠다는
굳은 의지가 넘쳐요
행운을 빈다며 스미스 장교(마크 스트롱)는
맥켄지 중령을 만나 명령을 전할 때는
사람들이 많은 공개된 장소에서 하라고
친절하게 조언합니다
끝까지 싸우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다는 거죠
무너진 다리를 위험 무릅쓰고 건너
빈 건물로 들어갔다가 적군을 만난 스코필드는
잠시 기절했다가 깨어나 숨어 들어간 곳에서
엄마가 없는 아기를 돌보는 여자에게
자신의 비상식량을 다 내줍니다
새벽 해가 부옇게 떠오르자
다시 달리기 시작하는 그는
나무토막에 의지해 강물을 타고 떠내려가다가
하얗게 흩날리는 체리꽃 이파리들을 보며
가물거리는 정신줄을 다시 부여잡아요
블레이크를 떠올리며 마음을 추스르는
그의 모습이 애틋합니다
체리꽃 하얀 이파리들과 함께
시신들이 둥실둥실 떠 있는
강물을 건너자마자 무릎 꿇고 엎어지듯
울음을 쏟아내는 그의 모습이
애처롭고 안타깝습니다
'내가 가는 길은 험하고 가파르네
금빛 들판이 눈앞에 펼쳐지네
내 어머니를 만나러 그곳으로 가네
세상 떠난 이들을 만나러 요단강을 건너네
나는 집으로 가네 나는 가련한 나그네
고통스러운 세상을 떠도네'
죽을 고비를 몇 번씩 넘긴 피투성이 스코필드는
고즈넉하게 들려오는 노랫소리를 따라간 곳에서 아군 병사들을 만나고 휴식 중인 병사들 곁에서 우두커니 멍 때리며 노래를 들어요
노래를 듣다가 중얼거리듯이
데본셔 부대를 찾자 그들이 바로
데본셔 부대이고 곧 공격이 시작될 거고
그들은 후발 부대라는 걸 알게 됩니다
이미 공격은 시작되었지만
공격 중지 명령을 전하기 위해 뛰고 또 달리며 부딪치고 나가떨어지며 미친 듯이 달리고
또 달려가는 스코필드의 모습이 절박합니다
스코필드와 함께 나도 숨 가쁘게 달리고 있어요
맥켄지 중령을 찾아 공격 중지 명령을 전하려는
스코필드에게 너무 늦었다며
땅거미나 안개를 기다리지 않는다고 하지만
여러 군인들이 있는 자리에서 명령서를 전하고
독일군의 함정이라는 것을 분명히 밝힙니다
어쩔 수 없이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맥켄지 중령은 '오늘 끝낼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다'며 몹시 아쉬워하죠
'희망은 역시 위험한 거라고
전쟁이 끝나는 길은 하나
오직 한 사람이 남는 거'라고 덧붙입니다
블레이크와 약속한 대로
형 블레이크 중위를 찾아 야전 치료소로 가자
'엄마 보고 싶어요'
피투성이 병사들의 목소리가 애절합니다
'내 다리'를 외치는 피투성이 아수라장 속에서
부상병들을 이송 중인 블레이크 중위를 만나자
스코필드에게 대뜸 치료가 필요한지 물어요
동생처럼 책임감이 강해 보입니다
전달 메시지가 있다고 하자
블레이크 중위는 동생 톰에 대해 물어요
잠시 머뭇거리던 스코필드의 대답은
짧게 이어집니다
'고통은 짧았습니다'
그리고 유품인 반지를 전하자
비로소 스코필드의 이름 물어요
윌리엄이라고 스코필드가 대답합니다
스코필드의 이름이 윌리엄이군요
배고플 텐데 야전 식당 가보라며
슬픔을 악무는 블레이크 중위에게
톰은 혼자가 아니었다고
스코필드가 말을 이어요
'어머님께 편지를 쓰고 싶어요
톰은 좋은 사람이었어요
항상 재밌는 얘기 해주고
내 목숨을 구했어요'
스코필드의 말에 블레이크 중위는
동생과 함께 있었다니 기쁘다고
고맙다고 손 내밀며
'땡큐 윌'
수미상관이라고 하나요
영화의 처음 장면이 끝 장면에서
비슷하게 반복됩니다
첫 장면에서 스코필드가 나무에 기대어 앉았듯이
임무를 수행한 스코필드가 한 그루 나무를 향해 지친 걸음으로 천천히 걸어갑니다
첫 장면에서는 두 사람이었으나
끝 장면에서는 혼자인 것이 쓸쓸합니다
천천히 걸어 한 그루 나무를 향해 가는
스코필드의 뒷모습이 고단해 보이고
노랑꽃들이 잔잔히 핀 들판을 스치며
살랑이는 바람은 평온합니다
나무에 기대앉아 주머니에서 꺼낸
사진들을 들여다보다가 스코필드는
사진 뒷면에 적힌 글씨를
눈으로 어루만집니다
'꼭 돌아와'
가만 눈감는 그의 얼굴 위로
보송한 봄 햇살이 내려앉는 순간
소리 없이 반짝이는 슬픔이
눈부시게 느껴집니다
영화 '1917'은
여러 장면을 표시 안 나게 이어 붙였답니다
영화 전체가 한 장면인 것처럼 느껴지는
'원 컨티뉴어스 숏' 기법으로
전쟁의 참혹함을 생생하게 담았다고 해요
자신의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영화를 만든 샘 멘데스 감독은
영화 제작을 시작할 때부터
롱테이크를 통해 관객에게 실감 나는 전쟁의 참혹함과 현장감을 느끼게 만들고 싶었다죠
롱테이크란
한 장면을 길게 찍는 것인데
1917'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장면처럼 보이도록
롱테이크들을 이어 붙인 거래요
컷과 컷 사이를 이어 붙이면서도
관객들의 몰입감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컷과 컷 사이를 자연스럽게 잘 숨긴
편집의 묘미를 살려
마치 전쟁터 한복판에 있는 것처럼
체험 전쟁의 현장을 느끼게 한 거랍니다
처음 시작은 블레이크의 임무였는데
물색없이 따라나섰다가 자신의 임무로 끌어안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미친 듯이 달리고 또 달리는
스코필드 옆에서 나도 함께 달리는 듯
손에 땀을 쥐고 긴장하며 몰입하게 됩니다
생생하게 느껴지는 현장감 덕분에
1917년 그 시간 속으로
잠시 시간여행을 다녀온 것 같아요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는 거리감 대신
시작부터 끝까지 긴장감 속에서
스코필드와 함께 미션을 수행하고 온 듯한
안도감 곁에 블레이크의 빈자리가 휑합니다
블레이크를 지켜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까지도
안타깝고 묵직하고 긴 여운으로 남습니다
세상에 내 것 하나 변변히 없으나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
등에 짊어질 수 있을 만큼씩 다가오고
거침없이 다가왔다가
무싱히 스쳐 지나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스코필드처럼 왜 하필 나야?
물을 수도 없는 인생 한복판입니다
왜 하필 나? 인가 묻고 싶을 때
다시 스코필드와 딜려보고 싶어요
새하얀 체리꽃 필 무렵
다시 보고 싶은 영화이기도 합니다
1917년은 다시 오지 않아도
해마다 4월 6일은 다시 오고
눈부신 봄볕 안고 체리꽃들은
새하얗게 무수히 피어날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