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시간 331 소녀시절의 너

영화 '그 여름 가장 차가웠던'

by eunring

세상에는 왜 벽이 존재할까

벽은 왜 쉽게 무너지지 않을까~라는

소녀의 작문 구절로 시작합니다

듣다 보니 '넘사벽'이라는 말이 문득 떠올라요

안타까운 일이지만 세상에는 넘을 수 없는

무수히 많은 벽들이 분명 존재하니까요


제2의 주동우라는 소녀 배우와

불량소년을 연기하는 소년 배우 덕분에

'소년 시절의 너'를 떠올리게 됩니다

주동우의 '소년 시절의 너'에 대한

동은희의 '소녀시절의 너'라는 느낌이 들어요

가장 차가웠던 여름을 겪어내는

소녀의 성장 스토리니까요


주동우를 향한 첫걸음을 내딛는

여주인공 자허 역의 소녀 배우 동은희

조용하고 차분하고 고독하며

무심한 듯 차가운 모습으로

복잡 미묘한 내면의 변화를 연기하는

소녀 배우가 기특하고 대견합니다


수영장에서 고기 비린내가 난다고

친구들이 수군대며 따돌리자

수영장 물에 빨간 물감을 한 동이 퍼붓는

소녀 자허는 격한 중2병을 겪는 중입니다


수학 점수가 형편없는 수포자 소녀 자허는

도축장 배달일을 하는 아빠의 트럭이 더럽다고 다른 일을 하면 안 되냐고 투정을 부리지만

안타깝게도 아빠가 가진 건 낡은 트럭 한 대뿐이죠

수학 점수 엉망인 자허에게

아빠가 보충수업을 하라고 하자

자허는 아빠의 약값을 먼저 걱정합니다


샤워하다가 냄새 맡아보며 닦고 또 닦는

물 마시다 뱉고 또 냄새를 맡는 자허가 안쓰러워요

엄마의 유품 상자에서 핸드폰 꺼내

놀이공원 동영상을 보며 놀이공원에서

엄마랑 놀던 시간을 추억합니다


무서워서 못 타겠다는 자허에게

엄마는 괜찮다고 해요

나이가 들수록 용감해지니

내년에는 탈 수 있을 거라고

자허를 다독이는 엄마의 위로가 다정합니다


엄마와의 추억이 머무르는

놀이공원에서 우연히 부딪친

소년 유레이(이감)는

소녀의 엄마를 죽인 범인입니다


레슬링 선수였으나 지금은 도축장 배달일을 하고

배달료도 제대로 못 받으며 무시당하는 아빠가

자허의 눈에는 몹시 못마땅한데

아빠의 트럭을 고치러 간 자동차 정비소에서

일하는 소년 유레이를 다시 보게 됩니다

밥을 먹으며 공부하는 소년의 가방을

몰래 뒤져 수학책을 꺼내보던 자허는

다시 엄마의 기억 속으로 빠져들어요


엄마가 갖고 싶어 하던 귀고리를

몰래 훔쳐와 선물한 자허에게 엄마는

'가서 사과하고 돈 내고 사 오라'고 했었죠

아무리 예쁘고 좋은 거라도

내 노력으로 얻지 않으면 금방 싫증이 난다는

엄마의 말씀에 공감합니딘


자허는 엄마를 변호했던 변호사 찾아가

유레이의 주소 알려달라고 해요

4년형인데 3년도 안되어 미리 나왔고

나이를 알고 보니 소년범도 아니라는 자허의 말에

변호사는 몹시 곤란한 표정을 지어요


3년 전 엄마가 살해된 후

소녀 자허(동은희)와 아빠의 삶은

한마디로 엉망이 되어 버렸죠

다정한 엄마가 소녀 자허의 든든한 울타리였는데

울타리가 사라진 허망함과 울적함 속에서

학교에서는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무기력한 아빠와도 마음의 벽을 쌓은 채 지내다가

우연히 엄마를 죽인 소년 유레이와 마주치고

일찍 석방된 소년에 대한 분노에 휩싸인 소녀는

엄마의 복수를 고민하며

의도적으로 소년에게 다가섭니다


소년과 가까워지고

소년에 대해 알아가면서

소녀 자허의 마음은 조금씩 흔들립니다

소년 유레이는 자동차 정비소 한구석

어둡고 칙칙한 방에서 혼자 살고 있어요

공기가 탁할수록 정화능력이 좋아진다는

작은 화분 하나가 그의 곁에 있을 뿐


소년의 아빠는 4년 전에 돌아가시고

엄마는 부자와 재혼했는데

새아빠가 소년을 싫어한답니다

소년의 엄마는 돈은 달라는 대로 주고

진수성찬을 차려주는 것으로

엄마 도리 다했다고 생각하겠지만

정작 필요한 건 물 한 잔이라고 말하는

유레이는 교정 학교 선생님과 약속이라

수학 공부를 한다고 하죠

사랑과 관심이 필요한 소년이니까요


자동차 정비소에 맡긴 고객의 차를

몰래 타다 걸린 소년은 사라지고

소녀는 소년을 찾아다닙니다

겨우 소년이 이사한 집을 찾아

어두운 곳에 놓여 있는 화분을

밝은 창가로 옮겨놓아요

소녀가 바로 소년의 화분인 셈이죠


공사장 높은 건물에 올라갔을 때

음식점에서 나이프를 손에 쥐었을 때

소년의 부탁으로 머리를 깎아줄 때

'손이 안 닿아 뒷머리 좀 잘라줘

가위로 안되면 면도칼로 밀어'

소년이 부탁하는 순간 복수의 기회기 왔으나

소녀는 머뭇거립니다


레슬링 선수였던 아빠에게 레슬링을 배우며

강해지고 싶다는 소녀에게 아빠가 말해요

'레슬링은 사는 거랑 같아

서 있는 사람이 있으면

넘어지는 사람도 있어'


그럼 넘어지지 않도록 노력할 거라고

자허는 말합니다

술 마시는 아빠 때문에 엄마가 죽었다고

왜 아빠가 아닌 엄마가 죽었냐는

자허의 말이 슬퍼요

아빠를 기다리는 엄마에게 전화가 오고

아빠를 찾으러 나갔다가 엄마는 죽었거든요


그닐 밤 소년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새아빠에게 화풀이를 하고 싶었던 거랍니다

'그날 밤 내가 기름통을 버리고 200미터를 뛰어갔으면 내 인생이 달라졌을까

더 괜찮게 살 수 있지 않았을까'

소년의 중얼거림도 슬프긴 매한가지죠


'물에서 좀 더 버티지 그랬어

네 엄마 복수도 할 수 있었잖아'

소년의 말에 소녀는 고개를 내저어요

'난 또 다른 네가 되는 게 싫어'


복수 대신 용서를 선택하는 자허는

아빠와의 사이에 단단히 버티고 있던 벽도

서서히 허물며 성장하고 성숙합니다

용서도 용기라는 생각이 들어요


사랑하는 엄마를 잃고 방황하고 분노하며

어린 소녀가 겪는 갈등과 혼란을

섬세한 감정 묘사와 표정으로 보여주는

소녀 배우 동은희 내면 연기가 돋보입니다

잘 자라면 영롱하게 반짝이는 별이 될 것 같아요


화면이 4:3 비율이라 좀 낯설어요

배경이나 주변 환경보다

인물을 중심으로 봐주기를 바라는

주순 감독의 의도랍니다


눈여겨보아야 하는 사람 대신

배경이나 환경이 더 먼저

눈에 들어온다는 것을

감독은 알고 있는 거죠


꽃 빛깔이 달라지며 깊어진

나무수국 꽃을 보며

마음으로 보아야 하는 소중한 순간을

무심히 건너뛰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문득 해봅니다


한여름 뙤약볕 말없이 견디고

가을바람에 고개 떨군 나무수국 꽃송이에게도

그 여름 가장 차가웠던 순간이 있었을 테죠

누구에게나 건너뛸 수 없는

아픈 만큼 귀한 순간이 있는 것처럼~

keyword
작가의 이전글초록의 시간 330 소중한 하루 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