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시간 319 구비구비 인생길

영화 '서편제'

by eunring

오래전 영화를 봅니다

한(恨)에 파묻히지 않고 한을 넘어서는

'서편제' 영혼의 소리를 듣습니다

이제는 나이가 든 배우님들의

어리고 젊고 풋풋한 모습과 마주하며

오래전 '서편제'를 보던

철없는 내 모습도 문득 돌아봅니다


인생이란 무엇이고 예술이란 무엇인지

소리꾼 아버지와 딸이 걸어가고

고수 아들이 머뭇머뭇 휘돌아가는

구비구비 고단한 삶의 길을 통해 보여주는

가슴 먹먹한 사연입니다


떠돌이 소리꾼 유봉(김명곤)과

수양딸 송화(오정해)와 아들 동호(김규철)

가족인 듯 가족 아닌 그들이

판소리를 통해 진정한 가족으로

거듭나는 모습이 구비구비 절절합니다


판소리 외길 인생 아버지 유봉은

수양딸 송화의 고운 목소리에

깊은 한을 심어주기 위해

일부러 눈먼 딸을 만들어요


'서편제는 말이다

사람의 가슴을 칼로 저미는 것처럼

한이 사무쳐야 되는데

니 소리는 이쁘기만 하지 한이 없어

사람의 한이라는 것은

한평생 살아가며 응어리지는 것이다

살아가는 일이 한을 쌓는 일이고

한을 쌓는 일이 살아가는 일이 된단 말이다'


득음의 경지에 대한 신념이거나

집착이거나 또는 욕망이거나

어쨌거나 아버지 유봉의 비정함까지도

소리에 대한 집념이고 고집인 것이죠


판소리에 대한 냉대와

궁핍한 생활에 지쳐 반항하는 아들 동호에게

'쌀이 나오고 밥이 나와야 소리를 하냐?

지 소리에 지가 미쳐가지고 득음을 하면

부귀공명보다 좋고 황금보다 좋은 것이여'


아버지의 고집과 신념 밖으로

아들 동호는 거침없이 뛰쳐나가지만

딸 송화는 모든 것을 운명처럼 받아들이며

가슴에 한을 새기고 소리에 한을 담게 됩니다


'이제부터는 네 속에 응어리진

한에 파묻히지 말고

그 한을 넘어서는 소리를 해라'


아버지 유봉은 송화의 눈을 멀게 한 일을

깊이 사과하고 숨을 거두죠

아버지가 한을 넘어서는

소리를 하라고 하셨다는 송화의 말에

욕심 보따리를 싸들고 갔겠다는

혁필화를 그리는 낙산 거사(안병경)

너털웃음이 유난히 씁쓸한 것은

점점 빛을 잃어가는 전통 예술에 대한

깊은 아쉬움이 담긴 까닭입니다


혁필화 한 장을 그려달라며

마음으로 보겠다는 송화에게

낙산 거사는 가죽 조각에 물감을 묻혀

송화라는 이름의 문자 그림을 그려줍니다


소나무 송(松) 자 위에 학 두 마리를 그려

천 년을 사는 학처럼 오래 살라는 마음을 담고

해처럼 밝으라고 해도 그려 넣고

꽃 화(花)를 그리면서는

꽃에는 나비가 따르는 법이라며

좋은 짝 만나 자식 낳고 살라고

나비도 그려줍니다


떠돌이 소리꾼으로서는

이룰 수 없는 꿈이 담긴 그림을

눈 대신 마음에 담고 돌돌 말아 간직하는

송화의 모습이 안타깝고 측은합니다

눈으로 볼 수 없는 그림 속에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도 함께

돌돌 말아 간직하는 것 같아요


소리꾼의 떠돌이 삶과 가난이 싫어

아버지와 누이 곁을 떠났던 동호는

그리움과 미안함을 끌어안고 찾아다니다가

마침내 누이 송화를 만나게 됩니다


주막 주인 천가(최종원)에게

소리하는 아낙이 있다는데

듣고 싶다며 소리를 청하자

요즘은 소리를 안 해서 어떨지 모르겠다고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송화를 데리고 나옵니다


'소리를 쫓아 남도천지 안 돌아본 데가 없소

소리만 있어주면 이대로 앉아 밤이라도 새우겠소'

그만큼 그리움이 깊었다는 동호 앞에

마주 앉은 송화의 기다림의 깊이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숙합니다


오랜만에 북을 잡는

동호의 눈에 고이는 회한의 눈물을

아는지 모르는지 송화는 소리를 시작합니다

'그때 심청이는~'


소리를 하다가 고개를 들어

동호를 바라보는 송화의 눈 속에

눈물인지 한인지 기다림인지 모를

세월의 기다림이 맺혀 떨어지고

북을 치며 장단을 맞추는 동호의 눈 속에

미안함인지 안타까움인지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그리움이 흐릅니다


긴 그리움과 오랜 기다림 끝에 만난

소리꾼 오누이 송화와 동호는

밤새 판소리로 재회하며

땀범벅 눈물범벅이 되어

소리로 통하고 마음으로 만납니다

소리로 서로를 다독이고 어루만지다가

다음날이 밝자 말없이 헤어집니다


동호의 북 치는 장단과 추임새가

아비 솜씨 그대로였다고 중얼거리는

송화에게 천가가 물어요

'기다리던 사람들끼리 왜 모른 척 지나쳤는가'

'한을 다치고 싶지 않아서였다'는 대답 끝에

소리와 북으로 한을 다 풀었다고 덧붙이죠


동호를 태운 버스가 떠나고

주막에 머문 지 삼 년이라는 송화는

다시 떠돌이가 되어 떠납니다


눈발이 꽃 이파리처럼 흩날리는 길을

빨간 옷 입은 아이의 줄을 잡고 떠나는

송화의 모습이 영락없는

떠돌이 소리꾼 아낙입니다

송화보다 앞서 걸어가는 빨간 옷의 소녀처럼

붉은 꽃 이파리 같은 여운을 남기는

영화 '서편제'를 눈 쌓이는 하얀 겨울에

다시 보아도 좋을 것 같아요


영화 속 판소리는 김명곤과 오정해

두 배우님의 실제 소리라고 하는데

마지막 장면의 '심청가'는

명창 안숙선 님의 소리라고 합니다


소리도 아름다우나

봄과 여름 가을과 겨울

사계절의 풍광도 잔잔히 아름답고

소리와 어우러진 장면들도 애틋합니다


떠돌이 소리꾼의 애잔한 삶이 깃든

'진도 아리랑'을 동호의 북장단에 맞춰 부르며

구불구불 구부러진 시골길을

덩실덩실 춤추며 내려오는 장면이

마음 안에 오래 남아요


'사람이 살면 몇 백 년 사나

개똥 같은 세상이나마 둥글둥글 사세

소리 따라 흐르는 떠돌이 인생

첩첩이 쌓인 한을 풀어나 보세'


어디 소리꾼들의 인생만이 떠돌이일까요

세상 모든 인생이 구름처럼 떠도는 인생이죠

세상천지 자유로이 새처럼 떠돌기도 하고

머뭇머뭇 제자리걸음으로도 떠돌기도 합니다


소리꾼 송화처럼 받아들이면서도 떠돌고

고수 동호처럼 박차고 나가서도 떠돌고

그러다 스치고 지나며 만났다 헤어지고

우연히 다시 만나기도 하고

아주 이별하기도 하며 사는 것이

구비구비 인생길인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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