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시간 334 빛을 향해 가는 길
영화 '빛과 철'
뿌옇게 흐린 오후
'빛과 철'이라는 차가운 제목에 끌려
영화를 보기 시작합니다
빛을 향해 가는 길은 결코 눈부시지 않아요
인생길이 보드레한 꽃길이 아니듯
차갑고 울적한 길입니다
'찬란'이라는 자막이 먼저 반짝이는군요
어두운 밤길 도로가에 넘어진
두 자동차를 스쳐 지나가는 화면에
불쑥 떠오르는 '빛과 철'이라는 제목 그대로
영화는 차갑고 묵직하고 울적합니다
하나의 사건 속에 숨겨져 있는
진실이라는 빛을 찾아가는 길이
거칠고 고통스럽습니다
빛을 향해 나아가는 걸음마다
날카로운 쇠붙이로 긁히는 듯한
고통이 스며들어요
눈부시게 환하고 밝은 빛이 아니라
고통의 핏빛이고 아픔의 쇳소리라 할지라도
외면하지 말고 마주해야 하는 것이죠
들어야 하는 것이고 말해야 하는 것이죠
의문의 교통사고 속에 함께 하는
음주운전과 산업재해와 이혼과 우울증 등
사고의 이유도 제각기 복합적이고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분도 분명하지 않아요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 다르고
처해 있는 입장에 따라 달라서
모두가 피해자일 수도 있으니까요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고
남편이 낸 사고라고 생각하며
상실감과 함께 죄책감을 끌어안은
희주(김시은)는 진실을 들어야 해요
남편은 살았으나 2년째 의식불명이라
나무둥치처럼 누워있는 남편을 간병하며
병시중에 지쳐가는 영남(염혜란)은
이제 진실을 마주해야 해요
아빠를 말리지 못했다는
딸 은영(박지후)은
침묵하지 말고 진실을 말해야 해요
고속버스에서 내려 고향으로 돌아온
희주는 5년 전 일하던 직장으로
다시 일을 하러 옵니다
어쩌다 그녀를 알아본 직장 선배가
조심스럽게 물어요
'괜찮아진 거야?'
그녀의 대답은 '괜찮아져야죠'
괜찮아지기 위해 고향에 돌아온 그녀는
건널목에서 얼핏 영남을 보자
죄인처럼 고개 숙이고 달아납니다
출근길에 버스에서 내리는 영남을 보고
황급히 돌아서는 희주는 사무실에서
일을 그만두겠다고 얘기하다가 영남과 마주치고
구내식당에서 조리사로 일하는 영남이
밥을 먹는 그녀에게 다가와 아는 척을 하자
희주는 또 달아납니다
퇴근길 희주의 뒤를 밟다가
주저앉아 우는 은영을 집에 데려간 희주는
반찬통에 적힌 이름을 보고
은영이 영남의 딸임을 알게 되는데요
은영은 엉뚱하게도 희주에게
부탁 하나를 들어달라고 합니다
희주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쓰러져가는 나무를 찾아 헤매던 은영은
갑자기 쏟아지는 비에 흠뻑 젖어 눈물을 흘리며
그 자리가 아빠 사고 난 곳이라고
근데 사고가 아니라 죽으려고
아빠가 일부러 사고를 냈다고 말하죠
나무둥치 같은 남편을 간병하는 영남은
느닷없이 남편 뺨을 때리며 눈물을 흘리고
은영을 내려주고 울며 돌아가는 희주는
혼란에 시달리다가 사건 재조사를 의뢰합니다
가족을 두고 쉽게 죽을 사람 아니라는
남편 동료의 말을 뿌리치는 영남도 안타깝고
죄책감이 증오와 분노로 바뀌며
이명에 시달리는 희주도 안쓰러워요
아빠의 손을 꼬집어보다가 명찰에 붙어 있는 핀으로 아빠의 손을 찔러 피를 내는
은영의 모습도 애처로워요
파견직으로 일하다가 허리를 다쳐
일어나지도 못하던 아빠가
운전을 하고 죽으려고 했었다는 걸
은영은 미리 알았으나 침묵했던 것이죠
양파껍질처럼 벗겨지는 비밀을
덮어두었더라면 오히려 나았을까요
그러나 진실은 그 무엇으로도
덮어버릴 수 없는 거죠
남편들의 진실에 가까이 다가설수록
그녀들의 고통은 더 깊숙이 묵직해집니다
남편이 깨어나면
진실이 밝혀질 거라고 믿는 영남에게
남편이 깨어났다는 연락이 오고
함께 병원을 향해 달리다가
갑자기 튀어나온 고라니를 피하려고
차를 멈추며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는
희주와 영남 그리고
고라니의 또랑한 눈빛으로
영화는 끝이 아닌 끝을 맺어요
고라니의 맑은 눈빛이 진실인 걸까요
그날의 진실은 바로 고라니였던 걸까요
먹먹함을 안고 진실의 빛을 향해
걸어가는 인생의 발자국마다
스미고 고이는 눈물이 차갑고 가혹하더라도
담담하게 마주하고 귀 기울이며 말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