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시간 782 수줍은 소년
모퉁이 아빠청년
아침이면 자주 만나는
엘베 소년이 있어요
엘리베이터를 타자마자
꼭 버튼 앞 모서리에 서서
얼굴을 바짝 박고 있어요
낯가림이 심한 수줍은 소년 같아서
먼저 인사를 건네기 시작했어요
안녕? 두 글자로 시작한 아침인사가
한두 마디 점점 늘어나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릴 때는
학교 잘 다녀와~
손까지 흔들게 되었죠
여전히 버튼 앞 모서리가
수줍은 소년의 지정석이지만
그 소년도 푹 수그린 고개를 들어
눈을 맞추며 빙긋 웃기도 하고
쑥스러운 듯 목례를 하거나
소리가 나는 듯 마는 듯
혼잣말 인사를 건네기도 합니다
아침 길에서 가끔 만나는
길 모퉁이 아빠청년도 있어요
수줍은 소년이 자라 어른이 되면
비슷한 모습이 되지 않을까
혼자 생각하며 웃습니다
아빠청년도 길 모퉁이에 서 있어요
애기띠를 하고 어린 아기를 안고 있는데
한 손으로는 큰아이의 손을 꼬옥 잡고
또 한 손에는 어린이집 용품 가방을 들고
어깨에도 묵직한 가방 하나 둘러매고
쑥스러운 듯 서성거립니다
아빠청년의 손에 잡혀 있는 큰아이도
수줍은 아이인지 아빠 귀에 대고
뭔가를 속삭이려고 까치발을 하면
아빠청년이 큰아이를 번쩍 한 손으로
끌어안으며 귀를 대어주는 모습이
사랑스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합니다
수줍은 소년이 자라면
모퉁이 아빠청년이 될 것 같아요
넝쿨장미는 이미 시들어
바스락 소리라도 날 것처럼
말라가고 있는데 뭐 볼 게 있다고
담장에 붙어 서 있는 걸까요
아빠청년이 늘 담장 모퉁이에 서서
어린이집 차를 기다리는 모습이
측은해 보이다가도
그에게 매달린 건 짐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생각이 들어
또 웃게 됩니다
예전 서양에서는
양배추밭에서 남자아기를
장미밭에서 여자아기를 데려온다는
전설이 있었다고 하죠
그래서 사내아기에게는 푸른 옷
여자아기에게는 분홍옷을 입혔다고 해요
남자니까 당연히
활발하고 씩씩하고 당당해야 한다는
푸른 옷의 편견에 나 역시 갇혀
아침에 만나는 수줍은 엘베 소년과
길모퉁이 아빠청년을
안쓰럽게 보고 있는 건 아닐까
문득 생각합니다
커다란 나무뿌리 옆에 수줍고 쑥스러운 듯
납작 엎드려 피어난 한 송이 보라 수국이
수줍은 엘베 소년 같아 보이고
길모퉁이 아빠청년 같기도 해서
한참을 내려다보며
혼자 중얼중얼~
소년도 수줍을 수 있고
아빠청년도 쑥스러울 수 있죠
누구나 그럴 수 있어요
남자 여자이기 이전에
사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