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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의 시간 892 꽃다운 시절

치자꽃 향기

by eunring

오늘이 동지라서

동지팥죽 사러 갔다가

황금빛 치자 열매를 만났습니다


명절로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동지는 낮이 짧고 밤이 가장 긴 날입니다

동지가 지나면 해가 하루하루

노루 꼬리만큼씩 길어지므로

해의 부활이라는 생각에

작은설이라고도 한다죠


죽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동지팥죽 한 그릇 뚝딱 먹으며

나이도 한 살 뚝딱 더 먹고

붉은 빛깔 팥의 힘을 빌어

나쁜 기운도 물리쳐야겠어요

작년에는 애기동지여서

건너뛰었으니 이번엔 제대로

한 그릇 챙겨 먹어야죠


그래서 시장에 갔습니다

가까운 죽전문점도 있으나

국산 팥이라고 떡하니 써 붙인

시장 할머니 가게의 팥죽이

달지도 않고 괜찮거든요


솜씨도 없고 할 줄도 모르니

여기저기서 이것저것 먹어보고

어느 가게 무엇이 내게 잘 맞는지

정해 두고 대충 해결하는

꽝손의 생존 비법인 셈입니다


죽집에서 죽 한 그릇 포장하는데

바로 옆 가게 앞에 내어놓은

치자열매가 한 바구니가 눈에 들어와

신기한 마음으로 들여다보았어요


치자꽃은 해맑은 하양인데

꽃향기는 달콤함이 진하고

밝고 선명한 주홍빛 열매는

꼭 다문 입술 모양으로 야무집니다

단무지 등에 식용 색소로 쓰여

황금빛 물을 들일 수 있으니

귀한 꽃이고 열매라는 생각이 들어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붉은 동지팥죽과

노랑 치자 열매의 만남이

뜬금없으면서도 반갑고

사랑스러운 마음이 들었어요


꽃다운 시절 울 엄마가

치자꽃을 좋아하시던 생각이 났거든요

작은 화분에서 피어난 치자꽃

하얀 꽃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던

울 엄마는 총명하고 젊고 외롭고

치자 열매처럼 말이 없으셨죠


동지팥죽을 포장하고는

근처 옷가게에서

이제는 젊지 않으나 여전히 외롭고

치자 열매보다 더 굳게 입을 닫으신

엄마를 위해 꽃무늬 고운

포근 덧신도 하나 샀습니다


동지 풍습 중 하나가

웃어른의 장수를 기원하며

버선을 만들어드리는 것이라는데

바느질 솜씨도 없는 꽝손이니

아쉽지만 덧신으로 대신합니다


동지팥죽 먹고

나이 한 살 더 먹었으니

치자열매처럼 야무지고 쓸모 있게

치자꽃처럼 맑고 향기롭게

치자빛처럼 고운 마음으로

또 한 해를 살아야겠어요


굳게 마음먹는다고

마음대로 살아지지는 않겠지만

마음이라도 단단히 먹어야 그나마

작은 한 걸음이라도 내딛게 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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