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로하다 425 환상의 빛
현실의 벽을 비추다
TV가 고장 나서 바꾼 지 얼마 되지 않아
처음에는 TV에 문제가 있나 생각했다
화면이 문득 흑백영화처럼 어둑해졌기 때문이다
장면이 환하게 다시 밝아지는 순간 알았다
환상의 빛을 드러내기 위해
현실의 벽과도 같은 어둠이 진하게 깔려 있음을
막막한 어둠의 벽과도 같은 인생
변수가 많고 불확실한 현실의 삶 위에
눈부시게 환한 환상의 빛으로 다가서는
영화 '환상의 빛'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데뷔 작품이다
주인공 유미코는 학생 시절
할머니가 행방불명된 기억에 묶여 있다
할머니를 붙잡지 못했다는 자책감으로
마음 한구석이 체한 듯 늘 묵직하다
동네에서 함께 자란 이쿠오와 결혼해
어린 아기와 함께 평온한 일상을 보내던 중
이쿠오는 퇴근길에 선로 위를 걷다가
기차를 마주 보며 멈추지 않고 그대로 걸어간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이쿠오의 자살로
유미코의 상실감과 자책감은 더욱 깊어진다
묵직한 어둠의 시간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유미코는 어린 딸을 키우는 남자를 만나
재혼을 하고 아들과 함께 바닷가 마을로 떠나와
새로운 가족과 함께 살아가지만
그녀는 여전히 환하게 웃지 못한다
어두운 빛깔의 옷을 입고
표정 없는 얼굴에 그늘을 드리우며
파도소리에 젖어드는 그녀의 일상은
때로 무표정한 그녀의 얼굴을 닮아 보이지만
순간순간 밝고 눈부신 빛이 스며들어
후광처럼 그녀를 비춘다
남매가 놀다가 돌아오는 터널에서
반짝이던 밝은 녹색의 빛은 명랑하고
온 가족이 마루에 앉아
빨간 수박에 소금을 뿌려먹을 때
아이들의 옆얼굴에 쏟아지는 햇살은 투명하다
막막한 삶을 비추는 환상의 빛과도 같이
뒷마당을 적시는 햇빛까지도 눈부시게 아름답다
고개를 숙인 채 천천히 계단을 닦아 내려가는
그녀의 자줏빛 원피스 등 뒤로
내리쬐는 햇발은 눈 시리게 따스하고
엎드려 계단을 닦다 문득 멈추는
그녀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순간도
잠시 정지된 듯 적막하게 아름답다
어둑한 기차의 안과 대비되는 차창 밖의 밝음과
그녀의 무표정도 묘하게 어우러진다
아이들이 부르는 '장난감 차차차' 노랫소리를 안고
그녀는 남동생 결혼식을 보러
친정집에 다니러 간다
아이들을 친정엄마에게 맡기고
이쿠오의 흔적을 찾아 서성이는 그녀에게
이쿠오가 퇴근길 카페에 들러 커피를 마시고
실없이 웃다 돌아가는 길에 기차에 치었다고
카페 주인이 말한다
지갑을 안 가져왔다고 내일 커피값을 준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는
그녀의 심정이 어떨지 감독은 말해주지 않는다
그녀의 그늘진 무표정으로 대신한다
남편이 일하던 곳을 둘러보는
그녀의 발아래 햇살이 머무르지만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어둡고 무표정하다
이쿠오에 대한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녀 곁에서 바닷물결은 쉴 새 없이 찰랑이고
햇살은 곳곳에 머무르지만 그녀는 늘 어둡고 춥다
어둠 속에서 빠끔 문이 열리고
조그만 창문 밖에서 밀려드는 파도소리와
그녀의 어슴푸레한 옆얼굴에 머무르는
상실감이 소리도 없이 강하다
창문을 닫지 않으면 방안에 고드름이 맺히는
시리고 찬 겨울날 게를 잡으러 바다에 나간
이웃 할머니 토메노가 돌아오지 않자
그녀의 걱정과 어둠은 더욱 깊숙해지고
토메노 할머니는 다행히
무사한 모습으로 돌아오지만
이제 더는 그녀 안에 쌓인 묵직함을
눌러둘 수만은 없게 된다
하얀 눈꽃이 벚꽃잎처럼 흩날라는
바닷가 장례 행렬은 검정 일색이고
하늘은 연회색 바다는 진회색이며
혼자 뚝 떨어져 뒤따르는 그녀의 실루엣은
더욱 느리고 진하게 응어리진 검정이다
방울소리 찰랑대는 음악을 뒤따라 걷는
그녀의 모습이 한 자락 인생의 파도 같다
누군가의 장례식이 끝나 모두 돌아간 바닷가에
홀로 우두커니 서 있는 그녀를 찾아온 남편에게
그녀가 마침내 묻는다
전 남편이 왜 그렇게 죽었는지 모르겠다고
그 생각이 떠오르면 멈추지 않는다고
남편은 대답 대신
자신의 아버지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때 어부였던 그의 아버지는
혼자 바다에 나가면
멀리서 반짝반짝 빛이 부른다고
그 후로 아버지는 바다에 나가지 않는다며
누구나 그런 경험을 하지 않느냐고 말한다
그녀의 물음에 대한
선명한 답이 되지는 않을지라도
적어도 위로는 되었을 것이다
장면은 다시 환하게 밝아지고
집 앞에서 자전거를 타는
아들의 경쾌한 목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어두운 기억을 떨쳐내듯
흰 블라우스에 파랑 스커트를 입고
밝은 햇살 속에 등장한다
아름답게 반짝이는 현실의 빛이다
날씨가 풀렸다는 그녀의 말에
좋은 계절이 왔다고 대답하는 시아버지와
나란히 앉은 옆모습이 환하다
자전거를 타는 아이의 웃음소리 해맑고
바닷가 마을 풍경도 평화롭게 다가오며
잔잔히 깔리는 피아노곡을 배경으로
바다를 향해 열린 조그만 창 가득
바다의 푸른빛이 아름답게 차오른다
삶이 온전히 자신의 몫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들이 있음을
그녀도 받아들였을 것이고
바다의 푸른빛으로 맑아진 그녀는
새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어둠을 딛고 힘차게 살아갈 것이다
멍하니 서 있거나
무표정하게 머무르지 않고
다시 일어나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지난 시간들 속의 어두운 기억에서 벗어나
일상의 평온함을 되찾을 거라고 믿는다
잃고 이별하며 그래도 어김없이
계속되는 것이 우리의 삶이고
아프게 기억하고 되새기다가
때로 잊고 문득 웃기도 하며
살아가는 인생의 소중함을
그녀도 비로소 알게 되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