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로하다 650 흩어지는 바람처럼

영화 '와호장룡'

by eunring

내게도 중2 시절이 있었고

어김없이 중2병을 겪었는데

내 중2병은 반항도 저항도 아닌

무협소설 중독증이었다


책가방 가득 무협소설책을 넣어가서

교과서 밑에 두고 읽던 시절이 있었다

축지법이니 장풍이니 신기하고 재미나고

독은 독으로 해독한다는 이야기가

그럴 법도 해서 고개 끄덕여가며

푹 빠지던 철없는 중2 시절을 떠올리며

'와호장룡'을 다시 본다


주윤발은 큰오라버니처럼 너그럽고

양자경은 존재만으로도 멋지고

장쯔이는 무모함까지도 눈부시게 예쁘고

장첸은 서툴지만 산바람처럼 풋풋하다

'와호장룡'은 번을 봐도

볼 때마다 새롭고

슬프고도 아름답다


무당파의 마지막 무사 리무바이(주윤발)는

사매인 수련(양자경)과 평생 이루지 못한

안타까운 사랑을 간직한 채

부질없는 모든 것을 내려놓으려는 순간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용(장쯔이)이

무당파의 수제자 재목임을 알아본다


진정한 힘은 새털처럼 가볍고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며

정 속에서 동을 배우라는

리무바이(주윤발)는

용(장쯔이)에게 이미 사부인 셈이고

리무바이는 사부로서 감수해야 할

위험을 피하지 않고 온전히 받아들인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으나

자유로운 삶을 살고자 했던 용과

흙수저로 태어나 별똥별을 찾아 떠났다가

마적이 되어 용을 납치하고 사랑했던 호는

아직도 별똥별을 찾는 어린애라는 용의 말에

자신은 이미 어른이고 가장 밝은 별을 찾았다며

진실한 마음은 꿈을 이루게 한다고

굳게 믿는 사랑꾼이지만

용은 집안에서 정한 혼례와

호를 향한 사랑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다


뒤늦은 사랑의 고백 타임이 되는

리무바이와 수련의 티타임 자리에서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고

주먹을 꽉 쥐면 아무것도 없지만

주먹을 놓으면 그 안에 모든 게 있다고

말하면서도 수련의 손을 잡는 리무바이는

아직 다 내려놓지 못한 셈이다


결혼은 안 해도 되지만

부모를 떠나서는 안 된다고

호가 무당산에 있으니 진실한 삶을 살라는

수련에게 용은 청명검으로 맞선다

우정을 끝내고 대결하는 용과 수련의

화려하고 치열한 한판 승부가 인상적이다


나무막대 하나로

청명검을 든 용을 제압하면서

나비처럼 대숲을 날으며 벌이는

리무바이와 용의 대결도

시처럼 아름답고 유려하다


무늬만 대결일 뿐

리무바이가 막대 하나로

용에게 무공을 가르치는 장면인 셈인데

날아오르다가 내팽개쳐지다가

춤이라도 추듯이 휘청거리며

춤추듯 나부끼는 모습이 그림 같아서

초록 대숲의 대결 장면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가르침을 받으라는 리무바이를 피해

물속으로 뛰어드는 용을 데려간

유모 푸른 여우는

용이 자신을 속인 것에 대해 복수하고 죽는다

독침에 중독된 리무바이를 안고

해독약을 가져올 용을 기다리는 수련에게

리무바이는 아껴야 하는 마지막 숨을

사랑한다는 고백으로 토해낸다


유령이 되어서라도 수련의 곁을 맴돌고 싶다는

안타까운 고백까지도 적막하고 쓸쓸한

리무바이와 수련의 사랑이

애틋한 여운으로 남는다


용은 호가 기다리는 무당산으로 가지만

믿으면 반드시 꿈이 이루어진다며

호가 사막에서 함께 지내고 싶다는

간절한 소원을 비는 사이에

흩어지는 바람처럼 아래로

거침없이 떨어져 내린다


자유를 향한 용의 열정과

용을 향한 호의 사랑은

미완성의 꽃잎으로 나풀나풀 떨어지고

무공도 사랑도 덧없이 흐트러진다


수련은 리무바이의 기억을 안고

호는 용의 기억을 끌어안고

남은 시간들을 버티며 살아갈 것이다

삶도 죽음도 어차피 흩어지는 바람이고

인생은 떨어지는 잎 하나처럼 덧없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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