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8월 28일
오늘 퇴근하고 집에 오는 길에 헌책방에 잠시 들렀어.
오늘은 정말 너무 피곤해서 빨리 집에 가서 낮잠을 자려고 했는데
왠지 그냥 책방에 잠시 들르고 싶었어.
그런데 책방에 들어가자마자 갑자기 밖에서 비가 쏟아지는 거야
차라리 잘됐다는 마음으로 비가 그칠 때까지 느긋하게 책을 구경했어.
사진집 코너에서 책을 뒤적이는데,
장영식 사진작가의 <밀양 아리랑>이라는 책이 눈에 띄었어.
책을 펼친 순간, 나는 움직일 수가 없었어.
밀양 송전탑에 대한 다큐멘터리 사진집이었어.
나는 몰랐어.
밀양 송전탑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어.
밀양의 시골 마을 노인들이 온몸을 던져 투쟁했던 10년의 시간,
2012년 1월 16일, 故 이치우 어르신의 분신,
2013년 12월 2일, 故 유한숙 어르신의 음독,
2013년 5월 22일, 127번 현장에서의 절규,
2014년 6월 11일, 행정대집행의 야만적인 폭력.
사진 속에서
밀양의 어르신은 쇠사슬을 몸에 감았어.
자신들의 몸을 포클레인에 묶었어.
옷을 벗고 인분을 던지며 울부짖었어.
경찰과 한전 직원과 용역은 온몸으로 저항하는 어르신의 사지를 붙들어 내던졌어.
밥그릇을 발로 차고, 입에 담지 못할 욕설로 조롱하고,
분향소를 부수고, 농성장을 무너뜨렸어.
그 사진들을 보면서
나는 치를 떨었어.
공권력의 끔찍한 폭력과
나의 끔찍한 무지에 치가 떨렸어.
나는 내 무지를 저주해.
나의 이 천박한 순수함을 용서할 수가 없어.
세계 최고의 핵발전소 밀집도를 가진 대한민국에서,
사람의 목숨 위에 765kV 초고압 송전탑을 짓는 대한민국에서,
이 여름, 실내에서 긴 팔을 입고 일하는 나를 용서할 수 없어.
저번 주에는 집 에어컨이 고장 나서 며칠간 에어컨 없이 생활했어.
창문을 열고 선풍기 바람을 쐬며 내가 룸메에게 말했어.
“지구에 양보한다고 생각하자”.
나는 이런 끔찍한 말을 내뱉어.
‘지구’가 뭐니.
‘지구’라는 단어로 왜 분명히 실재하는 피해자의 존재를 지우려하니.
밀양이 지구야.
밀양의 어르신이 지구야.
‘양보’는 또 대체 뭐니.
만물이 마치 원래 내 것인 양 행세하는 이 소름 끼치는 저급함.
나는 정말 나의 무지를 증오해.
나는 정말 왜 이러니.
왜 이것밖에 안되니.
왜 이러고 사니.
밀양의 할머니들이 알몸으로 사지가 붙들려 내던져질 때
나는 그때 뭘 하고 있었을까.
아마 에어컨을 쐬며 책이나 읽고 있었겠지.
그들의 피를 빨아먹는 한 마리 모기였겠지.
책을 덮어도 밀양이 자꾸만 따라와 물어.
“왜 사니?”
“너는 대체 왜 사니?”
“왜 살아서 나를 괴롭히니?”
그럼 나는 도망치면서, 울면서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그 장면만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되풀이돼.
책의 서문에서 밀양 765kV 송전탑 반대대책위 이계삼 사무국장은 말해
“밀양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밀양은 끝날 수 없는 싸움이다. 밀양이 남긴 과제를 받아 안아야 할 책임은 이 사회, 우리들 자신에게 있다. 우리는 윤리적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우리가 발 딛고 서있는 곳이, 우리에게는 공기와 같은 존재가 된 이 전기가 도대체 어디서 어떤 고통을 딛고 왔는지, 이 악업의 연을 끊을 수 있는 길은 어디인지, 탄광 속 카나리아와 같은 노인들의 절규가 애처로운 울음이 아니라 실은 우리의 존재 기반을 허물어뜨리는 이 끔찍한 원전 대국의 밑바닥에서 울려 나온 비명임을 깨달았을 때, 그때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
오늘 밤 밀양의 어르신들이 꿈에 나와 물을 것 같아.
“아야 니는 코로나가 무섭나?
폭염이 무섭나?
홍수가 무섭나?
나는 니가 더 무섭다.
그러고 가만히 있는 니가 더 무서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