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9월 17일
너무 오랜만에 편지를 쓴다
이러다가 당일 생산이 아니라 주일 생산이 되는 건 아닌가 몰라.
혹시 기다렸니?
요즘은 예전보다 시간도 더 많아졌고, 바쁜 일도 없는데
글쓰기가 힘들었어.
마음이 푸석푸석 메말라있었다고 해야 하나.
일상의 작은 변화를 감지할 만큼 깨어있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
책도 읽지 않고, 글도 쓰지 않으니
너에게 해주고 싶은 말도 찾지 못했던 것 같아.
최근에 좋아하는 일을 계속하기 위해서
지원사업 신청서를 준비하고,
전셋집을 알아보고,
전세대출을 알아보고,
그러는 데 온 신경이 쏠려서
정작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에 집중할 여유가 없었어.
하지만 모든 일이 그런 게 아니겠니. 좋기만 한 게 어디 있겠어.
내가 하고 싶은 걸 계속하기 위해서는
이런 지난한 행정절차와 수많은 서류 업무도 감당해야 하는 것이겠지.
너무 마음 뺏기지 않는 선에서 의연하게 잘 해내고 싶어.
이렇게 마음이 푸석하고, 찌뿌둥하고, 허할 때
내겐 특효약이 있어.
서점에 가는 거야.
그래서 오늘은 퇴근하고 집에 오는 길에 오랜만에 헌책방을 들렀어.
진짜 마음에 드는 책 딱 한 권만 사야지하고 들어갔는데,
역시나 나올 때는 어느새 두 손 가득 책이 들려있고,
결국 오늘 책방에서만 5만 원 가까이 지출했어.
오늘 내가 산 책은
<녹색평론> 열네 권,
<오늘은 맑음-망원시장 여성상인 구술생애사> , 최현숙
<행복의 정복>, 버트런드 러셀
<마티스-원색의 마술사>, 시공 디스커버리
<후쿠시마에 남겨진 동물들>, 오오타 야스스케
<기초 인물화 수업>
1982년 인쇄본 <인형의 집> 이야.
두 손 가득 책을 들고 서점을 나오는데 기분이 아주 좋아졌어.
지원사업, 전세대출, 자유적금, 임대주택 같은 것들로 움츠러든 마음이 활짝 핀 것 같았어.
서점에 들어갔다 나오면 나는 언제나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어.
이슬아 작가의 서평집 <나는 다시 태어나려고 기다리고 있어>처럼
서점은 내가 다시 태어나려고 기다리는 곳이야.
잠들어 있던 내가 다시 세상 밖으로 나가려고 꿈틀거리는 포궁이야.
절대 이전과 같은 모습으로 나올 수 없는 곳.
이 책을 읽고 나면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
녹색평론을 읽고 난 다음 나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후쿠시마에 남겨진 동물들은 내게 어떤 말을 건넬까.
기초 인물화 수업을 보고 그림을 더 잘 그릴 수 있다면 좋겠다.
그래서 나는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예상에 없던 큰 지출이었지만
역시 책 사는 돈은 하나도 아깝지가 않아.
계속 계속 다시 태어날 수 있게
책 살 돈을 계속 벌어야지.
그리고 돈 버느라 마음이 푸석해지면
다시 책으로 적시면서 살아야지.
지칠 때마다 포궁으로 다시 돌아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