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순간들

셋째 주

by 유은강

남자친구가 오늘 박총의 <읽기의 말들>에서 발췌한 글을 보내줬다. “삶의 매 순간이 반짝이길 바랐다. 내가 멈추는 자리마다 의미가 꽃피길 구했다. (중략) 그러나 극적이고 감동적인 순간이 아니라 없어도 그만인 시간이 나를 치유하고 회복시켰음을. 이 우매한 사람은 이제야 깨우친다”.


2월은 정말 바빴다. 주변을 돌아볼 여유도 없이 일에만 매달렸다. 매주 글 한 편씩 쓰겠다는 야심 찬 새해 다짐은 예상한 대로 점점 뒷전으로 물러나고, 글쓰기는커녕 책 한 줄 읽을 의욕조차 없었다. 엉망으로 어질러진 집 상태가 그동안의 나의 심리상태와 생활을 말해주고 있었다. 처참한 방을 정리하고 남자친구가 오늘 아침 보내준 글을 다시 한번 읽어보았다. 그러고 보니 박총의 말처럼 ‘없어도 그만인 시간’이 있어서 그나마 이만큼이라도 버틸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집 바로 옆 골목에는 시장이 하나 있다. 그 시장에 ‘뉴욕 빵집’이라는 가게가 있는데, 아침에 가장 일찍 문을 열고 밤에는 시장에서 제일 늦게 문을 닫는다. 얼마 전 식빵을 사러 갔다가 정말 늦게까지 문을 여신다고, 힘들지 않으시냐고 인사말을 건넸다. 그랬더니 사장님은 함박웃음을 지으시며 기다렸다는 듯이 “밤 열 두시까지 열어요. 요즘에는 열 한시 삼십 분에 들어가고. 빵은 오래되면 팔 수가 없으니까 늦게까지라도 열어서 다 팔아야지. 또 빵은 매일 만들어야 되니까 새벽같이 열어야 되고”. 계산을 하고 가게를 나서며 오늘은 문을 닫기 전까지 진열된 빵이 모두 나가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아침마다 같은 시간에 같은 버스를 타는 아주머니가 있다. 내가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면 그분은 항상 내 앞에서 100m 달리기하듯이 열심히 뛰어가신다. 어느 날은 정류장에 조금 늦게 도착해서 종종거리고 있는데, 먼저 도착한 아주머니가 버스들이 벌써 다 갔다며 “아가씨 나랑 매일 같이 타잖아”하고 말을 거셨다. 순간 경계가 허물어지고 긴장이 풀리면서 웃음이 나왔다. 그 뒤로 그 아주머니와 매일 아침 인사를 나눈다. 오늘은 걸어가는 내 뒤에서 뛰어오시며 “빨리 갑시다~” 하시는 바람에 나도 덩달아 달렸다. 뜀박질한 보람없이 바로 눈앞에서 버스를 놓치고 다음 버스를 기다리는데, 아주머니가 핸드폰에 담긴 꽃 사진을 보여주셨다. 나뭇가지에 하얀 꽃이 피어 있었다. 어디에 벌써 꽃이 피었냐고 물으니 청도라고 하신다. “벌써 이렇게 꽃이 폈어. 계절은 바람 타고 온다더니 그 말이 맞나봐”. 아, 계절은 바람을 타고 오는구나. 새 친구 덕분에 이렇게 봄 소식을 알게 되는구나.


뉴욕빵집 사장님과 아침 버스 아주머니 외에도 삭막한 내 삶 사이사이에 들어와 평범한 순간으로 나를 위로해준 많은 분들께 감사를 드린다. 나는 과연 그대들에게 그런 순간이었을까.


내가 무심코 지나쳤던 그 순간들이 나를 지탱해 왔음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없어도 그만인 시간’들이 지금처럼 항상 내 곁에 ‘있어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뉴욕 빵집이 장사가 잘 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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