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샘 Dec 13. 2023

부동산 투자, 금손 vs 똥손

[포세일]  경매가 이렇게 재밌어도 되나요?

  10여 년 전 결혼을 앞두고 어릴 적부터 자매처럼 지내온 친구 A를 만났다. 그 친구는 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에 괜찮은 아파트를 한 채 사서 신혼집을 얻으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수도권 외곽 지역이어서 매매가는 예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서울에서 줄곧 살아온 내게 그곳은 멀게만 느껴졌고, 굳이 집을 매매할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고민할 것도 없이 직장에서 가까운 서울 모처에 전셋집을 얻어 신혼을 시작했다. 이후로 집값이 요동칠 때마다 '그때 그 충고를 들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후회를 얼마나 자주 했던지.


  미혼의 젊은 나이에 A는 왜 집을 꼭 사라고 권했을까. 집 없는 설움을 이미 느껴봤기 때문일 것이다. 그 친구는 1990년대 초반부터 괌 등의 해외 휴양지로 여름휴가를 다닐 정도로 유복하게 자랐다. 하지만 대학 시절 IMF 사태를 직격탄으로 맞아 아버지 사업이 부도나면서 집안이 풍비박산이 되었다. 강남 아파트는 경매에 부쳐졌고, A의 가족은 허름한 상가건물 3층에 세 들어 살게 되었다. 몇 번의 이사를 거쳐 수도권 Y시에 작은 집을 얻고 나서야 A는 비로소 안정을 되찾았다. 훗날 A는 가혹한 현실을 온몸으로 겪어내고 보니 집이 단순히 물리적인 공간 이상의 의미가 있음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새 옷은 안 사 입으면 되고 음식은 허기를 다스릴 정도로만 먹으면 그만인데 당장 몸 누일 곳이 없어지니 황망하더라는 것이다.


  20대 초반 나와 A는 그녀의 집이 경매로 넘어가는 순간에도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알지 못했다. 몇 번인가 경매가 유찰되었다는 소식에도 그 심각성을 몰랐다. 막연히 집이 팔려야 빚을 갚을 수 있겠다고 짐작했을 뿐. 다만 A에게 고통이 쓰나미처럼 몰려왔던 1997-98년 이후 내게 '경매'는 '부도'와 늘 짝을 이뤄 다니는 공포스러운 말로 각인되었다. 더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데 몇 해 전 경매 주제 기능성 보드게임 <포세일>을 알게 되었다. 하필 1997년에 스테판 도라가 디자인한 게임이었다. 경매가 경제 교육 차원에서 다뤄진다는 사실도 놀라운데, 심지어 이토록 흥미로울 수 있다니. 관심을 안 가지려야 안 가질 수가 없었다.




  재테크와 부동산 투자에 일가견이 있는 B 언니가 준이(가명)를 데리고 우리 집에 놀러 온 날, 야심 차게 <포세일>을 꺼냈다. 내가 이래 봬도 보드게임 계에서는 부동산 금손이라고 큰소리를 뻥뻥 쳤다. 현실에서야 돈도 없고 촉도 없는 똥손이지만 이건 게임이 아니던가. 준이, 우리 집 남매 시우(가명)와 가비(가명)를 빙 둘러앉혀 놓고는 '경매란 무엇인가'부터 입찰이니 낙찰이니 하는 경제 용어들까지 줄줄이 알려 주었다. 온갖 잘난 척을 다 하는 내 앞에서 언니는 가소롭다는 듯이 웃고만 있었다.



  <포세일>은 두 단계로 진행된다. 첫 번째 단계는 부동산 구입이다. 부동산 카드를 게임 참가자의 수만큼 앞면이 보이도록 뒤집어 놓는다. 테이블에 놓여 있는 모든 부동산은 경매에 입찰되고, 입찰은 모든 플레이어가 포기할 때까지 계속 이어진다. 입찰에 성공한 부동산은 구매한 플레이어가 가져간다. 이 과정은 부동산 카드 총 30장이 전부 판매될 때까지 반복해서 진행된다. 부동산 카드가 랜덤으로 나오니 어느 타이밍에 투자해야 할지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 때론 과감하게 입찰했다가 만만치 않은 상대를 만나 돈을 과용하게 될 때도 있다. 낙찰을 받으면 그나마 다행이지. 돈이 모자라 중도 포기하게 되면 투자금의 반을 빼앗기고 부동산도 얻지 못한다. 이만저만한 낭패가 아니다.


  두 번째 단계는 부동산 판매이다. 이미 구매한 부동산 카드를 판매하여 돈을 벌 시간이다. 이번에는 참가자의 수만큼 화폐 카드를 금액이 보이도록 놓아둔다. 역시 랜덤이다. 이를 확인한 플레이어는 각자 구매한 부동산 카드 중 하나를 뒷면이 보이도록 내려놓는다. 그러고는 동시에 모두의 카드를 뒤집어 가장 높은 가치의 부동산 카드를 낸 순서대로 가장 높은 가치의 화폐 카드를 가져간다. 게임 참가자들의 희비가 크게 엇갈리는 순간이다. 노숙자가 빗방울을 피해 간신히 숨어들 것 같은 종이박스를 3천 달러에 팔아 치우는 옆 참가자를 보면 약이 바짝 오른다. 왜 내게는 그런 행운이 따르지 않는지. 만 달러나 주고 산 유럽의 고성이 9천 달러에 팔리는 경우는 또 어떤가. 값비싼 부동산을 손에 쥐었다고 해도 구매 가격보다  비싸게 되팔지 못하면 투자는 말짱 도루묵이다. 역시 부동산은 눈치게임인가 복불복인가.


코인은 게임 시작 시 모든 참가자에게 똑같이 주어지며, 부동산 구입에 쓰인다.


  아이들의 엉덩이가 들썩거리며 어서 게임을 시작하자는 원성이 터져 나오기 직전이다. 가장 중요한 성공법칙 두 가지를 알려줘야 할 때이다.


1. 최고의 투자는 싸게 사서 비싸게 파는 거야.
2. 수중에 얼마를 가지고 있는지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 마.


  이 게임은 부동산 투자왕을 만드는 데 목적이 있다. 가장 적은 돈으로 가장 가치 있는 부동산을 사고, 구매한 부동산을 가장 높은 가격에 판매해야 한다. 즉 사고파는 과정에서 차익을 거두는 것이 중요하다. 멋진 집을 꼭 사려고 무리해서 큰돈을 들여서는 안 된다. 경매장 분위기에 휩쓸려 우주정거장을 화폐 카드의 최고가(1만 5천 달러) 이상으로 비싸게 사지 않도록 주의하자. 손해 보는 장사다. 혹시 마음에 드는 부동산이 없으면 처음부터 입찰을 포기하고 가장 낮은 가치의 부동산을 공짜로 갖는 편이 낫다. 나중에 소액이라도 수익을 남길 수 있으니 말이다. 이만하면 이론은 빠삭한 셈. 당장 부동산 경매에 나서도 잘할 것 같다. 착각은 자유니까.


  한편 경매에서 원하는 물건을 얻기 위해서는 수중에 얼마를 가지고 있는지를 상대에게 숨긴 채 (최소한 겉으로는) 자신 있게 입찰에 응해야 한다. 손이 작은 아이들은 코인을 소매 안에 숨기거나 엉덩이에 깔고 앉으며 철통 보안을 유지한다. 가끔은 코인을 지나치게 꽁꽁 숨겨둔 나머지 본인도 잊어버리는 등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는 일도 일어난다. 어린 아이들이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기란 말처럼 쉽지 않다. 동공이 흔들리고 입가가 씰룩대는 와중에도 끝까지 모르쇠로 버티는 뻔뻔한 귀여움을 어쩌겠는가. 못 본 척해 줄 수밖에.




  이 게임을 즐기는 과정에서 아이들은 자신의 돈을 현명하게 사용하고 관리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주어진 돈으로 평범한 주택 두세 채를 살 것인지 아니면 통유리를 자랑하는 미래형 초고층 빌딩을 살 것인지는 오롯이 본인 결정에 달려 있다. 누구도 모든 걸 원하는 대로 다 가질 수 없으며,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는 것을 체득한다. 그런데다 경매 프로세스까지 쉽고 재미있게 배울 수 있다. "입찰하겠습니다!"라고 힘껏 외치게 만드는 <포세일>을 즐기지 않을 이유가 없다. 안타깝게도 국민의 주거 안정성이나 집값 안정과 같이 건전한 정책 수립과는 거리가 멀긴 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날의 대전에서는 초심자 B 언니가 베테랑 은샘을 제대로 이겨 버렸다. 소 뒷발질로 쥐 잡은 격이라고 우겨 보지만 내심 부럽다. 부동산 금손 언니 옆에서 콩고물 떨어지기나 기다려 봐야 하나.



* 제목 배경이미지 출처 : 픽사베이


매거진의 이전글 울고 싶은 날에도 보드게임은 재미만 있더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