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에게는 휴식이 필요하다.
작년까지 일하던 회사에서는 '일하는 방식의 변화'라는 화두에 많은 사람들이 매달렸습니다. 그것이 많은 직원들의 공감보다는 위로부터의 운동(movement)으로 진행되었기에 그 진정성을 의심하는 직원들도 있었지만, 그 필요성은 누구나 깊이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일하는 방식의 변화'의 가장 큰 특징은 '투입량(input)' 즉 얼마나 많은 man month, man day, man hour 가 투입되는가, 또는 특급/고급/중급/초급 기술자 등의 구분이 아니라, 어떤 산출물 또는 결과물(output)'을 만들어 내는가에 관리와 평가의 기준을 두는 것이었는데, 과거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때부터 근면/성실을 가장 큰 덕목으로 배우고 살아온 우리에게는 큰 변화가 필요한 일입니다.
야근을 하고도 고객이나 상사를 실망시키는 것이 두려워 덤으로 주어지는 일을 거절하지 못하면서 항상 피곤하고 힘들어하는 자신에게 실망합니다. 이제 막 직장생활을 시작하는 아들의 월화수목금금금과 매일 야근의 모습을 다시금 지켜볼 수 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까우면서도 참고 견디라고 몰아붙이는 것이 우리네 세대의 한계입니다.
최근에 '게으르다는 착각'이라는 책에 대한 소개를 읽었는데, 마치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읽는 것 같았습니다. 저자는 '게으름이란 없다, 존재하지 않는다. 게으름으로 보이는 것은 대개 과로, 쇠약해진 정신건강, 번아웃을 가져오는 환경에 대한 투쟁의 징후일 뿐'이라며, '한계가 있고 휴식이 필요한 것은 죄악이 아니며, 일중독 문화에서 살아남기 위한 발버둥'이라고 합니다.
'게으르다'는 영어 단어 lazy는 1540년 영국에서 처음 등장했는데, '연약한(feeble) 또는 약한(weak)'이라는 뜻의 옛 독일어 'lasich'이 어원이거나, '거짓(false)' 또는 악(evil)'이라는 뜻의 고대 영어단어 'lesu'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결국 '게으르다'는 것은 약해서 일을 완수할 수 없음을 비난하는 것으로 능력이 없음을 도덕적 잘못으로 연결시켜 비난하는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청교도들이 미국으로 이주하면서 근면성실이 강조되었고, 그 후에는 노예들의 생산성 향상을 위해 게으름을 사회적 악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구약성경의 잠언이나 신약성경에는 '게으른 자'에 대한 경계가 많이 나오는데, 그 때의 영어 단어는 언제나 slothful이 사용됩니다. lazy라는 단어는 King James version 성경에서는 한 번도 사용되지 않습니다. slothful은 slow에 명사형 어미 '-th'가 붙고, 거기에 다시 형용사형 어미 '-ful'이 붙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마도 lazy가 일을 손에서 놓고 빈둥빈둥 노는 것을 뜻하는 반면에, slothful은 일을 슬슬 천천히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이른 바 '태업'이지요. 그래서 성경에서 종교적으로 그 integrity 없는 불성실함을 경계한 것으로 보입니다.
노동을 장려한 바울 서신의 내용을 생각하면, 저자의 구체적 주장을 모두 그대로 수용할 수는 없지만, 우리 자신과 이웃에게 주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특히, '소셜미디어를 통해 쏟아지는 정보의 량을 제한하라'는 조언은 귀기울일 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