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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은석 변호사 Jan 28. 2020

조랑말 클럽과 복잡한 일

투자자-국가 분쟁 패소 기사에 즈음하여

얼마 전 우연히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패소한 6천8백만 달러(최근 환율로 계산하면 789억 원 정도) 짜리 투자자-국가 분쟁(ISD) 국제중재 사건에 관련된 기사를 읽었다. 우리나라가 그 중재판정의 무효를 주장하며 영국 법원(High Court of Justice of England and Wales)에 제소하였는데, 패소했다는 기사였다.



일부 기사 및 금융위원회 보도자료에는 영국 고등법원으로 번역하여 오해를 유발하는데, 위 영국 법원은 제1심 법원이다. 그런데 위 판결(2019 EWHC 3580 (Comm). 판결서 원문은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은 2019년 12월 20일에 선고되었고, 금융위원회는 그 다음날 보도자료에서 그 판결로써 종전에 패소한 중재판정(PCA Case No. 2015-38)이 확정되었다고 하였다. 영국 법원에서 패소하더라도 항소하지 아니 한다는 검토가 이미 있었던 것 같다.



위 영국 법원 판결에서 설시한 사건의 배경을 아주 아주 간략히 말하면 다음과 같다.


이란의 다야니 일가(Dayanni family)가 지배하는 엔텍합(Entekhab)이 2010년 4월 21일 대우일렉트로닉스(판결문은 Daewoo라고 표시되어 있다)를 인수하기 위해 채권금융기관들과 양해각서(MOU)를 체결하였다. 


그 이후 주채권은행인 우리은행이 엔텍합의 자금력과 미국의 이란 제재로 인한 우려를 표시하고, 매각주간사가 엔텍합의 국적이 이란인 점이 매각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엔텍합에 통지한 일이 있었다.


이에 다야니 일가는 싱가포르에 D&A라는 법인을 세워 매매계약을 체결하고 채권금융기관협의회의 승인을 받아 2010년 11월 8일과 9일 계약금 약 578억 원을 지급했으나, 투자자 확약서 요건을 충족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매매계약은 해지되고 계약금은 몰취되었다.


다야니 일가는 서울중앙지법에 매수인 지위의 확인을 구하는 가처분 신청을 하였고, 법원은 계약금에서 대우일렉트로닉스가 엔텍합으로부터 받아야 할 매출채권액을 공제한 나머지를 반환하도록 조정하였다.


주채권은행인 우리은행은 이를 수용하기로 결정하였으나, 최대 채권자인 자산관리공사(KAMCO)가 이에 반대하였고, 결국 채권금융기관협의회에서 우리은행의 동의안은 부결되었다. 그러자 서울중앙지법은 2012년 2월 8일 D&A의 신청을 기각하였다.


2015년 9월 10일 다야니 일가는 우리나라가 '투자 촉진 및 보호를 위한 대한민국 정부와 이란 정부간 합의'를 위반했다는 이유로 상설중재법원(Permanent Court of Arbitration)에 중재를 신청하였다. 중재절차에서 우리 정부가 패하자 중재지인 영국의 법원에 중재판정 취소의 소를 제기하였는데,  위 기사는 그 소송에서 패소하였음을 알린 것이다.



나는 평소 그런 거대한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으므로 사건 자체도 생소했다. 중재판정문을 공개하라는 정보공개청구의 소가 기각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뭔가 베일에 싸인 음모론의 냄새가 나서 좀 더 찾아본 것뿐이다. 음모론하면 왠지 귀가 더 솔깃하고 재미있게 생각되는 것이 보통 사람의 정서가 아니던가.



우리 정부는 D&A가 제출한 투자자확약서가 불충분했기 때문에 계약해지와 계약금 몰취는 정당하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중재판정부는 그것이 핑계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대우일렉트로닉스의 주 고객인 보쉬와 제너럴 일렉트릭의 동의가 매매계약 조건 중 하나였는데, 미국과 유엔의 이란 제재로 인해 그들의 동의를 얻을 수 없게 되었고, 그로 인해 다야니 일가에게 계약금을 돌려줘야 할 상황이 되자, 투자자확약서의 부실을 핑계 삼아 계약을 해지하고 계약금을 몰취한 것이라고 본 것이다.


나아가 주 고객들의 동의를 얻지 못할 위험이 있음을 알면서 다야니 일가로부터 계약금을 받아 거래를 계속한 것 자체가 신의성실 위반이라고 보았다.



이런 내용들은 Global Arbitration Review에 실린 기사를 전재한 Derains & Gharavi(다야니 일가를 대리한 로펌이다)의 홈페이지에 나와 있다.


아직 위 중재판정문을 우리 정부가 공개하지 않은 것이다. 정보공개청구를 기각한 판결 근거가 '진행 중인 재판에 관련된 정보'라는 비공개사유였으니, 그 사유로는 더 이상 공개를 거부할 수 없게 되었다.


이참에 내가 정보공개청구를 한번 해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 중재판정문의 내용보다는 우리 정부가 이번에는 어떤 이유로 비공개결정할 것인가가 더 궁금하기 때문이다.



이 사건에 관해 찾아보면서 예전에 읽었던 조세 피난처에 관한 "보물섬(Treasure Islands)"이라는 책의 한 내용이 떠올랐다.



1980~1년의 미국 델라웨어 주 국회의원들에 관한 언급인데, "그들은 지역의 조랑말 클럽에 관한 예산에 대해서는 어마어마하게 긴 논쟁을 할 수 있지만, 새로운 유한책임법이나 신탁법은 이의 제기 없이 통과된다"는 내용이다.



그 취지는, 당시 의원들이 복잡한 배경과 파급효과를 가진 법안들을 이해할 수준이 되지 아니하여, 변호사와 은행가들이 그 법이 필요하다고 하면 그런 줄 알고 그냥 통과시켜 주었다는 것이다.



투자자-국가 분쟁 해결 제도(ISDS)는 아마도 작은 조랑말 클럽 운영보다는 훨씬 더 복잡 미묘할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고, 변호사도 관심이 없으면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수조 원대의 사건이 아직 남아 있고, 패소하면 국민의 세금이 외국인의 지갑으로 흘러 들어갈 것이다.



국회의원들은 비록 작은 조랑말 클럽 운영에 관한 식견밖에 없을지라도, 대한민국이라는 거대한 단체를 잘 운영해 가는 국민들이 있으니, 국민들이 찬찬히 들여다 볼 수 있도록, 이 사건뿐만 아니라 다른 일들에 대해서도 항상 시기적절한 정보공개가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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