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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은석 변호사 Feb 13. 2020

계약이 불공정하면 무효라고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기본개념 제6강     계약의 무효

계약 당사자의 의사의 합치로 계약이 성립하면 계약 내용대로의 효력이 발생한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법이 무효로 정하는 계약이 있다. 여기서 계약의 성립과 계약의 효력 발생은 별개의 문제임을 알 수 있다. 당사자의 의사가 일치하지 않으면 계약이 무효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존재조차 하지 않는 것이다.

예를 들어 A가 갑과 을 사이에서 X 토지의 매매를 중개하면서, 매매대금에 관해 매도인 갑에게는 100억 원, 매수인 을에게는 120억 원에 계약이 체결되었다고 속여 을로부터 계약금 12억 원을 받아 잠적하였다고 하자. 이때 갑과 을 사이에는 X 토지에 관한 매매계약이 체결된 것일까? 결론은 매매대금에 관한 의사의 합치가 없었기 때문에 계약은 성립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민법에 한정하여 계약이 무효로 되는 사유 또는 사례를 보면, 선량한 풍속 기타 사회질서에 위반한 사항을 내용으로 하는 경우(민법 제103조), 당사자의 궁박, 경솔 또는 무경험으로 인하여 현저하게 공정을 잃은 경우(민법 제104조), 선량한 풍속 기타 사회질서에 관계있는 법령에 반하는 경우(민법 제105조), 계약 상대방과 짜고 가짜 계약을 체결한 경우(민법 제108조), 법률 또는 관습법이 정하지 않은 물권을 설정·이전하는 계약(민법 제184조), 공유지분 과반수의 동의 없이 공유 주택을 임대한 경우(민법 제265조), 종중 규약에 종중 재산의 처분에 관해 정한 바 없는데, 종중총회의 결의 없이 종중 재산을 처분한 경우(민법 제275조, 제276조) 등등 여러 가지가 있다.


이 글에서는 민법 제103조와 제104조에 관하여만 본다. 민법 제103조가 사회질서에 위반한 내용의 계약을 무효로 하는 까닭은, 법이 사회질서에 위반한 내용이 실현되도록 협력하는 것은 사회질서를 유지하려는 법의 목적에 반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계약이 불공정하면 사회질서에 반하는가? 민법 제104조를 보면 우리 민법은 반드시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지는 않다. 민법 제104조는 위에서 보았듯 불공정이 현저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당사자의 궁박, 경솔 또는 무경험으로 인한 것이어야 무효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자신과 상대방이 가진 것의 객관적 가치를 알 수 있는 능력이 있고, 그것을 서로 상대방에게 주장함에 지장이 없는 상황에서 체결된 계약은 아주 불공정해도 법은 그것이 실현되도록 돕는다는 뜻이다. 또는 나나 상대방이 가진 것의 가치를 상대방에게 주장할 수 없을 만큼 경제적이나 신체적, 정신적으로 힘든 상황에서 체결한 계약이 어느 정도 불공정하더라도 유효하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민법 제104조의 요건을 갖추지 못한 불공정한 계약을 무효로 할 수는 없는 것인가?

그건 또 아니라고 볼 것이다. 민법 제104조는 민법 제103조의 예시에 해당한다는 것이 우리의 통설·판례이다. 과거 이자제한법이 일시 폐지되었을 때, 고율의 금전 소비대차 약정에 대해 판례는 민법 제104조가 아니라, 제103조를 근거로 정당한 이율을 초과하는 부분은 무효라고 판시한 바가 있다(대법원 2007. 2. 15. 선고 2004다50426 전원합의체 판결).[**]

민법 제104조의 요건을 갖추지 못한 불공정한 계약이 어떤 요건 하에서 제103조에 의해 무효가 될 수 있는지는 어려운 문제이다. 그러나 민법 제104조의 요건을 충족하지 못했다고 하여 불공정한 계약이 바로 유효가 된다고 단정해서는 안 될 것이다.[***]



국가는 사인(私人) 간의 모든 법률관계를 후견적으로 교정해 주지 않고 그것이 모두에게 정의로운 결과를 가져온다고 생각할 수도 없다. 민법 제104조는 사적 자치의 원칙을 기본으로 하면서, 사회경제적으로 약자인 편을 어느 정도 배려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계약이 불공정한지는 대부분 판단하기도 어렵다.


예를 들어 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그리스는 물가가 10억 배가 오르는 초인플레이션(hyperinflation) 상태에 있었는데, 전쟁으로 인해 미국에 있던 자신의 재산을 쓸 수 없어 재정적으로 매우 쪼들리고 있던 을이 갑에게 25달러(50만 드라크마)를 빌리면서 원금을 2천 달러로 하고 그 원금에 연 8%의 이자를 가산해 상환하기로 약정한 사례가 있다.[****]

1년 뒤에 상환한다고 하면 이자율이 약 8600%에 이른다. 그것만 보면 폭리행위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그 당시 상황이 초인플레이션(hyperinflation) 상태였고 독일군 점령 후 첫겨울 2달 동안 30만 명이 아사하는 등 극심한 혼란상태로서 채무자가 살아남아 변제할 가능성이 많지 않았던 상황이라면 불공정하다고 단정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영미법에서 계약 체결 과정이 사기(fraud), 강박(duress)에 이르지는 않지만 계약체결과정이 불공평하거나 계약 내용이나 매우 일방적이어서 비양심적(unconscionable)인 정도에 이를 때는 그 조항을 제거하거나(to excise the unconscionable clause) 계약을 수정하든지(to reform the contract by modifying the offending term), 계약을 취소할 수 있다(to rescind the contract).

이를 unconscionability라고 하는데, 로마법상 laesio enormis 또는 just price doctrine과 함께 영국 형평법에서 양심을 흔드는 계약(contracts that shock the conscience)은 집행할 수 없도록 한 것에서 기원한다. unconscionability가 bargain principle[*****]과 함께 발전해 오면서, 이론적으로는 계약자유의 원칙을 제한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 민법이든 영미법이든 계약자유의 원칙상 불공정, 그 자체만으로는 계약의 효력을 부정할 수 없지만 그것이 무언가 다른 요소, 특히 의사결정의 자유에 지장을 주는 사정과 결합되면 계약을 무효로 할 수 있다는 점은 비슷하다.



One Point 법률용어

불공정한 법률행위 : 민법 제104조의 요건을 충족하는 법률행위. 폭리행위라고도 한다. 여기의 "불공정한"이란 말을 일상용어로 생각하면 안 되고, "불공정한 법률행위" 전체가 하나의 법률용어임을 주의하여야 한다.


[*] 불공정한 법률행위는 거슬러 올라가면 토지의 매매대금이 정당한 가격의 절반 이하인 경우 매수인이 그 차액을 지급하지 않는 한, 매도인이 계약을 물릴 수 있는 로마법의 laesio enormis에서 기원한다.

[**]  고리대금은 로마법 이후로 전형적인 폭리행위(불공정한 법률행위)로 취급되어 왔다.

[***] 윤진수, "2007년도 주요 민법 관련 판례 회고", 서울대학교 법한 제49권 제1호 (2008), 331면.

[****] 226 S.W.2d 673 (1949), Batsakis v. Demotsis (Court of Civil Appeals of Texas). 이 사건에서는 아래에서 보는 unconscionability가 문제 된 것은 아니고, 약인(consideration)이 부적당(inadequate)한 때에도 계약의 이행을 청구할 수 있는지가 다투어졌다. 약인(consideration)이 부적당하다고 하여 계약이 무효로 되지는 않는다(the adequacy doctrine 또는 the peppercorn theory). 즉 2000 달러에 연 8%의 이자를 상환하는 데 대한 협상의 대가로 25달러를 빌리는 것은 약인(consideration)이 부적당한 것에 불과하여 여전히 계약 내용대로 상환할 의무가 있다고 보았다.

[*****] bargain principle이란 그의 동의(consent)에 이상(duress, incapacity, misrepresentation, mutual mistake)이 없는 때에는, 법원은 그가 주기로 한 바(bargain)를 그 내용대로 실현시켜서 그것을 약속받은 사람이 그 협상결과(bargain)가 이행된 것과 같은 위치에 있도록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Eisenberg, Melvin Aron, "The Bargain Principle and its Limits", Harvard Law Review Vol.95 (1982), p.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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