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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은석 변호사 Feb 12. 2020

0월 0일까지 이행하지 않으면 계약은 무효로 합니다.

기본개념     제5강 계약의 해제

비법률가들이 작성한 계약서나 계약에 관해 주고받는 서류를 보다 보면, "언제 언제까지 잔금을 지급하지 않으면 본 계약은 무효로 합니다."와 비슷한 형식의 문구가 나올 때가 많다.

물론 잔금 지급기일까지 잔금을 지급하지 않는다고 하여 위 문구대로 계약이 언제나 무효가 되는 것은 아니다. 위 약정은 계약의 해제조건일 수도 있고, 계약의 해제권 발생에 최고(催告)를 생략하기로 하는 합의일 수도 있다. 사정에 따라 신의칙상 해제권의 행사가 제한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어쨌든 계약의 해제와 계약의 무효는 비슷하지만 다르다.



민법 제548조 제1항은 “당사자 일방이 계약을 해제한 때에는 각 당사자는 그 상대방에 대하여 원상회복의 의무가 있다. 그러나 제삼자의 권리를 해하지 못한다.”라고 한다.

해제의 효과는 원상회복이다. 계약의 효력이 소멸하기 때문에 원상회복해야 하는 것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고, 계약이 원상회복을 내용으로 하는 청산관계로 바뀌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견해도 있다. 우리 판례와 다수의 견해는 전자로 해석하고 해제에 소급효(遡及效)를 인정한다.

손해배상은 계약 해제가 아닌 채무불이행의 효과이다.

해제는 약정해제와 법정해제로 구별된다. 약정해제는 계약상 정해진 해제권 발생사유가 있을 때 그 해제권의 행사에 의한 해제를 말한다. 법정해제란 계약에 별도로 정하지 않았어도 민법 제544조 이하 등의 법조항에 따라 해제하는 것을 의미한다.


영미법에서는 계약을 종료한다(terminate)고 한다.[*] 보통법에 기한 종료(termination at common law), 계약상 권리에 기한 종료(contractual right of termination), 성문법상 권리에 의한 종료(statutory right of termination)로 구별할 수 있다. 계약의 종료에 의해 계약의 존재가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남아 있는 계약상 의무가 떨어져 나가는 것이므로 소급효는 없다. 따라서 계약의 종료(termination)에서는 원상회복이 아니라 손해배상(damages)이 문제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계약의 효력을 장래에 향하여 소멸시키는 것을 해지라고 한다(민법 제550조). 그러나 해지는 계속적 계약에 대해 적용된다고 보기 때문에 영미법의 종료(termination)와는 다르다.


계약의 법정해제로 원상회복의무가 있다는 것은 계약 체결 전의 상태로 되돌리는 데에 해제의 기능이 있다는 의미이다. 보통법에 기한 종료(termination)에 수반하는 효과로서[**] 손해배상은 채권자를 계약이 이행되었더라면 있었을 상태에 두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계약 당사자를 계약상 의무의 구속으로부터 해방시킨다는 점은 같지만, 양 제도의 지향점은 반대이다.

일상용어로 하자면, "이제부터 계약 없었던 걸로 합니다."라는 것과 "이제부터 이 일에서 손 떼세요."라는 것의 차이라고나 할까.

중요한 것은 어느 경우든 나에게 남아 있는 채무를 더 이상 이행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종래에는 채무를 이행하지 않는 채무자에 대한 제재수단이라는 성격에서 해제를 바라보았다.



법정해제든 보통법에 기한 종료(termination)든 그 사유인 각 채무불이행이나 계약위반으로 인한 손해는 별도로 취급된다. 그렇다면, 계약의 법정해제에 채무자가 채무를 이행하지 않았다는 사실 외에 그에 관한 채무자의 귀책사유가 더 필요한가라는 문제가 생긴다. 즉 '상대방이 채무를 이행하지 않으면, 거기에 상대방의 고의나 과실이 없더라도 나도 내 채무를 이행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하지 않는가'라는 생각이다. 상대방의 귀책사유가 있으면 나는 손해배상까지 청구할 수 있는 것이고.


이 문제에 대해서는 견해가 대립한다. 우리 민법은 이행불능의 경우에만 해제에 채무자의 귀책사유를 요구하고(제546조), 이행지체나 이행거절의 경우에는 채무자의 귀책사유를 요한다는 말이 없다(제544조). 귀책사유를 요하지 않는다는 견해에서는, 이행불능의 경우에만 채무자의 귀책사유를 명시한 이유는 위험부담(민법 제537조)의 경우와 구별하기 위해서라고 본다.

민법 제537조는 당사자 쌍방의 책임 없는 사유로 상대방의 채무가 이행불능이 된 때에는 상대방도 나에게 내 채무의 이행을 청구할 수 없다는 내용이다. 그렇기 때문에 계약상 채무를 벗어나기 위해 내가 굳이 계약을 해제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다수 견해는 계약의 법정해제에 채무자의 귀책사유가 있어야 한다고 본다. 계약의 법정해제는 채무불이행의 효과라는 것에 기초한다.



계약을 법정해제하기 위한 절차로서 최고(催告)가 필요한지는 중요한 문제이다. 여기서 최고란 채무자에게 채무를 이행하도록 촉구하는 의사(意思)의 통지(通知)이다. 상대방이 기한 내 돈을 갚지 않을 때나 공사를 제때제때 하지 않을 때, 빨리 갚으라고 또는 예정공정을 준수하라고 보내야 하나 말하야 하나 많이 고민하는 내용증명도 여기의 최고에 해당할 수 있다.


우리 민법에서, 채무자가 채무를 이행해야 하는 때에 위법하게 채무를 이행하지 않는 경우에는 상당한 기간을 정해 그 이행을 최고하고, 그 상당한 기간 내에 이행하지 않으면 계약을 해제할 수 있다(민법 제544조 본문). 그러나 채무자가 자신의 채무를 이행하지 않을 의사를 확고하고 종국적으로 표시한 때나 채무를 이행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된 때에는 최고 없이도 계약을 해제할 수 있다(민법 제544조 단서, 제546조).


근본적으로 이행지체를 원인으로 한 해제에 최고(催告)를 요건으로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영미법에서는 원칙적으로 이행 지체가 보통법상 계약을 종료(terminate)할만한 위반은 아니라고 본다. 그런데 채권자의 최고(催告)를 통해, 이행지체가 채권자에게 해제권이 인정되는 계약위반이 된다고 본다. 즉 채무자가 그 최고(催告)에서 정한 사항을 이행하지 못하면, 채권자가 계약으로 얻을 수 있는 이익을 상당 부분 침해하는 것이므로 채권자에게 해제권을 인정한다.


우리 민법에서 동일한 설명을 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본인이 과문하여 이를 언급한 문헌도 찾을 수 없었다.

개인적 견해로는, 앞서 보았듯이 법정해제가 나를 계약상 의무에서 해방시키기 위한 수단이라는 점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즉 상대방이 채무를 이행할 수 없거나 채무를 이행할 의사가 없을 때에는 나도 내 채무를 이행하지 않을 수 있야 한다. 그런데 이행지체의 경우에는 채무자에게 채무를 이행할 의사가 있는지 없는지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최고(催告)를 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One Point 법률용어

해제조건 : 법률행위의 효력의 소멸을 장래의 불확실한 사실에 의존케 하는 조건. 이 반대는 정지조건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건축허가를 받지 못하면 토지매매계약을 무효로 하기로 한 약정은 해제조건에 해당된다.


[*] rescission은 소급효가 있으나, 사기, 강박, 착오 등을 사유로 하고 효과가 voidable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우리의 취소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voidable은 void와 다르다. voidable은 void라고 주장하기 전까지는 valid한 것이다.

[**] 보통법에 의한 계약의 종료(termination at common law) 사유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Breach of condition, 둘째는 Repudiatory breach, 셋째는 Renunciatory breach이다([2016] EWCA Civ 982, at Rn. 21.). 어느 경우든 계약위반(Breach of contract)에 해당한다. 그리고 계약위반에는 채무자의 과실을 요하지 않는다(Restatement (Second) of Contracts §235 Comment).

[***] Restatement (Second) of Contracts §347 Com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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