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개념 제4강 계약의 해소
결론부터 말하자면 계약은 취소할 수 없다. 취소할 수 있는 것은 의사표시이다. 계약이 청약과 승낙으로 성립한다고 하였는데, 청약의 의사표시, 승낙의 의사표시는 취소할 수 있다. 계약은 해제하거나 해지할 수 있을 뿐이다.
어느 전문분야든 정확한 용어의 사용이 필수이다. 특히 법학은 그 용어에 수반하는 요건, 효과 등이 크게 달라지고 법조인들은 그것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잘못된 용어를 사용하면 의사소통에 혼선이 생길 수도 있다.
“계약을 취소한다.”는 말을 들으면 이 사람이 사기, 착오, 미성년 등의 취소사유를 말할 건지, 단순히 청약을 철회하려는 것인지 상대방이 채무를 이행하지 않아 계약을 해제하고 싶은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이어지는 설명이 있어야 그 사람의 의도를 알 수 있게 된다. 굉장히 비효율적이다.
계약의 해소는 법률용어는 아니나, 이 글에서는 계약상 의무에서 당사자를 해방시키는 사유 전체를 포괄하는 의미로 썼다.
계약을 체결했으면 이행을 해야지, 계약상 의무를 풀어주는 것이 왜 필요한가?
우선 계약 당사자가 그렇게 하기로 합의했다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그것을 막을 이유는 없다. 다음으로 계약이 성립했으나 효력이 없는 경우에는 계약상 의무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법이 무효라고 정한 계약이 그렇다. 부동산에 관한 명의신탁이 대표적이다(부동산 실권리자명의 등기에 관한 법률 제4조).
상대방이 속임수를 쓰거나, 억지로 강요해서 계약을 체결한 경우에도 그 상대방에 대한 채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대부분 부당한 결과가 될 것이다.
상대방이 채무를 이행하지 않거나 이행할 수 없게 된 경우에도 나만 채무를 이행하는 것은 부당할 것이다. 비슷한 이유에서 일필(一匹)의 토지 일부를 사기로 하였는데 법령상 토지분할을 할 수 없는 면적인 때나 무허가 건물이어서 소유권 보존등기를 할 수 없는 건물을 사기로 하는 계약과 같이 처음부터 상대방이 채무를 이행할 수 없었던 경우에도 나만 매매대금을 지급해야 한다면 부당할 것이다.
유명 작가의 진품 그림인 줄 알고 샀는데, 가품이었던 경우는 어떠할까?
이와 같이 계약이 체결되었더라도 계약의 구속력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해 주는 것이 필요한 경우들이 있다. 물론 여전히 계약의 구속력을 인정하면서, 상대방으로부터 손해배상을 받도록 하는 방법으로 해결할 수도 있다. 법정해제와 해지를 인정하지 않았던 로마법에서는 상대방이 채무를 이행하지 않는다고 하여 나의 채무를 이행하지 않을 수는 없었고, 대신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계약의 해제 또는 해지를 인정하여 나의 채무를 이행하지 않아도 되도록 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
계약상 의무에서 해방시키는 수단으로 처음부터 계약이 무효였다고 보는 방법이 있다.
법이 사회질서에 반하는 계약의 실현에 조력할 수는 없으므로 그러한 계약은 무효로 본다(민법 제103조). 당사자의 곤궁한 사정이나 무경험, 경솔함으로 인하여 현저하게 불공정한 법률행위도 무효로 본다(민법 제104조). 이른바 폭리행위로서 알박기 사건에서 종종 주장된다(대법원 2017. 5. 30. 선고 2017다201422 판결 참조).
두 번째로는 일단 계약의 유효함을 인정하되, 당사자가 자신의 의사표시를 취소하여 계약의 효력을 소급하여 없애는 방법이 있다. 상대방의 사기나 강박에 의해 계약을 체결한 때에도 계약을 체결한다는 의사 자체는 존재했으므로 계약의 효력을 인정하되, 사기나 강박을 이유로 자신의 의사표시를 취소할 수 있도록 하였다(민법 제110조).
세 번째는 일정한 사유에 기해 또는 당사자가 자유로이, 유효한 계약의 효력을 소멸시키는 권리를 주는 방법이 있다. 일정한 사유는 계약으로 정할 수 있고, 법에 정해져 있는 것도 있다. 첫 번째, 두 번째는 계약의 성립 자체에 어떤 문제 사유가 있었던 경우임에 반해, 세 번째 방법은 계약의 성립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없고 계약의 이행 과정에서 발생한 사유에 적용된다.
어떤 경우에 무효가 되고, 어떤 경우에 취소할 수 있는 것으로 정할지가 법이론적으로 딱 정해지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현저하게 불공정한 계약을 무효로 할 것인지에 관해 보자.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에 실린 칙답서(rescripta)에, 땅을 정당한 가격(fair value)의 절반 이하로 판 경우 매수인이 정당한 가격과의 차액을 지급하지 않는 한, 매도인이 그 계약을 물릴 수 있다고 하였다.[*] 이를 주석학파(Glossators)에서 laesio enormis라고 이름 붙였다. 그런데 정당한 가격이라는 것이 존재하는지, 당사자 사이의 협상에 의한 결과를 일방적으로 뒤집는 것을 허용할 것인지 문제 된다. 사실 계약자유의 원칙상 현저하게 불공정하다는 사실만으로 계약을 무효로 하는 것이 타당한지는 의문이다. 자유로운 의사에 의한 계약의 성립으로 보기 어려운 다른 사정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 경우에도 어떠한 법률효과를 부여할 것인지는 입법정책의 문제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민법은 독일 민법을 수용하여 궁박, 경솔, 무경험을 요건으로 추가하여 현저하게 불공정한 계약은 무효로 하였다. 반면 일본 민법은 이러한 규정이 없다.
영국에서는 무효화(voidable), 미국에서는 무효화(voidable) 외에 주마다 다른 실현 형태가 있다고 한다.[**]
계약을 체결할 때부터 채무를 이행할 수 없는 사정이 있는 때, 계약을 무효로 할 것인지, 계약은 유효하지만 채무불이행이 된다고 할 것인지도 문제 된다.
앞서 본 일필(一匹)의 토지 일부를 사기로 하였는데 법령상 토지분할을 할 수 없는 면적인 때, 판례는 이를 계약 체결 시부터 이행불능이어서 계약이 무효라고 보았다(대법원 2017. 10. 12. 선고 2016다9643 판결). 반면 소유권 보존등기를 할 수 없는 무허가 건물의 매매는 -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그 계약 당시부터 소유권을 이전할 수 없음에도 - 판례는 계약이 유효하다고 보는 것 같다(대법원 1992. 4. 28. 선고 92다3847 판결 참조). 두 케이스의 차이는 채무의 이행이 가능하냐 보다는 매매 목적물 자체가 존재하는지에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즉 전자에서 일필의 토지 일부에 대한 소유권 자체가 없음에 반해, 후자에서는 건물에 대한 소유권은 존재하기 때문이다.
One Point 법률용어
법률행위 : 일정한 법률효과의 발생을 목적으로 하는 한 개 또는 수 개의 의사표시를 본질적 구성요소로 하는 법률요건. 법률행위는 매매, 도급 등과 같은 계약과 유언, 상계, 취소 등과 같은 단독행위로 구별될 수 있다.
[*] 과거 로마법에서는 무효와 취소가 분화되지 않았다. 오늘날의 무효나 취소에 해당하는 사유가 있으면, 소권을 부여하지 않거나 항변을 인정함으로써 계약상 의무를 이행하지 않을 수 있도록 하였다.
[**] 박귀련, "불공정한 법률행위에 대한 연구 : 민법 제104조를 중심으로", 중앙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09), 171-172, 198-20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