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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은성 Sep 12. 2018

가장 중요한 건, 너의 인디펜던트를 잃지 않는 것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사는 일에 대해 레옹 할아버지가 조언해 주었다.

나의 소원은 할아버지를 가져보는 거였다. 소원이 이루어졌을 때는 알아채질 못한다. 인생의 변화가 있을 때는 늘 바쁘고 정신없고 혼란해서, 모르고 지나친다. 행복은 호수처럼 평화롭다기보다는 격랑의 바다같은 거라서, 언제나 그 순간이 한참 지난 후에 멍하니 중얼거린다.


그거, 행복이었네.



첫눈에 반했다. 키가 나만 한 남프랑스 남자. 손에서 와인 잔을 절대로 놓지 않는 남자. 누군가의 잔이 비려고 할 때마다, 그가 기뻐하는 게 보였다. 잔이 찰랑이도록 붉은 와인을 따르며 '쁘띠쁘(아주 조금이야)'라고 말하고, 자기가 자기 말에  하,하,하, 하 소리내어 웃었다.

“마셔. 더 마셔. 술은 인생에서 가장 좋은 거란다.”


와인잔의 무게만큼, 마음은 자꾸만 풀려나갔다. 경계심 해제완료. 눈이 마주칠 적마다 웃음이 났다. 다가가 말을 걸고 싶은데 내 프랑스어는 계산서를 달라거나 화장실이 어디죠, 수준이라 할 말이 없었다. 조바심만 났다. 누가 좋아질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왜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죠?


 작년 여름 첫 프랑스 여행에서 그를 만난 날, 나의 애인에게 용기를 내어 귓속말을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레옹을 사랑하게 될 것 같아.”

“너 뿐만 아니야. 모든 사람이 그를 사랑하지.”

정직의 대명사 애인은 내 흥을 맞춰주지 않았지만.


“당신의 손주들처럼 나도 예뻐해 주실 수 있어요? 빨리 빨리요.” 구글 번역기를 돌려 말도 안 되는 편지를 쓸까도 했다.




레옹 튈리에는 B의 친할아버지다. 재작년 여름, 그의 90세 생일파티에 초대되어 처음 만났다. 마흔 명 가까운 친척이 고성에 초대되었고, 하룻밤을 묵으며 먹고 마시는 긴 일정이었다. 정원에는 기차 차량만한 큰 테이블이 놓였다. 와인 병을 담은 나무 상자들.주방에서는 내 키의 반만한 솥과 냄비가 여러 개 달궈지고 있었다. 레드 로제 화이트 와인이 강물처럼 흐르는 이 곳은, 처음 만나는 천국인가?

전국 각지에 사는 친척들이 각자의 농장에서 가져온 양고기 소고기 돼지고기 오리고기 토끼고기가 테이블 위에 흐드러졌다. 살구와 딸기, 복숭아 같은 달고 신 과일들, 초콜릿, 견과류를 넣어 구운 케이크만도 네 다섯 종이 됐다. 동화적 풍경 앞에, 나는 조금 아연해졌다. 이런 건 영화나 그림이어야 할 때, 눈앞에 실재해 있으면 어리둥절하다. 미술관에 걸린 그림 속 사람들이 걸어나와 말을 거는 느낌. 황홀하고 무서워. 이건, 대체, 뭐지?


먹고 이야기하고 웃으려고 태어난 사람들처럼, 나만 빼고 다들 자연스러웠다. 이틀 밤낮의 파티를 만끽하는 사람들. 행복과 평화라는 단어를 그려내면 이 풍경일텐데, 그 풍경화 속의 나는 한구석의 쭈글쭈글 번데기 한 마리.


모두가 비쥬(볼 뽀뽀)를 나누며 친절하게 대해 주었는데 어쩐지, 급속도로 외로워졌다.


속사포처럼 오가는 프랑스어 대화에 비행기가 이륙할 때처럼, 귀가 3M 귀마개를 꼽은 것처럼 멍멍했다. 애인이 몇 문장으로 요약해 영어로 알려주었을 땐, 사람들은 이미 다른 화제로 떠들썩했다. 뒤늦게 혼자 웃으면 더 외롭잖아. 입가가 자꾸만 경직됐다.

(이런 오묘한 감정을 일컫는 단어가 독어에는 분명 있을 것이야...)



한국말 쓰면 나도 꽤 웃긴 편인데.

재밌나보다. 계속 웃네들.

다들 친해서 좋겠다. 나도 한국에 친구 많은데...

우주먼지의 기분을 알 거 같다.


스마트폰에 초등 왕따같은 일기를 썼다.


“텐트에서 쉴래.”

피곤한 표정을 억지로 만들고서 텐트 지퍼를 열고 몸을 집어넣었다. 꽃무늬 드레스를 벗어 뭉쳐두고 검은색 추리닝으로 갈아입은 뒤 몸을 말았다. 혼곤하게 잠들었다. 깨어나 보니, 저녁놀.

“똑똑. 너무 피곤하지 않다면...혹시 선물 가지고 나와 줄 수 있어?”


눈을 떠보니 B가 염려스런 표정으로 머리칼을 쓰다듬고 있었다. 다정한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곁에 있으면, 감정은 빗장을 연다. 온기는 서글픔을 가속화한다. 울고 싶진 않아서 화난 표정을 지었다.






“네 선물부터 보고 싶어.”

테이블의 끝과 끝. 아주 멀리서 레옹이 말했다. 핀 조명이 나를 비추는 것 같다.


나는 선물이 프랑스어로 ‘꺄도’란 걸 안다. 애인이 내게 선물을 줄 적마다 “몽 꺄도(내 선물)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어.”라고 수줍게 말했었으니까.


“선물? 선물 보고 싶어요? 내 선물이요?”

한국어로 중얼거린 뒤, 뚜벅뚜벅 다가갔다. 엄마는

“어려운 분이잖아. 네 시할아버지잖아.”

인삼이나 영지버섯같은 귀하고 값나가는 건강제품을 사가라고 돈을 백만원이나 챙겨 주었지만, 나는 인사동을 뒤져 한지로 만든 담백한 부채 하나를 골랐다. 대신 번역기를 돌려 손 편지를 썼다. 조바심 내지 않고 한들한들 손을 흔들어 땀을 식히는 여유와 지혜를 그도 반길 거라 여겼다. 

“축하해요. 만나서 기뻐요. 옛날 한국 사람들은 손을 움직여 더위를 쫒았대요. 전기가 없어도 쓸 수 있는 천연 에어컨이에요.”


“너의 조상은 멋을 아는 사람이었구나.”

편지를 읽기도 전에 그는 내가 적은 모든 내용을 짐작해버렸다. 그리고는 부채에 적힌 시를 읽어달라 청했다. ‘제가 남들 앞에서 나서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란 걸 어떻게 아셨어요?’ 갑자기 신이 났다.


“에헴. 에헴. 작은 것이 높이 떠 만물을 다 비추니, 밤중의 광명이 너만 한이 또 있을까, 보고도 말 아니하니 내 벗인가 하노라’ (오우가, 윤선도)”

부채에 새겨진 한자는 어려웠다. 동그란 달을 보고 초등학교 때 외웠던 시조를 눈 감고서 읊었다. (나중에 찾아보니 오우가가 맞았다!)

“오늘 가장 인상 깊은 선물이구나. 너도 이제부터 내 벗이란다. 부채를 펼 때마다 너를 기억할 거야.”

내가 그 말을 알아들을리는 없지만, 레옹은 내 눈을 보며 아주 천천히 말했다.  B가 통역을 하기도 전에 한국어로 대답했다. "정말 기뻐요."




B가 그린 제주 산방산 그림으로 만든 티셔츠. "내일 헬스클럽에 가는데, 단박에 인기쟁이가 되겠지?" 레옹이 아주 좋아했다.


레옹과의 대화 후에, 사람들은 와르르 다가왔다. 부채와 시에 대해 물었다. "내 영어가 많이 서툴지?” 수줍어 하면서.

“한국사람들은 매일 부채를 쓰니, 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니, 너는 시를 쓰니 소설을 쓰니, 내년에 다시 올 땐 부채를 100장은 가져와야 할 거야. 우리 모두 사고 싶어 안달이 났거든.”


나답지 않게 소심해졌던 걸 레옹은 눈치챘을까. 시를 읽으라고 시켜준 덕택에 순식간에 많이 편안해졌다. 사람들과 이야기할 소재를 찾을 수 있었다.


한국에 돌아와 밤하늘의 달을 볼 때마다 레옹을 떠올렸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사람과 마음이 통한다고 느껴본 적도, 처음 만난 사람을 오래 그리워해본 것도 모두 최초였다.



일년이 흐른 뒤 그의 집에 여름을 보내러 갔다. 남프랑스 몽뗄리마흐. 차로 30분을 뱅글뱅글 돌면 산중 돌집이 나타난다. 정원에는 길 잃은 양이나 염소가 머물고, 아침을 먹을 땐 설화에 나오는 것 같은 절벽을 볼 수 있는 집이다. 일 년 새 나는 프랑스어로 이게 맛있고 왜 맛있는지 더듬더듬 이야기할 수준이 되었다.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날 밤, 레옹은 갑자기 나를 애인과 자기 사이에 앉혔다. 그 자리는 레옹의 것인 듯해 손을 휘휘 휘젓자 그는 나보다 더 크게 휘휘휘휘 손을 저었다. '음. 농, 농. (고개를 저으며) 가운데 앉아라.'

거실에서 가장 푹신하고 뒤로 180도 넘어가는, 가족들이 언제나 그를 앉히는 귀한 소파.


여러 가지를 물었다.


너의 부모님과 조부모님은

노동계급이니 귀족계급이니,

지금의 사회적 지위에 만족하니,

아니면 위로 더 올라가고 싶니,


올라가고 싶어서 불안하거나 조바심이 나니,

하는 일이 재밌고 즐겁니,

앞으로 무엇을 더 하고 싶니.


누군가 나에게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의 직업을 물은 건 처음이었다. 위로 더 상승하고 싶냐고 물어본 적도.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는 신촌에서 오징어나 건새우를 파는 건어물상을 크게 했대요, 그런데 어쩌다 사업이 망해서 저의 엄마는 하려던 발레를 접고 대학은 가지 못했어요, 그래서인지 엄마는 제가 늦게까지 결혼을 안하고 글을 쓰고 글을 가르치는 걸 누구보다 자랑스러워해요, 네가 하고싶은 걸 모두 다 하고 살라고 응원해줘요.

제 이모도 B의 삼촌처럼 오리를 기르고 요리하는 식당을 했었어요. 저의 친척들도 다들 고기나 생선 식당을 했어요. 당신의 자녀들처럼 음식과 관계된 일을 하니까 좀 비슷하네요!”






나는 영어로도 수다쟁이였다. 작가가 우리 가문에 대해 서술하는 느낌으로 신이 나서 설명했다.


“일은 여전히 힘든 부분이 있지만. B을 만나고부터는 정말 맛있게 먹고 정말 많이 웃고 정말 많이 자요왜냐하면...인생에서 그게 가장 중요한 것 같아서요.


집에 들어서면 계속 농담을 나누고 그래서 계속 웃고 있으니까. 세상과 단절된 행복한 섬에서 둘마누함께 있는 거 같아요. 영어로 대화하니까 한국말로 겪은 나쁜 기억도 금세 잊혀지는 것도 같고."

   


나는 또, 또 말했다. 그가 계속 나를 바라보았다.

“지금의 직업도 좋지만...앞으로는 더 가치있는 일을 하고 싶어요. 천천히 정성스럽게 하는 일들에 대해 요즘 자주 생각해요. 오래 요리하는 것. 와인과 맛있는 음식을 나누며 서로에 대해 열심히 묻고 들어주는 것, 그런 생활의 기쁨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요.

 

‘빨리 먹고 치우자’가 아니라요. 식사를 평화롭게 즐기는 건 인생에서 너무 중요한 것 같아요.


맛있는 걸 먹을 때

우리는 웃고 사랑하고 이야기하잖아요!”


내가 영어로 말하고 그걸 애인이 다시 프랑스어로 옮기고, 레옹이 프랑스어로 답하면 다시 영어로 바꿔서 내게 전달하는 게 오래 걸렸을 텐데, 적합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 갸웃갸웃거릴 때도 그는 흔들림 없이 나를 바라봤다. 눈을 보면 다 알아듣겠다는 듯이.

   

누가 바라봐주면, 사람은 용기가 난다. 더 더 신나게 대답했다. 지친 애인이 하품을 연신 해도 우리 둘은 열심히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다 듣고, 식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레옹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당신의 언어를 다 알아듣는다는 듯, 마치 텔레파시처럼.


“국적이 다르다는 건....힘들 거야. 나는 내 아내와 같은 프랑스 사람이라 그런 건 느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지만.

그런데 남편과 아내라는 건,

언어가 같아도 대화가 어렵기는 매한가지거든!"

나는 박수를 치며 웃었다.

맞아요 정말 맞아요!


그는 부부는 삶을 위해 서로를 많이 이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용'이라고 했다. 서로의 언어가 달라서 지치면 좀 쉬기도 하면서, 그렇지만 너무 오래 쉬지는 말고 계속해서 대화를 시도해야 된다고. 좋은 삶을 위해 서로를 이용하려면. 좋은 일뿐만 아니라, 나쁜 일도 많이 이야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걱정과 불안과 분노를 모두 솔직하게 이야기해야만 한다고. 절대로 피하지 말고.


"삶에서 가장 중요한 건 대화다. 세상을 떠난 마리안느와 나는, 성격이 정말 달랐어. 그래도 이야기하기를 멈춘 적은 절대로 없었다. 마리안느가 치매에 걸려 오늘과 내일을 헷갈려할 때에도. 말은 단어나 문법으로만 통하는 건 아니니까. 마음으로도 통하는 거니까."




애정이 생기면 두려움도 생긴다. B에게 레옹은 건강하냐고 묻고 싶다가 질문을 거둘 때가 많다. "할아버지는 늘 바빠. 난꽃도 연구하고 와인도 사 놔야 하고. 집에 잘 있어서 전화하기가 어려워." 그와 통화를 시도하다가 좌절한 (집전화만 쓴다) B의 불평을 들으며 안도한다. 그는 바쁘게 살고 있다. 아프지 않다.


기쁘다. 나에게도 롤모델이 생겼어.


나는 레옹처럼 사려가 깊으면서 술을 잘 마시는 노인으로 늙고 싶다.

모임에서 어색해하는 누군가를 발견해내어

눈을 맞추고

삶에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잔뜩 해주고

'난 이제 자러간다'

자리를 뜬 후

꿀잠을 아홉시간 자는 정정한 노인이 되고 싶다


그리고, 이런 말을 큰 힘 들이지 않고 하는 내공을 지니고 싶다.


눈을 마주보고 천천히 말하면 다 통한단다. 그리고 그럼에도, 우리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란 걸 항상 기억해. 대화를 통해 같은 방향으로 걷는 건 중요하지만, 그럼에도 나만의 인디펜던트를 잃으면 안 돼.

상대에게 너무 맞춰주는 게 아니라,

스스로를 지키면서 인생의 해결법을 찾는 거야.


그게 가장 중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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