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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은성 Sep 15. 2018

나는 세계평화를 위해
너를 사랑하고 있다고!

나라와 인종이 다른 사람들끼리 가족이 되는 일은 정말 좋지 않아?  

아침식사로 검정무에 소금버터를 발라먹었고, 샤워를 하다가 뜨거운 물이 멈춰버렸다. 이런 세상도 있는 것이다. 적시다만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동여매고 뜨거운 차를 마신다. 바닥은 타일이라 냉기가 올라오고 벽난로 가까이 가기엔 좀 후끈하니, 차의 온기로 몸을 덥힌다. 


이럴 땐 내가 장발장이라고 생각한다. 곁에는 조카들이 춥고 배고프다고 울고 있으니, 삼촌으로서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될 일이다. 애써 자애로운 웃음을 지으며 “싸바 비엥(정말 괜찮아)”라고 말한다. “쥬 쓰위 콩떵뜨(나는 행복해요)” 아는 단어를 애써 조합해 말하니, 가족들이 괜히 웃는다. 그걸로 됐다. 


물탱크에 문제가 있는지 보고 온다던 사람은 “아무 문제도 없는데”하며 읽던 잡지를 다시 편다. 


     


거실은 평화롭고, 피레네 산맥에서 내려와 명절을 함께 보내는 양치기 개도 평화롭고, 내 머리칼도 평화롭고, 나는 이것만 다 쓰고 나서 튜브 고추장을 뜨거운 물에 좀 타서 먹어볼까 생각한다. 오늘은 12월 31일이고, 또 한번의 파티이고. 점심에도 ‘버터 버터 버터’한 요리를 먹을 테니 어쩔 수 없다. (이것으로 17일째 51끼째) 정말이지, 타이밍이 중요하다. 지금 매운 것을 입에 넣어두지 않으면, 호화로운 테이블에서 나 혼자 또 상념에 휩싸이게 될 테니.


샤워를 하던 중 생각했다. 


나라와 인종이 다른 사람들이 가족이 되는 것은 정말 좋은 일이지 않아?

세계 평화에 기여한다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범위를 넓힌 사랑을 해야 한다고. 

네가 어떤 언어를 쓰는지 어떤 머리색을 가졌는지에 눈을 감고, 안고 키스해야 한다고. 

그렇게한 사람과 한 사람이 서로 손을 잡고, 그들의 가족이 또 만나고, 

가족의 친척이 또 한자리에 모여 뭘 잔뜩 먹고 배를 두드리며 춤을 추고. 

그러다 보면 실과 실이 이어져 지구는 하나의 거대한 뜨개질이 되지 않을까? 


여행의 순간순간 느끼는 점만한 느낌이 많다. 

자려고 누우면 그것들은 선이 된다.      



어제는 친척 어른이 “한국 소는 어떻게 우니?” 물어보았다. 나는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두고 연극 오디션을 보는 기분으로 울었다. “음, 메에” 모두가 “메에”라고 알아들었다. 


똑같네! 

아니오, 아니오. 음이 정말 중요해요. 음(숨을 모은다)-메에(숨을 뱉는다)! 


프랑스 소는 “무우-”하고 운다. 프랑스 개는 와프와프하고 울고 한국 개는 멍멍, 왈왈 운다. 


남프랑스 시골의 외딴 집에서 매일 매일, 그런 점을 생각한다. 우리는 다르고, 비슷하다고. 일상의 작은 부분들이 모두 다르다. 이집 사람들은 오리구이에서 가장 맛있는 껍질과 지방을 가족들은 길고양이에게 준다. 세상에. 아까워라.

 “내가 먹고 싶어!” 외칠 수는 없는 일이지만, 눈물이 앞을 가린다. 


우리는 만나고 헤어질 때 볼을 맞대며 입으로 쪽, 소리를 내어 비쥬를 한다. 이 지역에서는 세 번이지만, 어딘가는 두 번이라 나는 종종 혼자 ‘쪽’ 한번 더한다. 모두 와르르, 웃는다. 

내가 웃다가 누군가를 툭 치면, 상대는 정말 깜짝 놀란다. 어떤 사람은 비쥬할 때 따뜻한 입술을 볼에 대기도 하지만, 웃으면서 누군가를 치지는 않는다. 몸이 닿는 것에 대한 감각이 다르다. 


다른 점을 가지고 우리는 웃고, 운다. 그렇게 가까워지고, 세계가 점점 넓어지고. 국경은 점점 완만해진다. 어쩐 일인지, 나를 만난 사람마다 한국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 너는 쌀을 좋아하지(나는 한국에서도 밥보다는 면 파이지만, 고개를 끄덕인다) 하면서 태국(!) 쌀로 한 공기 가득 밥을 담아준다. 지금의 따사로움. 



“똑똑”은 한국에선 스마트고, 여기선 “좀 이상하다”는 뜻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똑똑하다고 말할 때마다 또 와르르 웃는다.      


우리가 굳이 한복을 입고 코리아를 알리지도 않았는데(웩!) 도미니크는 조각보 패턴을 찾아보며 아름답다고 감탄한다. 로헝은 “홍썽쑤 무비를 보았다”며 나를 불러 앉혔다. <그후>였다. “꼼씨꼼싸” 나는 손바닥을 펴서 양쪽으로 흔들며 웃는다. 그럭저럭이라는 말인데, 옛날 말인지 사람들은 잘 안 쓰고 어감이 좋아 나만 쓴다. 로헝은 “영화에서 ‘똑똑하다’ 는 말이 나와서 네가 생각났어. 한국어를 네 덕에 내가 알아들었지.”라며 뿌듯해 한다.      


맞아요. 홍상수 영화에서는 정말 많이 나오지요. 

“보니까 너 참 똑똑해(술에 취해서 하는 말)” 

“선배는 진-짜 똑똑한 사람이에요(더 취해서 하는 말)” 한국이었다면 그 말투를 기가 막히게 흉내내어 사람들을 웃길 텐데, 나는 그냥 내가 아는 말만 한다.

 “뛰 에 똑똑 오씨. (똑똑하다는 단어를 알아듣다니 영화 주인공처럼) 당신도 똑똑해요.” 


언어의 한계 때문에 긴 말을 할 수 없어 답답한데 로헝은 기분이 좋아졌는지 껄껄껄 웃는다. 됐다. 뜻은 통했다. 그럼, 됐다. 따뜻함 정도면 됐다. 폭소가 아니어도, 삶은 즐겁지.     

 


나는 말로 웃기고 글로 울리는 삶을 살아 왔는데, 여기에선 그럴 수가 없다는 것, 그런데 꼭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사람들의 대화를 열심히 아주 열심히 듣는 것. 아는 단어가 나오면 아이처럼 기뻐하는 것. 

사람이 하는 말이 아니라, 그 사람의 행동을 보고 좋은 사람이란 것을 느끼는 것.

 로 전할 수 없으니, 통역기를 이용하기보다는, ‘이따 헤어질 때 오래 안아 줘야지’ ‘고마웠다고 두 번 말해야지’ 메모해 두는 것.      


내 말을 하지 못하니, 나는 청각장애인들의 삶을 찾아 본다. 아프리카의 아주 작은 부족의 노인을 떠올린다. 그 부족의 언어를 쓰는 가족과 친구가 모두 세상을 떠나서, 아흔의 노인은 홀로 지낸다. 언어를 품고서. 그의 하루를 떠올린다. 불러서 함께 밥을 먹고 싶다 생각한다. 


고독과 평화를 생각한다. 그 둘의 거리는 멀지 않다. 





-2018년 새해 남프랑스 작은 시골마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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