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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은성 Sep 15. 2018

제발 조용히 좀 해요

당신은 당신의 비릿함을 어떻게 견디느냐고 꼭 한번 묻고 싶다  

자꾸만, 자꾸만 추궁하시는 당신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네 인생만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기적이다. 모두가 너처럼 편하게 살려는 욕심으로 결혼도 않고 아이도 낳지 않으면 결국 어떻게 되겠니.” 라고 하셨던가요.      


“아무 것 없이 간편하게 삽니다. 이렇게 늦게까지 마시려는 이기심으로요.”      

유리컵에 반쯤 남은 술을 호기롭게 들이켰지만요. 설마요, 그 밤만 해도 도무지 간편할 수가 없었는 걸요. 


외따로 돌아가는 길, 90킬로그램 거구의 당신을 들쳐업고 걷는 것 같은 무게와 촉감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요. 당신의 단어들. 이기심, 욕심, 무력함, 무책임, 허영, 불화, 요즘 젊은 것들. 적나라한 그들이 제 어깨와 팔과 다리와 허리를 휘감았어요. 거추장스러웠어요. 눈치없이 엉겨붙는 못생긴 아이 같았어요. 나 자신만으로도 끈적하단 말이야, 떨어져라, 떨어져.     


처음 모여 보쌈을 먹던 날이 기억납니다. 딸, 딸, 아들을 둔 여직원에게 당신은 말했지요.      

“금메달이로군요.”      

올해 대학에 입학한 외아들을 둔 남직원에게도 말했습니다.     

 “오늘밤에라도 노력해 보는 게 어떤가요.”      

갓 결혼한 직원도 결코 놓치지 않았어요.      

“자식을 많이 생산해야 해요. 부부관계가 잦아야 기분이 좋지 않겠어요? 밤에 기분이 좋아야 다음 날 아침에 활기가 돌지요. 개인의 활력은 당연히 국가의 부강으로 연결되고요.”      


결혼과 출산. 전 우주적 공통 화제가 한 바퀴 빙빙, 술잔이 돌듯. 호호 하하 껄껄껄. 열외자도 엇박자도 없이 조화로이 십여 분을 웃자 모든 여자들 입가엔 분이 뭉치기 시작했어요. 분(粉)일 수도, 분(忿)일 수도. 아, 저만 빼고요. 단기 외주용역에게는 표정의 자유가 있으니까. 그런데, 상추와 깻잎과 절인 무에 차곡차곡 싼 고기를 우겨 넣어 참 이기적인 볼따구니가 된 제게도 마침내 대화의 잔이, 턱!       


“올해 스물 하고 몇이었지요?”     

“서른 넘었습니다. 겉보기보다 든든히 먹었습니다.”     

“결혼은 ... 했겠죠?”     

“아니오. 아직입니다. 아예 하지 않을런지도요.”     

간단한 침묵이 흐른 뒤 당신의 웃음이 식당에 쩌렁쩌렁 울렸어요.

“껄껄껄, 요즘 그런 친구들이 많더군요. ‘나만 행복하면 된다’ 그런 생각도 나쁘지 않아요.”     


당신이 정의하는 ‘그런’이 무엇이냐고 되물을 수는 없었습니다. 하여간 8명의 직원 중 유일하게 ‘그런’이 된 저는, 화기애애한 대화가 찰랑찰랑 담긴 술잔을 왈칵 엎어버린 셈이 되었죠, 버릇없는 손주마냥. 금메달도 은메달도 동메달도 아니고 49위쯤이라 송구합니다 꾸벅,사과하고 싶었어요. 순위는 무슨. 지역예선 탈락자로군요.      


올해 한의대에 입학한, 햇복숭아처럼 탐스러운 당신의 아들. 제게도 그러한 바람이 없었던 것은 아니랍니다. 서로의 고운 점만을 나눠 닮은 완벽한 아이는 꿀처럼 농밀한 러브토크의 필수요소니까요. 내 안에서 살아있는 것이 나오고, 그 살아있는 것의 어미가 된다는 상상만으로도 어쩐지 스물스물 온몸이 간지럽기도 했지만, 돌아오는 길에는 그 간지러움을 남몰래 복기해 보기도 하였습니다. 영화 <프로메테우스>보다는 ‘뱃속에서 나비가 날아오르는’ 이라는 어여쁜 비유가 어울릴 느낌이었어요, 분명. 돌처럼 앉아 고깃조각을 탐하는 여자들도 비밀스러운 행복을 숨기고 있는 법이거든요. 토요일 밤에 적립해 둔 행복감으로 당신의 무례를 견딜 수 있는 것이기도 하고요. 월요일 아침의 저를 보시면 상상하시기 어렵겠지만, 당연히.     


손가락 열 개와 발가락 열 개와 늘 끼고 다니는 묵주반지의 장미꽃 개수를 전부 동원하고도 모자랄 나이가 되자, 가상의 아이를 두고 달콤한 작은 거짓말을 속삭이는 남자들은 사라져 버렸어요. 빌어먹을 적자 생존법칙 따위 때문에 지구상에서 모조리 멸종한 것일까요? 황금 갑옷도 입혀 주지 못할 거면서, 이 무자비한 세상에 아이를 내 보내려는 철없이 말랑한 남자는 열성 유전자이기 때문에? 


아니면 취하지도 않고 그런 말을 할 줄 아는 남자들은 이미 실험에 성공해 아버지가 된 것일까요, 그것도 아니면 “아기라니. 징그러워.” 하며 흘기던, 날렵한 새처럼 새침하고 귀여운 표정을 제가 영영 잃어버린 것일까요. ‘달디 단 거짓말을 늘어놓았다간 천벌을 받을 것이야’ 호통 칠 것처럼 그렇게, 제 눈매가 무서운가요? 설마, 그것만은 안 돼요.      


이 글을 이렇게 끝내서는 안 되는데. 이런 어줍짢은 피해의식이라니 안 되는데. 어떤 문장을 골라 마침표를 찍어야 할 지 나는 영 못마땅합니다. 그래서 당신에게 또 물어요. 


당신의 유전자를 이 아름다운 우주에 퍼뜨리는 일에 어쩌면 그렇게 간단할 수가 있느냐고요. 

당신처럼 심플해지려면 어떤 약을 먹어야 하느냐고요. 

당신은 자신의 비릿함을 어떻게 견디냐고요. 

나는 나와 지구가 막상막하로 걱정되서 매일이 고단하고 막막한데 

당신의 미소는 어쩜 그리 충만하느냐고요. 

우아하려 들면 고독해 보인다고 하고, 잠자코 있으면 무뚝뚝하다고 하니 

패악 한 번 부려도 달라질 건 없겠죠. 


소주에 맥주를 타서 먹고 한번은 꼭 물을 작정입니다.      


당신 인생에도 불편한 불면이 한번쯤은 있어야 하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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