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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은성 Sep 15. 2018

맥주, 맥주, 맥주
오 마이 인스턴트 달링  

마감 지옥에서 가장 쉽고 빠르고 청량한 연애가 있었으니 

모든 중독은 견딜 수 없음에서 비롯된다. 대상 때문에 행복감을 느끼면 애호가요, 대상이 사라진 자신을 견딜 수 없으면 중독자라든가. 주저하는 성격 탓에 중독단계에까지는 채 도달해 보지도 못했지만 비스무리한 감정에 한 발 담가 본 적은 많다. 햇살 아래 드러난 피부와 내면이 지저분해 견딜 수 없을 때 거울을 피하기 위해 활자에 빠져들었고, 담배 없이 제 스스로 길고 깊은 호흡을 할 수 없을 때 니코틴에 손을 뻗었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달콤함 외에 그 무엇에도 시큰둥할 때 다른 곳을 바라보는 연인의 시선에 코가 막혀 말을 잇지 못할 정도로 울어댔다. 몇 분 동안의 친절과 관심의 샤워가 간절했을 땐 쇼핑을 하러 나섰다. 그리고 그 중 가장 효과 빠른 진통제가 있었으니, 바로 맥주, 오 마이 달링.     


다른 술도 아니라 오로지 맥주. 화학적 향이 거슬리는 소주는 그닥. 도토리묵이나 파전 없이는 상상 안 되는 맨 막걸리도 별로. 극심한 두통을 몰고 오는 포도주도 패스, 향이 근사하지만 홀로 사 마시기엔 고가인 데낄라도 no.  그런데 맥주는 자신 외에 아무 것도 필요로 하지 않으니 참으로 독립적인 정신의 술이 아닌가! “날 마셔요, 베이비~”라는 듯 은빛 표면으로 트윙클 트윙클 유혹하는 500ml 장신 ‘그 이’와 갈급함에 이글대는 나의 진공청소기 목젖만 있으면 완벽했다. 쉽고 빠르고 부담없고 청량한 하룻밤의 연애.     



빠르고 부담없는 ‘Oh, My Instant Darling’     

그럴 때가 있다. 함께 마셔 줄 친구를 떠올리고 시간약속을 잡고 적당한 술집을 찾기도 귀찮을 때, 얼른 취하고 얼른 깬 후 업무로 돌아와야 할 때. 그럴 땐 그저 술과 나 둘이 간단히 해치워야만 하는 거다. 알코홀릭의 1단계가 혼자 마시는 거라던데, 그런 위험경고야 충신 모가지 자르듯 단칼에 무시하고 백인백색 매력이 넘치는 맥주 애첩을 양팔에 낀 폭군으로 살아왔다.      


할인마트에서 쟁여온 버드와이저에 질리면 카페 벨로주의 산 미구엘이나 이리카페의 쨍한 생맥 한 잔이 맥주 무한교도의 신앙을 공고히 해 주었다. 캔맥주를 텀블러에 담아 나와 커피처럼 홀짝대며 걷는 밤산책도 음악만 있으면 청승맞지 않았다. 누구는 바쁘면 음주량이 현격히 줄어든다는데 웬걸, 네 시간씩 자며 일할 때도 악착같이 찾아 마셨던 나다.      


미친듯이 쓰기 싫은 글을 쓸 때는 ‘낮맥’도 용인됐다. 빨대를 물고서 허연 한글창을 노려 보며 읊조렸다. ‘짐의 고독과 스트레스가 과중하니 마실 권리가 응당 있노라, 간과 피부 건강에 관해 나불대는 신하들은 그 입 당장 다물라.


술 없이도 취한 나날      

태국 카오산로드에 다녀왔다. 그리고 맥주와 이별했다. (이 선언을 하러 말이 길었다. 장기연애 이별기로는 택도 없이 짧겠지만, 아무튼지간에.) ‘장기여행자들의 쉼터, 전 세계 잉여들의 천국’인 카오산은 비어 창과 비어 씽이 젖과 꿀처럼 흐르는 가나안이다. 밥 말리에 맞춰 어깨를 흔드는 상체 탈의 청년에게 내가 골반을 흔들며 다가가 그의 칵테일 바케스에 빨대를 꽂아 마시면 싸움 대신 친구가 되는 곳. 백발 노인 여행객이 낄낄대며 이 젊고 어리석은 영혼들을 구경하는 곳이 바로 카오산이다. 그런데도 아니 마셨다. 


길거리 바에서 만난 장기여행자 언니가 맥주를 퍼붓는 내 꼬라지를 지켜보더니 하는 말, 그게 ‘Rehab’의 계기가 됐다. “뭐할라꼬 그리 퍼 마시노. 양놈이 땔롱 업어가도 모르겠드만. 여자 혼자 다닐 때는 조심 안 하는 척 잘 놀면서도 늘~ 조심해야 한다.”      


덜컥 겁이 났다. 그래서 처음엔 조심하느라 안 마셨는데, 이거 참 끝내주게 재밌는 거다. 장기여행자 코리안 언니들이 물만 마시고 놀아제끼는 모습은 그야말로 예술적이었다. 술집에 안 들어가도 길에는 놀 게 널려 있었다. 시도 때도 없이 흘러나오는 마룬5 노래를 따라 부르고, 심심하면 레이디보이 언니들 가슴 모양 품평하고, 태국 택시기사 아저씨들 호객 돕고, 레알 마드리드 & 바르셀로나 경기 때는 미쳐 날뛰는 스페인 애들과 덩실덩실 춤도 추고. 무더위와 레게 뮤직과 이성의 끈을 풀어헤친 여행객들이 자연스러운 취기가 되어줬다.     


더 재미있는 게 있으니, 이전의 재미를 잊었다. 나는 맥주 대신, 이국의 불안과 '내가 뭐해먹고 사는 사람인지' 누구도 알지 못하는 여행자로서의 황홀에 빠지기로 했다. 그래서 적어도 5일 동안은 술과 단기 이별했다.     


“이제는 불행할 때가 아니라 행복할 때 마실 거야.”     

귀국 비행기에서 찬찬히 돌아봤다, 그동안 왜 그리 부어댔나. 폭식이 음식이 맛있어서가 아니라 마음이 허해서 먹어서라도 채우고 싶어서이듯, 상황이 어색하고 불만족스러울 때마다 나는 폭음에 눈감았다. 소개팅 상대가 끝도 없이 환경보호에 대해 논해댔을 때, 일에 시달린 뇌주름에 시멘트 가루가 낀 것 같았을 때, 오랫동안 무척 보고팠던 사람이었는데 서로의 변화 때문에 대화가 수제비 반죽처럼 뚝뚝 떨어졌을 때, 그것들을 외면하기 위해 들이키고 또 들이켰다.      


나와 상대, 세상과 일에 대해 사랑으로 충만할 때에는 마시지 않아도 황홀했다. 나의 맥주사랑은 다른 괴로움에서 도피하기 위함이었으니, 결코 순수하다고 볼 순 없었으리라.      


욱하고 울컥할 일 투성이인 대한민국에서 절대금주를 외치진 못하겠다만, 맥주를 ‘인스턴트 달링’이 아니라 ‘롱 디스턴스 달링’으로 변화시키자는 계획 정도야 세울 수 있지 않을까. 


10년이면 충분히 마셨다. 어제부터 싱하 맥주병 하나에 차곡차곡 돈을 모으기로 했다. 맥주 한 번 참을 때마다 그 만큼의 지폐를 쏙, 어이없어 화내는 호가든과 아사히에겐 “자기야, 우리 오래오래 그리워하다 만나면 더 달고 짜릿할 거야.”라고 토닥여 주고.      


저금통이 꽉 채워져 더 이상 안 들어가게 되면 여지없이 깨뜨려 태국행 비행기 값을 치를 거다. 그 기간 동안 더운 나라를 여행하기에 적당한, 가볍고 튼튼한 몸이 마련되면 더욱 바랄 게 없을 테고. 그 때 마실 맥주의 황홀경은 내가 아는 미사여구로는 아직 수식도 못하겠다!      



2013년 <빅이슈> 재능기부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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