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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은성 Sep 15. 2018

우리 큰이모의
최양락 개그같은 위로

"속이 상하니까 소주 마셨지, 기분 좋았음 커피 마셨겠지?"

혼술로 소주 두 병을 비운 건 난생 처음이었다. 자몽맛 소주였지만 도수는 그다지 낮지 않았다. B가 미워서 한 잔만 하려던 건데, 한 잔 하고 보니 채널을 돌리듯 미운 게 또 새롭게 떠오르잖아? 그래서 두 잔이 됐다. 술 덕분에 흥겨움의 거품이 넘쳐 흘러 서러운 마음을 덮어버린다. 거품이 사그라들기 전에 작업실에서 나와 한 병을 더 사왔다. "그 집에선 늘 예쁜 사람만 나오네." 계단에 앉아 노을을 바라보고 계시던 옆집 할머니가 웃으신다. "할머니도 예뻐요!" 이 말을 이후로 더 흥이 돋아서, 잘 알지만 친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인스타그램 디엠을 잔뜩 보냈다. 

"저 좀 만나주세요. 맛난 술 마셔염." (다음날 보니, 약속이 7개나 잡혀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큰이모 집이었다. 성산동에서 일산까지 버스를 탄 일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꼴 보기 싫으니까 구석에 있어.” 엄마가 복화술을 한다. 

자꾸 웃음이 나왔다. 엄마 등에 매달리니 포근했다. 팔이 무거워 보니, 숙취해소약과 이모와 엄마 드릴 박카스 한 박스를 사왔나 보다, 내가. 취해도 성실하군.


“지금 웃음이 나와?” 

"응, 멈추지가 않네." 


엄마는 앞치마를 두 벌 가져 왔다. B 입으라고 카모플라주 무늬로, 딸 입으라고 와인색 꽃무늬로. 둘에게 어울릴 무늬를 찾아 고르느라 엄마는 또 몇개의 다이소와 홈플러스를 들렀을까, 허리도 아프면서. 찡하니까, 토가 나왔다. 숙취가 심할 때, 감정을 느끼면 별로 안 좋구나. 화장실에 달려가며 슬쩍 보니 B는 정지화면이었다. 웃지도 않고 화도 안 내고 단단히 굳은, 그러나 가족들 앞에서 예의바를 정도로만 굳은 표정.      


옥매트에 쩍벌로 누워 생각했다. 

‘그 많은 남편들은 어떻게 아내에게 시댁 일을 시키고 드러누워 티브이를 보았나. 대단들하다.’ 


이모 방 전기 옥매트의 올록볼록 옥들이 가시방석 같았다. 혹시 다같이 내 욕 하나 싶어 잠도 안 왔다. 까무룩 잠이 들 때 아삭아삭아삭아삭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맛있어? 맛있지? 순무. 순무. 순무라는 거야.” 

“솜무우?” 

“응, 그렇지 그렇지. 순무.” 

공동의 적이 생긴 엄마와 사위는 사이가 한층 가까워져 있었다. 


뭐라도 도와야지 싶어 기어나갔다. 무채를 썰기 위해 몸을 굽히자마자 또 올라왔다. 힐긋 보니 B는 좌식 생활에 익숙하지 않아 양반다리가 아주 불편해 보인다. 

이모가 물었다.

 “재미있니?"

"김치 만드는 것은 재밌어요. 하지만 무를 자르고 자르고 자르는 건 조금 지루해요. 무가 너무 많다."


다문화 고부 열전에 나오는 며느리처럼 애인은 산더미만한 무를 썰고 양념을 비비고 짐을 날랐다. 나는 술이 좀 깼는데 그래도 좀 아픈 척을 했다. 

“이따 집에 갈 때의 정적을 어떻게 견디지? 오케이. 엄마 집에 오랜만에 간다고 하자.” 

엄마는 복화술도 하더니 마음도 읽을 줄 알았다.

 “발로 차 버리기 전에 니네 집으로 가라.” 말투가 겨울 무처럼 차가웠다. 




가오나시처럼 멀리서 엄마와 큰이모, 프랑스 사위 B를 관찰했다. 영어를 못해도 말은 통했다. 

일단 “바티야”라고 길게 부른다. 부르고 나서 ‘음...’하며 궁리. 그 다음은 ‘몸으로 말해요.’ 다. 

배추를 여러개 날라야 하면? 하나를 들어서 옮기며 말한다. “배추! 배추! 다! 다!” 

서로의 소통에 흡족해진 이모는 갑자기 칭찬을 한다.

 “얘는 눈치가 빨라서 어디 가서 밥은 안 굶겠다.” 

이모 말 다 통역하라고 했다. 

“너는 스마트해서 언제나 맛있는 음식을 먹게 될 거래.” 

인과관계가 좀 이상하지만, B는 기분이 좋아졌다. “네. 맛있는 한국 음식을 정말 좋아해요.” 

     

이모는 ‘사위는 백년손님’을 외치며 ‘조촐하게 감자탕 조금’을 준비해 놓았다. 대왕솥 안에 돼지등뼈 산이 있었다. “감자탕 하나론 밥 못 먹으니까 간단하게 잡채, 갑오징어 무침, 수육도 좀 했어.” 잡채는 한 학급을 먹일 정도였지만, 이모는 계속 모자랄까봐 걱정했다. 이모는 10년간 산속 식당에서 오리 목을 따고 오리 털을 뽑고 오리고기를 양념해 팔았다. 손님들이 “배가 터질 것 같으니 그만 달라”고 하면 식구들 먹는 반찬까지 싸 줄 정도로 후하게 대접해서, 무용과 다니는 딸과 사업에 연신 실패하는 아들을 키워냈다. 일찌감치 집 나간 남편 대신에.      






이모는 별명이 부처님이다. 조실부모한 우리 엄마에게는 엄마였고, 친할머니에겐 구박받고 외할머니는 보지도 못한 내게는 할머니나 다름없다. 갑자기 술이 깨면서 이모에게 징징대고 싶어졌다. 이모는 신산한 마음이 뭔지 다 아는 사람이니까, 내가 왜 종종 혼자 소주를 마시는지 알겠지. 


“이모. 이모. 한국에서 외국인이랑 사는 게 보통 일이 아냐. 매일 매일 시험 치르는 기분이야. 어제는 속상해서 좀 마셨어.” “속상하니까 술이지, 기분 좋으면 커피 마셨겠지?"


이모는 늘 이런 식으로 대답한다. 하나도 웃지 않는데, 개그맨 최양락 같다. '이게 무슨 소리냐' 싶은데 돌아보면 이모 말이 다 맞다. 누군가 용서해주면 나는 나를 쉽게 용서하는 성격이다. 그렇지, 내가 매일 참말 수고하지, 일년에 두어번 만취해야 인간미 넘치지. 숙취가 싹 가셨다. 


“아들이다, 내 아들이다...생각해. 그럼 상대가 뭘해도 이쁘고 기특하지. 미운 게 하나도 없지.” 

예전 같으면 고루하다 여겼을 것이다. 아들같은 사람하고 어떻게 사랑하고 살아요? 화를 냈을지 모른다.

옳고 공정한 말이 아니어도 괜찮을 때가 있다. 정교한 조언이 아니어도 될 때가 있다. 어떤 말은 그 따뜻함만으로 상처난 곳을 어루만진다. 나는 이모가 나를 사랑해서, 나의 가족이 된 B까지 어여쁘게 본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우리 둘을 모두 위로하는 말에 나는 마음을 놓았다. 어쩌면, 그냥 어리광을 부리고 싶던 날이었다. 이모, 내가 너무 힘이 들어요. 그런데 아무 데도 이야기하기 싫어요. 그러면 어떡하죠, 엉엉. 


“첫눈에 반하면 크게 실망도 하지. 그러다 실이 툭, 끊기지. 

애초에 티격태격을 실컷 해야 서로 잘 알게 되지. 

그러면 오래오래 참 좋은 사이가 된단다.” 


좋은 꼴 못난 꼴 보여야 부부라는데 이모는 그럴 틈도 없었다. 협박과 강요로 이모와 결혼한 이모부는 아이 둘을 낳게 하고는 집을 나갔다. 전국 팔도를 돌며 기둥서방 노릇을 하다 암에 걸려 돌아왔다. 기어코 이모가 차린 세끼 밥을 얻어먹다 세상을 떴다. 장례까지 말끔하게 치러주고 이모는 말했다.

 “내 할 도리 다 했다. 내 자식들 복 받으라고 내 도리를 다 했다.”      


B이야기를 하면 엄마와 이모는 한번도 내 편을 안 들어준다. 그저 우리가 신기하고 기특하고 한편으로 애틋하고 애처롭다고 한다. 내가 김장을 하나도 돕지 않고 종일 숙취와 싸워도, 그래서 B가 혼자 김장을 다했어도 화내지 않는다고 대단하다 한다. 무채를 썰고 양념을 채우고 김치를 나르는 남자를 처음 본 거다. 엄마와 이모는 평생 혼자 다 해 온 일이라며 고마워하라고 한다. 사랑하고 서로 보듬는 부부관계를 처음 본다고 신기해한다. 


한번은 엄마가 맥줏집에서 물었다. 

"너는 걔 뭐가 그렇게 좋으니?"

나는 신이 나서 식당 밥을 먹고 난 뒤 치우시는 분들 편하라고 아주 예쁘고 단정하게 식기를 정리해두는 습관을 이야기했다. 컵과 포크를 자리에 두고 나와도 되는 카페에서도 늘 쟁반에 잘 모아서 데스크에 가져다 주고 "고맙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외치는 습관을 이야기했다. 그냥 듣고만 있던 엄마는 다음번에 B에게 주는 카드에 이렇게 썼다. "참 착한 바티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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