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글 잘쓰는 사람이 글쓰기책을 써야하지 않나?'
띵동. 택배아저씨가 또 한권의 작법서를 배송해 주셨다. 이미 책상 위에는 스무 권 정도의 작법서가 쌓여 있다. 참고 자료가 지나치게 많다는 것은 불안감의 증명이기도 할 터. 에세이를 쓸 때는 내 마음에만 귀기울이면 되었다. 아이디어를 자극할 몇 권의 에세이책을 뒤적일 뿐이었다.
그러나 ‘글쓰기에 관한 글(’이미 지루하게 들리지 않는가)을 쓰고자 앉으면 전원선이 빠진 10년된 노트북 같아진다. off모드가 된다는 소리다. 나는 왜 이 글을 영영 쓰지 않는가. 왜 어려움을 느끼는가. 오늘은 그 주제를 써보기로 한다.
간단하다. ‘글쓰기를 잘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데, 그 표현 도구가 ‘글’이라니. 정말 아이러니하다.
작가는 곧잘 이런 환청에 시달린다.
“이 글이 더없이 빼어난가? 완벽하게 훌륭한가?
남에게 글 잘 쓰라고 감놓아라 배놓아라 가르칠 자격이나 되나. 으아악악”
또는, “팟캐스트나 유튜브가 낫겠어. '말도 잘 못하시는데’ 또는 ‘못생기셔서’ 글쓰기 잘 가르치시겠어요?”
이런 댓글 다는 사람은 없을 것 아닌가.
시작한 김에 더 칭얼거려 보겠다. 춤을 잘 추는 법을 찍어서 유튜브로 업로드한다? 물론 코치가 춤을 춰야 하겠으나, 최소한 조명과 의상, 편집기술의 덕을 볼 수 있지 않은가. 기댈 곳이 있다.
연기 코치를 보자. 연기를 시연해 보이며 학생에게 도움을 준다. 그러나 그의 연기는 극 한편의 분량이 아니다. 특정한 상황, 특정한 대사를 보여줄 뿐이다. 문득, 뜬금없이 봉준호 감독의 인터뷰가 떠오른다. “사정을 참고 있는 것 같은 표정을 지으라”고 요청하거나, ‘너무 너무 별로인 연기’를 직접 선보이며 ‘이렇게 해 달라’고 하면 배우들이 황당해하며 그보다 훨씬 나은 연기를 보여준다나.
더 극적인 예를 떠올리자. 아는 수영코치의 말을 기억하고 있다. “제가 가장 수영을 덜 한 때는 수영코치로 일하던 때였어요!” 그렇다. 코치는 전속력으로 물살을 가르는 일이 드물다. 영법을 알려주고 수강생들의 자세를 교정해 줄 뿐, 수영코치더러 “에이. 실력 좀 보여주시죠.” 라고 주문할 수강생은 없을 터이니.
아무튼,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겠다. 이유는 정말 여러 가지다. 글쓰기에 관한 글을 쓰는 것은, 나같은 불안증+틀에 박힌 것을 싫어하는 병 환자에겐 가혹한 일이다. 매주 강의를 하고야 있지만, 강의는 2시간이면 끝나며 그 모든 순간들은 완벽히 휘발된다. 바로 그 점이 두려운 것 같다. ‘책임 질 소리만 해야 한다’는 건 원래 내 라이프 스타일에 맞지 않는다. 어제 한 말을 오늘 기억 못하는 인간이, 굳이 ‘책’을 쓰기 시작하다니 무모했다.
게다가 나는 늘 ‘선생님’으로 불리기는 하지만 원로급이 될 때까지 그 호칭을 생경해 할 사람이다. 가르치는 자아를 가지고 있지만, 강의실이 아닌 곳에서 글을 이렇게 써야 하니 마니 말하는 걸 그다지 반기지 않는다. 친구의 글쓰기 질문에는 이렇게 반응한다. "니가 될 놈이면 되겠고 안될놈이면 안될 터이니..."
그러나 글쓰기에 관한 글은 인쇄되어 세상을 돌아다닐 것이다. 글쓰기 책을 내면 ‘글쓰기 책’을 낸 사람이 된다. 글쓰기 책을 낸 사람들을 훈장님 격으로 생각하는 나의 고정관념이 또 한몫 한다. 늘 한결같은 소리, 맞는 소리들만 할 것 같다.
나처럼 우왕좌왕 뒤변덕을 떨지 않고 말이지.
내 생각에,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해 쓰고 싶어하는 건 언제나 (영화 감독이 아니라) 영화 칼럼니스트다.
최소한 스티븐 킹 정도 되는 사람이어야 글쓰기 책 저자로서 신뢰가 있을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이미 썼다. 바이블 오브 바이블이 된, <유혹하는 글쓰기>.
어제는, 내가 본 중 가장 지루한 책을 쓰는 사람이 (더구나 내 고료도 떼어먹은 인간이!) 글쓰기 책을 광고하는 것을 보았다. 빌어먹을 페이스북. 죽어라 주커버그.
'세상에서 ㅅ사가장 글 잘쓰는 사람이 글쓰기책을 써야지 않나?'
'세서 가장 글 잘쓰는 사람이 글쓰기책을 써야지 않나?'
(2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