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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은성 Nov 10. 2018

제 취미는요:

비는 피하지 못했던 페스티벌에서 느낀 행복과 전율

오랜 기간 마땅한 취미 없이 지냈다. 어릴 적에는 학교에서건, 어디서건 취미가 무어냐는 질문을 왕왕 받았던지라, 없는 취미를 지어내 대답하기도 했다. 그러다 보면 거짓말을 했다는 죄책감이 괜히 들어서 책 읽기가 취미라고 말한 날은 책을 뒤적이고, 영화 보는 게 취미라고 대답한 날은 혼자서 영화나 한 편 보고 그랬다. 그러다 누가 내 취미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는 시기가 오니 무언가를 지어낼 필요도 없었고 일부러 어떤 행위를 하지 않아도 됐다.  


무얼 하면 내가 즐거운지, 지친 마음을 보듬을 수 있는지 몰랐고, 매일 똑같은 일상을 지냈다. 내가 맡은 역할에만 충실했다.


중학생 때 학원에서 만난 힙-한 친구가 국카스텐이라는 밴드를 좋아한다며 쉬는 시간마다 그로울링(목을 긁는 듯 한 소리를 내며 노래하는 창법)을 연습하는 걸 보고 락밴드, 인디밴드에 눈을 떴다.


그 뒤로 언니네 이발관이니, 브로콜리너마저니, 모던락 그룹 정도로 불리는 가수들의 노래를 즐겨 들었고, 자연스럽게 페퍼톤스도 알게 됐다. 겨울의 사업가라는 곡을 몇 번 듣고 금방 질렸는데, new standard라는 이름의 2집 앨범에 수록된 drama라는 곡을 처음 듣고 한동안은 그 곡을 재생하는 전자기기에 연결된 이어폰을 밤이고 낮이고 몇 날 며칠 귀에 꽂고 다녔다. 공부할 때 듣고 이동할 때 듣고, 음악 감상하는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던 지난날들이 무색하게 그 앨범을 통해 ‘감상’을 하게 됐다. 이장원-신재평의 노래들을 무척 사랑하게 됐고. 그럼에도 취미를 묻는 물음에 음악 듣기라는 답을 하지는 않았다. 시시하니까.


두 번째 친 수능을 시원하게 말아먹고, 우울한 마음을 페퍼톤스의 노래로 달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던 중 우울증을 위한 뉴테라피 2인조 밴드-페퍼톤스다.-의 10주년 연말 공연 소식에 단숨에 고가의 공연 티켓을 난생처음  결제했다.

공연은 처음이라... 떡볶이 코트를 입고 쭈뼛쭈뼛 공연장을 찾았다. 내 인생에 춤은 초등학교 6학년, 수학여행 장기자랑 시간을 위해 연습한 보아의 마이 네임이 다 였는데, 단차가 있는 공연장의 뒷좌석에서 일어나란답시고 일어나서 그것도 춤이라고 내가 그렇게 몸을 덩실댈 수 있는 사람이었나 처음 간 공연이 맞나 싶게 온 몸으로 즐기고 돌아왔다. 공연을 통해 내가 느낀 흥 외에도, 공연은 특별했다. 공연장을 울리며 내 귀로 전해지는 무대 위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사운드는 이어폰을 통해 건너오는 음악과는 또 달리 풍성했다. 정해진 시간 내에 기승전결이 있었고, 아티스트와 관객 사이 알 듯 모를 듯 한 교감이 오갔다.


몇 번의 페퍼톤스 공연을 더 찾았고, 공연의 맛을 알게 된 것과 함께 공연을 가서 오감으로 즐기는 행위가 내게-지갑은 얇아질 지언정- 감정적으로 안정과 휴식을 준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후 나는 언젠가부터 누군가 취미를 물으면 ‘공연 가는 것’이라고 답 한다.



페스티벌은 공연 중에서도 만날 수 있는 아티스트들도 더 많고! 술도 있고! 음악도 있고! 맛있는 음식도 있고! 모두가 즐거운 곳이다. 매번 비싼 가격에 결제를 망설이지만 결국 결제를 하고, 그럼에도 절대 후회하는 일은 없다. 얼마 전 갔던 페스티벌은 그동안 찾았던 페스티벌 중 나를 가장 행복하게 만들었다.


오랜동안 가라앉은 상태였다. 슬럼프라는 단어는 굳이 붙이고 싶진 않지만, 되는 일은 없고, 그 와중에 나 스스로도 한심할 정도로 뭘 제대로 못 해내는 지지부진한 상태가 오래되면서 멘탈은 멘탈대로 지치고 그렇다고 일을 놓는 것도 아니니까 피로는 풀어질 틈 없이 쌓였다. 그런 와중에 언젠가 발랄한 마음으로 예매했을 공연의 날짜가 다가왔다. 공연 당일, 여느 주말과 같이 쌓여 있는 일들이 눈에 밟혀 등지고 어딜 가기가 참 민망했다-민망할 게 아닌데 스스로가 하루 신나게 놀고 오는 것을 곱게 봐주지 못할 만 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한참 고민을 하다가 정말 큰 결심을 하고 집을 나섰다. 그렇게 고민하고 나왔는데 비가 왔다. 페스티벌에서는 스탠딩 존에서는 우산을 쓰지 못하게 되어 있었으므로 젖은 우산이 참 난처했고, 그 날 따라 왜 배낭을 안 매고, 배낭이 아니면 크로스백이라도 매지 왜 파우치처럼 들기 위해서는 한 손을 버려야 하는 가방을 메고 와서는 그게 젖는 건 또 싫어서 팔 깊숙이 끼워 우비를 껴입고… 낑낑대며 우비를 한창 무장하고 있으려니까 헛웃음이 났다.

정말 우중충했다. 하지만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다. 페스티벌이니까!

공연장에 도착해서 우비를 받아 입으면서 내뱉은 그 헛웃음에 비가 오다 말다 하는 날씨, 집에 두고 온 일들에 대한 걱정, 남들 다 누구랑 왔는데 난 혼자야 따위의 시답잖은 감정들… 나를 행복하지 않게 만드는 모든 것들이 다 뱉어졌던 모양이다. 아무 생각 없이 오롯이 나로서 다만 비 젖는 것을 조금 신경 쓰며 그 날 하루를 오롯이 나의 것으로 만들었다. 지난하고 지루하고 지지부진했던 지난날들을 순간적으로 다 잊을 만큼 행복을 느끼며 뛰었고 노래했고 열광했다 내리는 비를 맞으며. 춤은 출 줄 몰라도 음악에 몸을 맡긴다면 이런 걸까..! 하며 춤을 췄고, 잘 모르는 노래는 허밍으로, 잘 아는 노래는 가사 한 마디 한 마디 또각또각 씹으며 노래했다.


돌아오는 길에 다음날의 출근을 곰씹었고, 반쯤 쉰 목과 고장 난 듯한 발목이 조금 걱정됐지만, 공연에서 느끼고 온 더할 나위 없는 행복에 비할 바 아니었다.




카누

앞에 있는 커피 타듯

이야깃거리를 글에 타낸다.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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