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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은성 Nov 12. 2018

열심히 할게요, 교수님.

교수님의 잘 돼가냐는 물음에 결국 답을 얼버무린 대학원생 P의 일상


지난 한 주 내내 헛웃음을 달고 다녔다. 언젠가 상담 선생님은 힘든 상황을 한참 얘기한 내게 그때의 기분을 물으셨고, ‘웃기던데요?’ 대답하는 내게 ‘그런 상황을 극복할 힘이 당신한테 있는 거예요.’하며 북돋워 주셨다. 정말 그런 지는 모르겠지만 지난 한 주 내내 정신-육체 모두 힘들었는데 사이사이 헛헛하게도 웃음이 계속 났다.




[토 : 논문 쓰기]


그 전 주 금요일이 마감인 논문의 인트로덕션을 작성하느라 목요일 밤을 꼴딱 새웠다. 눈을 잠시도 붙이지 않으면 죽는 줄 알고 있어서 세 시간 정도 눈을 붙였고, 딱 한 단락의 반을 채우지 못했다며 함께 마감을 정했던 선배에게 읍소했고-팀 프로젝트의 논문이다-, 마감 기일을 일요일로 늦췄다. 덕분에 금요일은 왠지 여유가 생긴 기분으로, 전날 못다 잔 잠을 잤고, 그 업보는 다시 토요일 날 밤을 새우는 것으로 돌아왔다. 


카페에서 논문을 쓰며 볼륨이 한 두 단계만 더 높았다면 주변에서 ‘뭔 저렇게 욕을..’성싶게 혼잣말로 욕지거리를 웅얼거리다가 그런 스스로를 인지하고 낄낄 웃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심지어 스스로를 비웃는 것도 속으로 하지 못하고 혼잣말하듯 웃었네. 몰두하는 사이사이 자조하고, 한숨 쉬고, 이게 맞는지 의심하고, 이 아름다운 주말에..! 하며 자기 연민에 빠지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웃었다. 


그게 웃기니? 돌이켜 생각해보면 하나도 안 웃긴데 실없이 쪼개기나 하던 나 자신이 어이없고 웃길 뿐이다. 시간이 더 주어진 것을 핑계로 금요일 마감을 위해 작성했던 초고를 상당 부분 갈아엎는 퇴고를 했다. 어느 정도 할 만큼 했다는 기분이 든 뒤에야 나는 잠자리에 들었고, 카페인의 부작용인지 콩닥거리는 가슴을 느끼다가 이 날도 세 시간쯤 잔 모양이다.

10시간 논문을 쓰면 4시간은 빈 화면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일, 월, 화 : 세미나 발표 준비 및 발표, 대학원 수업 등]


일요일 하루가 짧지 않았을 텐데, 밀린 집안일이며, 정리를 하다 반나절이 갔고, 화요일 발표를 해야 하는 논문을 느지막이 펼쳤다. 영 집중이 안 되니 또 주섬주섬 장비들을 챙겨 들고 24시간 하는 카페를 찾았다. 요즘 즐겨 마시고 있는 아이스 밀크티를 주문해 단숨에 얼음이 드러나게 마셔버리고 미처 살펴보는 것을 끝내지도 못했던 논문을 다시 폈다. 아니 이거… 이틀 밤을 꼬박 새도 각이 안 나오는 논문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표기된 저자만 24명인 대규모 프로젝트의 결과물이다. 리절트-실험 결과-에 해당하는 소제목만 10개, 한 페이지를 3단으로 나눠 빼곡히 글자들이 들어차 있었고, 피겨-논문의 그림이나 도표-도  a부터 k까지의 작은 피겨들을 포함하는 큰 피겨가 7번까지 이런 구성의 논문이 13장. 메서드-실험 방법 등을 기술하는 부분-는 13장 안에 있는 게 아니라 서플리멘터리-논문 안에 포함되지 않은(논문에는 요약 정도로 기술돼 있는 경우가 많다.) 보충하는 데이터, 보다 자세한 방법, 실험 결과들을 정리해 따로 업로드 해 둔 것 들의 총칭-에 따로 있었고, 서플리멘터리 피겨는 8번까지 해서 서플리멘터리 파일의 읽어봐야 하는 부분은 총 47페이지. 정말 토 나온다. 


교수님께서 이 논문을 정해주신 것은 진심인가? 이 각 안 나옴 어떡하지? 미쳤네 따위의 마음의 소리들이 논문 두어 줄 읽을 때마다 터져 나왔다. 마음에서, 입에서. 남의 시선까지는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뭔가 토해내지 않으면 터져버릴 것 같아서.. 그런 와중에 콧방귀를 흣흣 어이없는 웃음을 흣흣 냈다. 


그리고 그것은 준비하는 내동, 발표 당일인 화요일에까지 이어졌다. 발표를 해야 하는데 난생처음 보는 듯한 슬라이드들이 계속 화면에 띄워졌다. 힘들게 밤새며 직접 만든 피피티를 왜 나는 기억하지 못하는가. 발표를 들어주는 이들에게 너무 죄송하게도 발표 내내 헛헛한 웃음과 탄식 그 사이의 숨소리가 터졌다. 발표가 끝나고 연구실 후배님이 ‘언니 고생하신 게 너무 훤했어요, 고생했어요.’ 하는데 너무 웃겨서 ‘그래 보였니? 맞아’ 하고는 아주 배를 잡고 깔깔 웃었다.




[목 : 외부 출장, 조교 ]


이번 학기에는 우리 지도교수님 수업의 조교이기도 하면서 저 멀리 다른 학교 교수님의 두 과목 조교를 맡기도 해서 격주에 한 번 씩 그 학교로 출근한다. 이번 주, 외부로 조교를 나가는 날에는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조교님~안녕하세요! ’ 알은체를 하며 인사를 하는 아이들을 보자니 지난주에 이 아이들에게 해 줬던 거지 같은 수업이 떠올랐다.


보충수업을 맡기고 떠난 교수님께서 알려주신 범위를 준비해 갔다. 수업을 시작하고 한창 떠들고 있다가 이 싸한 느낌 뭘까 하고 강의실을 둘러보는데 수업을 듣는 아이들 표정이 무슨 아무 맛 안나는 음식 씹는 것 같았다.‘이게 뭐야..’하는. ‘너희들 왜 그러냐’ 하니 그 전 부분 진도를 안 나가서 배운 바가 없단다.


‘저 사람 뭐 하는 거지’ 싶었나 보지? 왜 아무도 말 안 하니, 진도 틀렸다고.. 이 자식들아..  


내용은 알지만 강의를 준비해온 것은 아니었던 터라, 버벅버벅 미처 진도가 덜 나갔다는 부분을 메꿔주고, 준비해온 강의를 이어 붙여 수업을 마쳤다. 잘 준비를 해 왔음! 이라고 자부했던 내용도 덤으로 버벅댔다. 내 할 바를 다 했지만 모든 게 내 잘못인 것만 같은 공허함, 내가 조교를 하지 말았어야 해, 이번 학기는 언제 끝날까? 다음 주에 오기 싫다... 


아무튼... 오늘 그 아이들을 보니, 지난주 그 날이 떠올라 뒷자리에서 콧방귀로 만들어지는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이마를 짚었다. 아…


남의 학교라 괜히, 젖은 낙엽이 예뻐서 찍으려고 했으나 fail. 희뿌연 게 꼭 대학원생의 미래 같다.




[금 : 개인, 팀 프로젝트 미팅]


수 주째 개인 프로젝트가 제자리를 걷고 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뭔가 진득하게 할 법한 내용들인데 다른 일들에 치여서 후순위로 밀리고, 그러다 보니 매번 일주일 씩이나 지났는데도 한 게 없어? 하게 되는… 뭐 그런 상황이다. 그래서 매주 금요일에 있는 프로젝트 미팅이 참 두렵다. 


이번 주의 핑계는 논문 작업과 발표 준비다.

‘며칠 밤을 새우니 여남은 날들 효율이 나오기가 힘들지요, 교수님.’ 하고 말씀드릴 순 없고-그러게 누가 밤 새 가면서 하래? 밤을 새도 모자란걸요!-, 짤막하게 개인 프로젝트 진행 중인 내용에 대해 말씀드렸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서 교수님을 바라다보니 교수님이 웃음기 어린 얼굴로 ‘미팅 끝이야? 이게 다야?’하신다.  되게 쫄았었는데, 그렇게 무거운 분위기는 아닌가? 싶어 교수님 속도 모르고 ‘네.헿’ 하고 웃음을 흘려버렸다. 다행히도 내 대답에 교수님도 나와 마주 보고 함께 낄낄댔지만, 당시 교수님 속내는 아직도 모르겠다. 너무 슬퍼. 흑.




열심히 할게요, 교수님. 



카누

앞에 있는 커피 타듯

이야깃거리를 글에 타낸다.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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